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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갑질할 수밖에 없는 한국인들
이중 언어체계가 만들어낸 익숙함의 함정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1/01/18 [14:07]
▲ 신성대 주필.     ©한국무예신문

현직 육군참모총장이 주임원사들과의 화상회의에서 장교들이 부사관에게 반말로 명령해도 된다고 하자 일부 부사관들이 참모총장을 대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해서 육군이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 익숙한 일이건만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의 문제를 넘어 한국(일본 포함)만의 특수한 언어체계 때문에 생긴 갈등인지라 달리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은 모두가 갑이자 을이다

 

전철 같은 곳에서 간혹 자리다툼을 하는 노인들이 있다. 경로석에서도 나이를 따지고 다툰다. 처음엔 나이를 따지지만 감정이 나면 왜 반말 하느냐며 또 싸운다. 그 외에도 왜 먼저 인사를 안 하느냐? 감히 한 손으로 받다니? 등등 한국에서는 흔한 광경이지만 외국인들에겐 이해 불가한 괴이한 풍경이다.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관습 때문에 벌어지는 어이없는 다툼들이다.

 

당연히 학교에선 한 학년만 높아도 평생 선배가 된다. 또 군대에 가면 나이 상관없이 계급으로 아래 위가 정해진다. 같은 계급이라도 누가 먼저 입소했느냐에 따라 상하를 나눈다. 심지어 제대를 하고나서 사회에 나와도 그 서열을 지켜야 한다. 당연히 직장에서도 선배 후배를 따지게 되니 한국 사람은 평생 이 서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계급이나 서열이 신분 아닌 신분으로 굳어진다. 심지어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형과 동생으로 서열화되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누가 먼저 나올지는 우연일 뿐인데도 말이다. 서양에선 쌍둥이는 물론 형제도 모두 브라더(brother), 시스터(sister)로 호칭하며 형, 언니, 동생으로 구분하지 않고 각자를 모두 동격의 인격체로 대우한다.

 

신분이나 계급, 나이에 따라 서열이 낮은 사람은 무조건 높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하고 자신은 반말을 들어야 한다. 이런 관습 때문에 한국인들은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나이를 확인해서 형님, 언니, 누님, 동생으로 호칭한다. 나이 차이가 나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나이로 서열을 따지지 않는 서양인들은 그런 걸 묻지도 않는다. 나이, 신분, 직위를 따지지 않고 서로 신뢰하면 친구로 사귄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뻘 되는 나이 차이에도 친구로 지내기도 한다.

 

동양에는 망년지교(忘年之交)란 말이 있다. 나이 차이를 넘어 친구처럼 교유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그런 일이 그만큼 드물다는 뜻도 되겠다. 또 결혼을 하면 연상이냐 연하냐를 따지는 관습이 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그런 말이 왜 생겨나고 부부의 나이를 왜 따지는지 도무지 이해 못한다. 아무튼 이런 별난 서열문화 때문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평생 동안 수없이 피곤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의 폭을 스스로 협소화시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수많은 행운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간다.

 

한국인의 이런 서열문화의 버릇은 미국 등 해외로 이민을 가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어느 나라든지 교민사회란 것이 있다. 한국에서 살 때의 출신대로 동창회 향우회도 있다. 헌데 간혹 교민들 중 그 사회에 주류에 들만큼 나름 성공한 이들 중에는 교민사회와 발걸음을 끊고 사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두 번 교민사회에 참여했다가 기분이 나빠서 다시는 안 나간단다. 처음 교민사회에 나갔을 적엔 그 곳의 회장이나 간부가 되는 연장자들이 존댓말로 대화를 터는데, 이후 두세 번 더 나가서 안면을 익히고 나면 여지없이 반말로 나온단다. 한국식 된장독 근성이 나오는 것이다. 해서 두 번 다시 발걸음을 안 한단다. 이후론 한국인을 만나더라도 절대 한국어를 쓰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한국어를 못 배우게 한다고 했다.

 

한두 해, 한두 달 늦게 태어나거나 입대했다고 해서 왜 존댓말을 하고 반말을 들으며 굽신대고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존경스럽기는커녕 경멸스런 사람에게 연장자나 선배라는 이유로 무작정 존댓말 부치고 반말 들어야 한단 말인가? 왜 그 딴 일로 살아서도 죽어서도 차별 혹은 구별되어야 한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불공평하고 역겨운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모든 한국어 번역은 오역!

 

존댓말과 반발의 언어체계를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뿐이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선 존댓말이 따로 없으니 한글 번역은 모두 엉터리라는 말이다. 소설이나 성경, 불경, 논어를 모두 존댓말을 없애고 반말로 번역해서 읽어야 옳지 않은가? 그래야 그들의 사유방식을 제대로 이해할 것이 아닌가? 한국적 갑을식(甲乙式) 사유체계로 과연 그것들을 백 프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주의, 자유, 인격은 동격, 주인의식, 주동의식, 주관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는가? 존댓말 없이 대화하는 민족과 존댓말-반말 구별해서 대화하는 민족의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체계와 인격체로서의 자존감이 같을 수 있을까?

