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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학습이다
[신성대 혼백론 6]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0/09/0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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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어쩌다 이런저런 공부한다는 사람들과 놀다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제일 싫은 것이 문자식(文字識)’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 생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경전이나 고문헌에 나오는 문자를 마치 증명된 진리인양 외워든 걸 읊어대기 시작하면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진다. 그 사람들 말(믿음)대로라면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이미 세상 이치를 다 꿰뚫고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능이 수천 년 동안 점점 퇴보해 왔다는 건가? 그러면 또 지성은 발달되었지만 영성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은? 현대과학이 아직 그것을 증명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단다. 젠장! 누가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할 건가? 결국 믿음(고집)이 강한 자가 이긴다.

 

석가,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가 문자로 제 말()을 남긴 적도 없고, 문자로 제자들을 가르친 적이 없다. 공자는 문자를 알아서 저술 활동도 하였지만 자기 말을 글로 쓴 적은 없다. 그 분들이 지금 다시 돌아와 자신에 관한 책을 본다면 분명 ?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 “그런 뜻으로 말한 적 없는데?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네?”라고 하실 것이다.

 

 

문자는 편견과 선입견이 가득해서 절로 소유론적(필자 나름의 해석) 사고를 하게 된다. 문자는 기호이면서 개념의 틀이다. 경계를 짓는다는 것은 곧 틀, 즉 사고를 액자에 가두는 것을 말한다. 그리되면 넓은 의미에서 문자옥(文字獄)이 만들어져 자연히 소유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이 문자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경계를 없애지 않으면 절대 자유로운 사고, 존재론적 사고가 불가능해진다.

 

소유론적 사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곧 경계가 만들어지고, 구분, 구별, 비교, 차별하는 사고의 버릇이 들게 된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이다. 싫고 좋고, 선하고 악하고, 다시 삼분, 사분, 오분 하는 복잡다단한 사고로 이어진다. ()는 일(), 음양(陰陽)은 이(), 사방(四方), 오행(五行), 팔괘(八卦) 등등. 온갖 구분과 층차, 경계가 만들어진다. 기실 선() 하나면 가로 세로 씨줄 날줄이 되어 세상의 그 어떤 것이든 무한대로 쪼갤 수 있다.

 

인간이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구분(경계) 없는 인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도(). 소유론적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 인식, 시간적인 사고가 아닌 통체적 사고, 구분해서 제거(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중시하는 사고, 소유개념적 사유가 아닌 존재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을 산()으로, ()을 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다. 다른 물감이나 조미료(티끌) 섞지 말라는 말이다.

 

 

형용사를 붙들지만 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 고 물으면 행복’ ‘가치’ ‘진리’ ‘자유’ ‘신념’ ‘내면의 아름다움등등 갖가지 그럴듯한 예쁜 말을 가져다 대지만 기실 다 헛소리다. 질문 자체가 헛것이지만 인간은 습관적으로(학습된 대로) 답을 찾아 고민해댄다. 철학을 한답시고 삶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처럼 말하지만 기실 자연에는 질문이 없다. 당연히 답도 없다. 그러니어떻게 사는 것이 좀 더 나은 문명화된 인간의 삶으로 보일까?” 정도의 애교에서 그쳐야 한다.

 

말씀이 문자로 옮겨지는 순간, 편견과 선입견이 달아 붙기 시작한다. 해서 성인은 점점 위대하고 높아져 신성불가침한 자리로 떠받들어진다. 다시는 바닥으로 못 내려오신다. 어쨌든 성인이 남겼다는 말씀의 본디 뜻을 지금의 사람들이 백 프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너도 나도 해석하고, 주석 달고, 번역하고, 해설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시대, 그 자리에서 그 분을 직접 보고 말씀을 듣기 전엔 온전히 이해하긴 글렀다. 그 시대엔 지금처럼 개념어나 관념적 수식적 용어가 많지 않았다. 지금의 해석을 그분이나 그 시대 사람들이 듣는다면 도무지 무슨 소린지 어이없어 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한답시고 나서서 괜히 더 깊은(진짜) 의미를 찾겠다고 용쓰지 말았으면 싶다. 그냥 그 분 말씀 중 동사만 골라서 직접 따라가 보라. 어차피 형용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다.

