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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는 진실이 아니다!
[신성대의 혼백론 5]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0/08/31 [17:48]
▲ 신성대 주필     © 한국무예신문

문명화된 인간은 헛것에 매달려 헛짓을 많이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화라는 것치고 헛것아닌 것이 있으랴!

 

문명화된 인간은 하루 중 상당 부분을 실제 생존과는 관련 없는 일로 보낸다. 이미 누천년을 그렇게 살면서 헛것에 세뇌 내지는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바라 볼 수 없게 되었다. 해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를 편견 혹은 선입견이라 하여 진리를 찾는데 가장 큰 방해물로 여겼다. 그러니 수행이란 이 헛것을 버리는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헛것 중에서도 특히나 인간의 욕망과 정서가 개입된 생각을 버리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문자)에서부터 그 헛것을 떨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진실된 원시언어

 

지구상 인류가 사용하는 수많은 언어(문자) 중 한국어만큼 원시 고어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드물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부분 순우리말은 원초적으로 단음절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 자료이미지.(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무예신문

 

  , , , , , , , , . , , , , 젖 등 인체에 대한 명사는 물론이고 산, , , , , , , , , , , , , , , , , , , , , , 등등 거의 대부분 명사가 단음이다. 게다가 간다, 온다, 죽다, 살다, 싫다, 좋다, 크다, 작다, 길다, 짧다, 먹다, 싸다, 누다, 앉다, 눕다, 서다, 기다, 뛰다, 세다, 꼽다, 찍다, 넣다, 빼다, 밀다, 끌다, 베다, 놓다, 들다, 집다 등등 동사나 수식어조차도 원초적으론 외자로 되어 있다. 그 외에 다리, 허리, 나무, 구름 등의 두 음절의 단오들도 초기에는 외자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초기 인류의 모든 민족 언어의 형태가 이처럼 단음절이었을 것이다.

 

이 원시적 단음절 언어에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나 움직임을 그렇게 부르기로 정한 것이다.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던 인간의 발성기관이 진화되면서 그것들을 구분해서 정해두고 서로 소통할 필요가 생긴 것이리라. 사회적 동물이란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동물이라 정의해도 되겠다. 인간의 감정이나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그러니까 편견이나 선입견에 전혀 때 묻지 않은 이런 단음절 원초적인 동사나 명사를 필자는 원동사(原動詞) 원명사(原名詞)라 부른다.

  

이후 인간사회가 차츰 복잡해지면서 두 음절 이상의 언어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며, 복합어, 개념어가 차례로 생겨났을 것이다. 헌데 이 복합어(; 손가락, 콧구멍, 팔꿈치 등)부터는 자연스레 연상능력하게 된다. 인간의 의도가 반영된 언어의 등장! 도구를 만들고 다루는 능력과 함께 언어의 조합 능력도 생겨났으리라. 이후 비로소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인류 두뇌(전두엽)의 비약적인 확대가 따랐을 것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인류는 본격적으로 문화창조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비로소 조작이란 개념을 깨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언어 조합 능력은 머지않아 인간은 밉다’ ‘좋다’ ‘싫다라는 감정(욕구)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만들어낸다. 더불어 수식어(부사)까지 만들어내더니 나중에는 형용사를 개념화 명사화하는 수고로운 작업까지 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인간은 가식을 깨우치게 된다. 이후 의도된 용어들이 무수히 생산된다. ‘있다’ ‘없다에서 그렇다’ ‘아니다, 다시 맞다’ ‘틀리다가 생기면서 인간의 고뇌와 갈등의 판도라 상자가 하나씩 열리기 시작한다. ()의 개념은 비교와 거래의 문화를 만들어 계산적 인간이 된다. 그러자 종교는 상상계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그럴 걸 철학이라는 개념놀이로 발전시켰다. 문자의 창조는 이를 무한대로 넓혀놓았는데, 지금도 인간들의 언어를 가지고 노는 창의적인 놀음을 계속되고 있다.

  

형용사는 편견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이나 명상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도대체 뭘 얻으려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런 식의 수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잡생각(망상)이다. 그러니까 수행이란 이 잡념과의 싸움이라 하겠다.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멈추는 순간 머릿속은 뱅뱅 돌아가기 시작한다. 정공(靜功) 수련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말로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라고 하지만 그게 결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해서 주문을 외우거나 화두를 붙드는 등 온갖 방편을 개발해서 졸음과 잡생각을 쫓는다고 용을 써보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수행인들이 진리의 변방에조차 가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잡생각과 싸우다가 중도 포기하고 만다. ()하면 흩어지고 정()하면 몰려드는 게 잡념이다. 그래서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잠드는 거다. 기실 앉아서 뭔가를 깨우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더없는 고행(자기학대)이다.

 

, 그럼 잡생각을 버리면 진실(진리)가 보이는가? 진리에 가까이 가는가? 잡생각을 버리면 참생각이 남는가? 그러면 참나가 보이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생각이란 것 자체가 망상, 상상의 찌꺼기, 즉 형용사다. 자연적(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형용사는 거짓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동사만이 진리다. 동사를 제외한 인간이 만든 모든 형용사 및 형용사적 명사, 즉 개념어 자체가 인공지능이다.

 

그에 비해 AI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계산지능이다. 동사나 고유명사에는 거짓(의도)이 없다. 따라서 그에 명명된 기호[]을 당장 치우거나 바꿔 불러도 그 존재나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AI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AI와 인간이 바둑을 두다가 재미없으니 장기나 오목을 두자고 하면? 다시 프로그램을 짜 넣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재미없다며 알까기를 하자면? 손가락을 만들어 달아야 한다.

