일본 프로레슬링은 1980년대, 캐치 레슬러 칼 곳치(Karl Gotch)의 훈련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실전 지향적인 레슬링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UWF라는 실전 프로레슬링 단체를 결성하며 직접적인 손발 타격을 도입하는 등 변신을 꾀했고, 이는 훗날 일본 종합격투기의 초석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인 1964년 3월 7일, 한국에도 ‘프로캐스처’라는 새로운 격투 단체가 창립 대회를 개최하며 종합격투기 시장의 첫발을 내딛었다. 프로캐스처는 '프로레슬링 쇼파문' 당시 일부 선수들이 이탈했고,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국내로 도입된 태국의 무에타이를 혼합하여 새로운 격투기인 ‘프로캐스처’를 도입한 것이다.
프로캐스처는 상대를 메치거나 관절 꺾기, 목조르기 등 프로레슬링 기술과, 주먹, 팔꿈치, 발차기, 무릎 공격이 주를 이루는 무에타이 기술을 혼합하여 경기를 치렀다. 이는 오늘날의 종합격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캐스처는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티온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설명되었지만, 쓰러진 상대에게 공격을 가하는 원초적인 격투 형태는 그리스 판크라티온이나 브라질 발리투도 등과 유사했다.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호전적인 민족의 역사 속에는 늘 이러한 형태의 격투가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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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프로캐스처 경기 장면(대한뉴스 1964.5. 30)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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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에서 프로캐스처 역시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기대와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어떤 이유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선수들은 프로캐스처 해체 후 다시 프로레슬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기존 프로레슬링의 아성을 넘을 만한 화제거리가 부족했던 것이 흥행 실패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이후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프로레슬링을 주류 스포츠에서 배제하고 프로 스포츠 태동에 힘을 쏟으면서, 격투기 종목은 프로 복싱을 제외하고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만약 1960년대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한국 격투기 시장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정권은 구기 종목의 프로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고, 격투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을 치른 정부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격투기 종목은 더욱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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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2016년 故)이왕표 회장과 항께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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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 격투기 시장은 경제 성장과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이룬 2000년 초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대중들이 인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격투기 시장은 체육계 에서도 하나의 영역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소수의 즐길 거리로만 치부되고 있다. 국내 격투기가 아무리 선전한다고 해도 변변한 스포츠 채널 섭외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1960~70년대처럼 볼거리가 TV 수상기로 한정되던 시대에는 격투기가 인기 종목이었으나, 지금은 스포츠 외에도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다양하다. 그래서 당시의 인기를 그대로 재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든다. 나이 여든의 어른이 WWE 프로레슬러의 이름과 기술명을 기억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세대에게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고, 그 흥미가 나이가 들어서도 이어진 것뿐이다.
이제는 격투 무예, 격투기 종목도 활성화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무예계도 현재 진정 고사(枯死) 직전 이다. 특정 종목 하나만 시장을 독점하면 도태될 뿐 아니라, 대중의 흥미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과거 1960년대처럼 무예 시장의 다양화가 이루어져야 균형 잡힌 무예와 격투기 선진국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