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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무엇인가?
[신성대의 혼백론 9]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0/10/0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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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주필     © 한국무예신문

과학이 발달한 지금 신체에 대해선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웬만한 건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정신이나 생각 역시 종교나 철학에 의지하던 미개한 시기를 지나 지금은 그저 뇌의 활동이라는 과학적 설명 하나면 족하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이 마음(, mind)’이란 단어는 설명이 여의치 않다. 간단한 듯하면서도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고, 때문에 딱히 뭐라고 정의내리기도 쉽지가 않다. 정신의 다른 표현? 영혼? 혼백? ? ? 감정? 느낌? 기분?등등 끝이 없는데다가 무의식, 잠재의식, 욕구, 욕망까지 마음에 담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거시기한 용어도 없겠다. 인간의 그 어떤 행위가 이 마음이 개입되지 않은 것이 있던가? 무엇보다 이 마음은 그 주소지조차 모호하다. 마음은 혼()일가? ()일까? 정신일까? 생각일까? 머리에 있나? 가슴에 있나? 글자 모양대로 심장에 있나? 그 때문에 유독 이 마음만은 어떤 형체가 있을 듯, 혹은 신체 어느 부분에 숨어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은 순수한 우리말인 것 같다. 한자 ()’마음이라 훈독한다.

이미 고대 갑골문에서부터 이라 했으니 인간의 심장을 그림으로 나타낸 상형문자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도 지금처럼 마음의 의미로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후세인들은 이 그림문자를 다양한 개념을 지닌 묘한 용어로 발전시켜 왔다. 옥편에서도 이 마음 심[, ]자 부수가 달린 한자수가 가장 많은 걸 보면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생각마음이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다른지 딱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하여 칸트, 니체, 후설, 하이데거 등등 그 수많은 근현대 철학자들조차도 그 경계를 찾아나섰다가 결국 진흙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은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동양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불교, 도교 등등 수많은 철학자나 수행자들이 궁극에 가서 찾고자 했던 것도 어쩌면 이 마음이 아니었을까? 불교에서는 지금도 툭하면 이 마음을 얘기하지 않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성인들은 수행 끝에 이 마음을 찾았던 것이고, 또 그것을 통해 진리에 이르지 않았을까?

 

실제로 동양의 훌륭한 성인들은 이 마음을 찾았다고도 하고, ‘마음이 없다고도 했다. ‘마음을 찾았다고 하면 이는 곧 마음이 있다는 말인데, 그런데 왜 다시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 마음이란 말인가? 세상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궤변이 어디 있는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진리라 해도 되는가?

 

그럼에도 왜 인간은 그 말도 안 되는말을 믿고 따르는가? 종교니까? 그건 신앙이지 진리탐구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려나 과학과 종교를 혼동하는 철학자들의 횡설수설에 놀아날만큼 현대인들이 어리석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일까? 일단 일상에서 쓰이는 어휘에서부터 마음을 한 번 살펴보자!

 

마음대로’ ‘마음먹다’ ‘마음껏이라 할 때, 이 단어는 마음의지를 뜻한다. 때로는 좋다’ ‘싫다의 선택 결정권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감(五感)을 통해 들어온 외적 정보를 정신이 수집하면, ‘생각은 인식이나 학습을 통해 저장해두었던 정보들을 끄집어내어 새 정보와 비교분석한 다음 판단을 내리고, ‘마음은 그 결과에 대해 백()의 눈치(욕구)를 살펴 최종적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이 순차적이지 않고 동시에 진행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이 먼저 결정을 해버려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때를 우리는 조급했다 하는데, 이는 마음이 지나치게 백()의 의중을 따른 때문이라 하겠다.

 

이 과정을 인간 스스로는 들여다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해서 혼백을 분리(격리)시켜보면 마음이 있는 곳을 직접 느낄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선 수행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혼백을 가르면 마음이 보인다!

 

옛 사람들은 마음은 가슴에 있다고 여겼다. 뭔가에 심히 놀라 갈비뼈 아래가 털썩하면 간()에 있는 것 같고, 흥분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긴장으로 오그라들 때에는 마음이 심장에 숨어있는 듯하고, 뭔가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 숨이 턱 막힐 때면 마음이 폐()에 있는 것 같다. 또 명치가 꽉 막히거나 짜증나거나 역겨운 일을 당해 매스꺼움과 위경련까지 일으킬 적엔 마음이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겠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뇌 속에 이중삼중 반복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저장되는데, 이후 같은 일을 겪게 되면 혼(이성적 판단)의 판단하고 결정하기 전에 자율신경이 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 바람에 마음이 혼()의 영역인지 백()의 영역인지 헷갈리게 된다. 하여 마음()’과 관련된 인간의 인식이나 지식에 편견과 선입견이 유독 많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음생각중에서도 ()’의 부분이다. 해서 성향적’ ‘감정적’ ‘감각적’ ‘정서적이기도 해서 마음의 결정이 상황에 따라 전혀 생각(예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흔히 그런 걸 운명적이라고도 한다. 이에 생각(의심)’할 줄 아는 인간이 가만있을 리 없겠다. 해서 점()을 치거나 주역(周易)이니 명리학(命理學)이니 하는 갖가지 방술(方術)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정신이 있다 없다는 곧 정신이 들었다’ ‘나갔다를 의미한다. 생각이 있다 없다는 곧 생각을 했다’ ‘안했다의 의미이다. 그리고 마음이 있다 없다는 곧 내킨다’ ‘안내킨다를 뜻한다. ‘정신이 두뇌의 총체적 활동이라면 생각은 궁리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행위이고, ‘마음은 선택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는 감정(감성)적 행위이다. 하여 정신은 거나 깨어있어야 하고, 생각은 거나 복잡할 수 있고, 마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아플수 있다. ()이 반발을 하면 마음이 내켜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사람에 따라서 희노애락에 반응을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경우 우리는 냉정하다느니 과격하다느니 하는데, 이는 해당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모자라거나 넘치기 때문이다. 조현병 환자나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넋과 얼