  

누가 아름답다말하는가?

 

2017년 국립국어원에서는 잘생기다’ ‘못생기다’ ‘잘나다’ ‘못나다’ ‘낡다의 품사를 지존의 형용사에서 동사로 변경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게 동사면 잘생겨라’ ‘잘생기자도 성립되겠다며 성형수술 붐에 빗대어 비아냥대기도 했다. 아무렴 이러다간 아름답다도 형용사가 아닌 동사가 되는 날도 오게 될 것 같다. 아름하다? 아름지자?

 

꽃이 아름다운가? 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 말고 또 있을까? ‘아름답다는 개념 자체가 조작이다. 자연계에선 없는 말이다. 선입견이고 편견이다. 장미꽃과 호박꽃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인간이 정해놓은 판단의 기준자체가 모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장미가 아름답다거나 꽃이 아름답다고 하는 건 이 아니다. 그렇다면 안 아름답냐? 그도 아니다. 꽃은 꽃일 뿐이고, 산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이다. 거창하게 우주가 어쩌구 본성이 저쩌구 하는 법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까놓고 얘기하자면 작시(作詩)하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는 거다. 당연히 추한 것도 추한 것이 아니다. 꽃은 식물과 벌 나비 사이의 생존을 위한 소통 수단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가 존재(명사)이고 팩트만이 참(동사)일 뿐이다. 이렇게 형용사가 생기고부터 인간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로 사물과 현상을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름답다고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꽃을 보면 자동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꽃을 아름답다고 하자고 한 인간끼리의 약속을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자연(, 있는 그대로)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간들만의 결정이다. 당연히 그 낱말 속에는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이 들어있다. 흔히 ()의 기준이 다르다란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는 절대불변이어야 할 진리(진실)와는 오히려 반대쪽 개념이자 거짓이라 해야 옳지 않은가? 그러니까 현대 문명의 ()의 추구거짓의 경쟁이라는 얘기가 성립된다. ‘()’란 말 자체가 처음부터 인간의 헛짓으로 생겨난 말이다. 해서 미인대회 1등에다 ()’을 갖다 붙여 진짜 미인을 만들어내는 난센스가 생겨나는 것이겠다.

 

고프다, 무섭다, 위험하다, 피하자, 뛰자 등등 생존에 필요한 용어들과는 달리 애처롭다, 슬프다, 쓸쓸하다, 우울하다, 옳다, 그르다, 착하다, 나쁘다, 밉다, 곱다 등등의 표현들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자연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생존 용어란 굳이 그것이 없어도, 또 배우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지만 문학, 예술, 철학의 영역에 속한 말들은 모두 인간이 조작해낸 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학습과 전승을 통해 교육된 선입견이다. 이 선입된 편견을 붙들고는 영원히 윤회를 하며 억만년을 가부좌 틀고 앉았어도 에 이르지 못할 것은 불문가지겠다.

 

그런 편견이나마 언어로 전할 때(영성시대)에는 그 폐단이 심하지 않았으나 문자로 전하면서는 온갖 오해와 억측이 들어붙어 점점 부풀려져 갔다. 왜냐하면 말은 직접 사람 대 사람끼리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 감정까지도 묻어가지만, 글자는 대면이 없어 그 진심까지 전하기는 어렵고 껍데기만 전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빈틈에 다시 자기 편견을 또 보탤 수가 있게 된다. 수천 년 동안 경전을 붙들고 끊임없이 재해석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해서 성인의 말씀은 점점 위대해지는 것이다.

 

결국 참선이라 하든 명상이라 하든 수행(정신수양)이란 먼저 이 잡념(형용사)’와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고, 다시 편견과 선입견을 떨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참지혜를 얻게 되겠다. 하나 현실에선 오히려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더 없이 많은 언어(문자)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미쳐버리기 일쑤다. 실컷 화두를 붙들고 있다가도 돌아서면 또 공부를 한다며 설법을 듣거나 경전과 온갖 주석집을 파 헤집으면서 형용사(잡생각) 찾기에 몰두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자고로 경전 뒤지는 놈치고 깨친 인간 안 나오는 게 그 때문이다. 난지도 쓰레기산에서 광맥이나 수맥 찾는다고 곡괭이질 하는 꼴이다. 설사 그가 깨쳤다고 주장한들 그건 경전(글자)을 깨친 거지 (진리)’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래놓고는 오히려 제 망상의 찌꺼기를 억지로 쑤셔 넣어 보탠다. 덕분에 다음 사람은 더욱 앞이 안 보여 길을 헤매게 되고, 앞 사람의 공(?)과 명망은 그만큼 더 높아진다.

 

전두엽에 가득 찬 형용사를 지우지 않으면 절대 지혜의 문을 열 수가 없다. 예로부터 도통하는 데에는 머리 좋은 형용사적 인간보다는 차라리 무지용맹한 동사적 인간이 더 유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수행은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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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31 [17:48]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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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 20/09/01 [02:50]
묵언이 지혜다 묵언하라 조용히 말 혀끝에 죄가있고 글 단어에 속세가 있다 소리공해 문자 공해다 묵언의 지혜 수정 삭제
뮈여한글이여 20/09/01 [04:24]
부사가 진실이여 수정 삭제
20/09/01 [04:42]
임하필.더불어민주당어찌 손을잡안나 이권때문에 사상도없고 오로지 돈을위해서 장사하는가? 철학도장사가?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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