 

결국 수행이란 이 형용사와의 싸움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앉아서 이 형용사를 떨쳐내기란 여간 어렵다. 부사나 조사가 윤활유라면 형용사는 녹슮을 방지하고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 페인트다. 헌데 이 페인트는 본질을 가리고 때로는 그 자체로 녹이 되고 곰팡이가 되기도 한다. 수행은 동사형이다. 그러니 걸어라! 걸으면 형용사가 떨어져나간다. 그렇게 걷다가 화두가 잡히면 멈추고, 다시 걷다가 화두가 잡히면 멈추기를 반복해 보라.

 

 

가동사(假動詞), 가명사(假名詞)

 

앞에서의 동사나 명사란 당연히 원동사, 원명사를 말한다. 그렇다면 동사 아닌 동사, 명사 아닌 명사가 존재한단 말인가? 아무렴! 가가동사, 가가명사도 있다. 가령 모함하다’ ‘포기하다’ ‘흠모하다’ ‘존경하다’ ‘상상하다’ ‘날다’ ‘고민하다’ ‘후회하다’ ‘실망하다등등. 이런 것들이 과연 동사일까? ‘행복’ ‘인격’ ‘인권’ ‘자유’ ‘평등’ ‘자선’ ‘가치’ ‘이념등등. 이런 게 과연 명사일까?

 

필자는 그런 걸 가동사, 가명사라 부르고 그것들을 편견덩어리, 선입견덩어리라 부른다. 사유의 결정체라고 하지만 실은 찌꺼기다. 수행의 첫걸음은 이들을 가려내는 작업이다. 특히나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 도덕, 윤리, 상상계에 관련된 언어들은 이런 명사화된 동사와 형용사가 대부분이다. , 소설, 에세이 등 소위 문학류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세계를 다룬 철학서나 종교 경전들과 주석서들을 보면 하나같이 가명사, 즉 형용사형 명사들 범벅이다. 심지어 요즘은 승려들조차 고행이란 단어 대신 행복이니 사랑이니 하는 설탕 조미료를 잔뜩 처바른 힐링 책들을 펴내어 베스트셀러 순위를 다투고 있다. 고작 인생상담을 설법인양 부처를 팔아먹는 중들이 화장품 짙게 바르고 창녀처럼 헤픈 웃음을 띠고 벽보에 붙어 호객을 하고 있다.

 

 

유달리 시()를 경외하는 민족! 시인은 곧 민족주의자요 고매한 영혼을 지닌 지성인 대접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허나 시()는 그 자체로 형용사(形容詞)요 현혹사(眩惑詞). 그만큼 이 민족이 헛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지식이 많다는 건 그만큼 선입견과 편견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동사, 가명사를 화두로 잡으면 바보 된다. 수행인은 구체어가 아닌 추상어, 그럴 듯한 개념어나 관념어에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호한 언어는 진리로 안내하지 않는다.

 

산책은 분석력, 직관력, 통찰력을 증진시킨다. 걷는다는 건 한 걸음 한 걸음, 순간순간 주위와 바닥, 그리고 앞뒤전후좌우를 살피고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선택, 판단하고서 내딛음을 결행하는 동사적 행위이다. 사람이 걸으면(동사) 생각의 먼지나 부스러기(형용사)가 떨어져나가 정리가 되어 정확한 판단에 큰 도움을 준다. 앉아있으면 형용사가 계속 부풀어나서 동사가 맥을 못 추고 얽혀들고 만다. 이성적 판단이건 감성(감정)적 판단이건 판단한다는 자체는 동사적 행위지 형용사적 행위가 아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결정하기가 난감할 때는 일어나서 걸어주면 생각(정보)가 정리가 되어 올바른 판단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된다. 생각[]의 곁가지(잡념)을 적당히 제거하여 정리를 용이하게 해준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의 언어 중 동사만이 진리다. 모든 형용사는 편견이자 선입견이다. 대부분의 철학적 추상(관념)어는 형용사적이다. 그러니 독자들께서도 가능하면 현대의 과학적인 사고와 용어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바란다. 나든 너든 몸을 벗어난 존재는 없으니 말이다. 모두는 존재다! 존재만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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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9/09 [10:22]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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