 

글을 쓸 때면 우리말의 빈약함을 절실하게 느낄 때가 참 많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옛스런 말들도 한자어나 영어에 밀려나 도태되고 있어 안타깝다. 비록 현대적인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를 못하지만, 그 옛말들을 도로 끄집어내어 이제부터라도 그 의미를 더해나가는 작업을 해나가는 게 마땅한 일이 아닌가 싶다.

 

흔히 우리는 정신 나갔다’ ‘정신 차려라’ ‘얼 빠졌다’ ‘넋 나갔다’ ‘혼이 나갔다’ ‘혼났다’ ‘혼쭐냈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몹시 놀라거나 야단을 맞거나 무엇에 홀려 어리벙벙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사전에서 혼()과 백()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을 이라고 한다. 그리고 과 똑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로 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 옛날엔 을 구분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혼백과 마찬가지로 혼용해서 쓰이다가 만 남아 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어쨌든 이쯤에서 혼백(魂魄)’을 분리키로 하였으니 도 그에 따라 분리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넋이 빠졌을 때와 얼이 빠졌을 때의 상태가 조금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둘 다 정상이 아닌 상태이지만 넋이 빠지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거나 주저앉아 움직이질 못한다. 심한 경우 의식이 얼른 일어나서 도망가자!’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반면에 얼이 빠지면 움직이고 무슨 일을 하기는 하는데 이게 도무지 정상이 아니다. 전자는 충격이 너무 커서 백()까지 놀란 경우이고 후자는 혼()만 놀란 때문이리라. 필자의 경험으로는 혼()만 놀란 경우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데 비해 백()까지 놀란 경우에는 여간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건강을 해치게 되므로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기실 필자도 바로 이 부분에서 의심을 갖고 계속 파고들다가 혼백(魂魄)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처음 고대 원시인들은 동물이나 사람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면(빠져나가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보고, 피가 곧 영()인 걸로 자연스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인지가 조금 더 발달되어, 피를 많이 흘려 죽는 경우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죽는 경우에 대한 구분과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 간혹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니 아마도 이런 연유로 혼백의 분리개념이 생기지 않았나 짐작된다. 해서 혼()은 육신을 들락거리는 무형의 넋으로, ()은 피처럼 육신을 떠나지 않는(떠나서는 안 되는) 유형적인 것으로 분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육신과 함께 땅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해서 혼()을 혼령(魂靈)이라 하고 백()을 정령(精靈)이라 하지 않았을까? ()를 관장하는 건 백()이므로!

 

하여 이참에 필자는 을 혼()에다 붙이고 ()’에다 붙여 두 어휘를 대대법(對待法)적으로 세워놓고자 한다. 한자어에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어구도 있고, 정몽주의 시()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라는 표현이 있듯이 아마도 본디가 그랬을 것이라 짐작된다. 더불어 자기(自己)는 혼(), 자신(自身)은 백()에 묶어놓고자 한다.

  

인간은 그동안 왜 백()을 놓쳤을까?

 

필자가 혼백을 찾아나선 이래 드는 의문이 바로 이 점이었다. 그 많은 철학자(과학자)들은 고작 혼백을 음양으로 나눈 정도로 젖혀두고 누천년 동안 왜 그토록 혼()에만 매달렸던 걸까? 수행자들은 왜 그토록 마음찾기에만 골똘했던가?

 

필자가 짐작컨대 그것은 아마도 종교의 발달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혼을 신성불가침한 영역으로 밀어 올리는 바람에 감히 과학해볼 엄두도 못낸 것이리라. 과학하기는커녕 오히려 철학이나 예술로 더욱 모호하게 포장하는데 경쟁적으로 나섰다. 그 영혼의 관장기관인 뇌()를 과학하기 시작한지는 불과 한 세기도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우리의 영혼은 신()이 관장했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영혼이란 신()이 주신 권능, 영성(靈性)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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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10/06 [10:02]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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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신 2020/10/07 [04:54] 수정 | 삭제
  • 바람부는 길목에서 그댈 기다립니다 나를 떠나버린 그 날의 기억처럼 작은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가슴은 오늘도 한숨만 쉬네요 어제 가신 님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지 불러봐도 메아리만 돌아오네요 라라라라라라라 홀로 슬피우는 새야 너도 사랑했던 님 찾아 우는구나 가슴이 쉬도록 그대 이름 부르고나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거야 매일 밤하늘의 달빛만 바라만 보는구나
  • 노예정신 2020/10/07 [04:43] 수정 | 삭제
  •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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