 

이제까지 한국어판으로 번역되어 나온 외국의 문학이나 영화 등등은 모두가 오역이다. 불경이나 성경은 물론 중국의 고전도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들을 원문 그대로 직역해서 읽은 적이 없다. 당장 인기 소설이나 영화를 존댓말 없이 번역해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분명 어마어마한 충격에 비위가 요동을 칠 것이다. 경전을 그렇게 번역했다간 몰매 맞아 죽어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갑을적(甲乙的) 언어 한국어

 

왜 유독 일본과 한국에서만 왜 존댓말과 반말이 따로 존재하는가? 혹자는 일제 식민시대에 일본의 천시와 억압 때문에 존댓말과 반말이 지금처럼 심하게 구별되었다고도 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만 우리의 존댓말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나 옛 편지글에도 존댓말과 반말이 뚜렷이 나타난다. <훈민정음><용비어천가>를 비교해 봐도 그렇다. 그 이전에는 한글이 없었으니 우리말 구어체를 확인 할 길이 없으나, 고려 가요나 신라 향가에도 존귀어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문 서술체이긴 하지만 고귀한 사람에겐 시어[]’를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조선 유교의 영향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면 유교의 나라 중국에선 왜 존댓말이 없는가?

 

일본과 한민족의 대부분(70%)은 기실 유전적으로 동일한 남방계로 알려져 있다. 그 나머지가 북방계 혹은 중국계이다. 특히 이들 북방계와 중국계가 초기 국가 형태를 갖출 시기에 지배계층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북방계와 남방계가 공존하게 되면서 지배층 북방계의 언어가 상위층에, 그리고 남방계의 일반 피지배계층이 하위층에 해당하면서 반말과 존댓말이 구별되어 사용하게 되지 않았을까? 일본의 경우 남방계 본토인들과 한반도 도래인의 언어습관이 교차한 것이리라. 이는 일본의 고어를 조사해보면 밝혀질 것이다.

 

 

수평사회의 최대 장애물, 언어체계

 

존댓말이 과연 우리 민족 고유의 미덕이라 자랑하고 중히 여길 만한가? 그런 봉건적이고 이중적인 언어체계가 글로벌 시대에 보다 경쟁력을 지니는가? 그저 우리만의 소중한 습관이니 귀하게 여기고 지켜나가야만 할까? 이런 인간 차별적 언어체계를 가지고 동등한 인격, 자기존엄, 인간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인품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지 나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건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이다. 나이나 계급으로 서열을 정할 순 없다. 인격이나 인품은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특히 외국인을 친구로 사귈 때에는 나이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 인격은 동격이다. 상대가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다고 해서 괜히 주눅들 필요가 없다. 계급주의적 사고로는 상호존중의 수평적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다. 이 봉건시대의 유습을 하루빨리 버려야 인격존중의 선진사회가 될 수 있다.

 

익숙함의 함정! 자기보다 어리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야만이자 폭력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남녀유별(男女有別)과 마찬가지로 이 시대 우리 민족이 세계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반드시 청산 척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난제 중의 하나이다. 이런 나라가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는 민주주의를 한다는 건 기적이다.

 

 

존댓말은 대화체로! 반말은 서술체로!

 

누천년 동안 뼈에 배인 습관을 이제 와서 어떡한단 말인가? 기실 이런 문화적 습성을 일시에 바꾸려면 나라가 망하는 수밖에 없다. 가령 지난 날 우리가 일본이 아닌 러시아에 병합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중앙아시아나 연해주에 남아있는 고려인들처럼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헌데 우리보다 존댓말과 반말이 더 심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또 다른 대안으론 존대어가 없는 언어를 공용어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가령 영어를 제2국어로 받아들이면 절로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서서히 외국 소설이나 영화 등을 존댓말 없이(아니면 반발 없이) 번역해서 보다 보면 저절로 언어습관이 고쳐질 것이다. 아무려나 유럽의 강소국들처럼 여러 개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음은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시대엔 엄청난 경쟁력이다. 외교든 비즈니스든 글로벌 무대에서 4,5개국 언어 구사는 기본이다.

 

선각자인 윤치호 선생은 평생 동안 영어로 일기를 썼었다. 그가 왜 굳이 쉬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영어를 고집했을까?(혹자는 일본의 감시가 무서워 그랬을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너무 치기어린 유추다. 영어처럼 객관성을 지닌 언어도 드물다. 한 지성인이 조국이 망해가는 과정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자신은 물론 그 시대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시대상황을 일생동안 기록해 남겼다는 건 인류사에 다시없는 귀중한 자산이다. 그의 일기는 <난중일기> <백범일지> <안네의 일기>보다 더 귀중한 보물이다. 친일 행적 어쩌구저쩌구 좀스럽게 따지지 말고 더 늦기 전에 국보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 당장은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모두가 똑같이 반말을 하자고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반말 때문에 뻑하면 살인까지 저지르는 민족이다. 그러니 모두가 존댓말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높다. 반말은 서술체로만 사용하고 존댓말은 대화체로 정해서 사용하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를 떠나 모두가 상대를 존중해서 존댓말을 사용하는 습관을 들였으면 어떨까? 대화에서 반말이 없어지게 되면 그다지 오래지 않아 그 존댓말조차도 존대어로 여겨지질 않게 될 것이다. 아무려나 언어의 본질은 소통이지 위계의 확인이 아니다.

 

(신성대의 태도적 가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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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18 [14:07]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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