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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명상하는가?
[신성대의 혼백론 18] 참선(參禪), 명상(冥想), 묵상(黙想), 정좌(靜坐)
 
신성대 주필(글로벌리더십아카데미 공동대표) 기사입력  2021/01/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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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주필.     ©한국무예신문

가전제품들에는 ‘pause’라는 조정버튼이 있다. ‘휴지(休止)’ 혹은 일시정지를 의미한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 때로는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겠다. 물론 단순하게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목표 재설정(resetting, refreshing)을 위한 휴지여야 한다. 취미든, 관심사항이든, 공부든, 봉사든, 인간관계든, 심지어 본업이나 종교까지도 잠시 내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져 객관화시켜 바라보면 그것들이 문득 생소해져 달리 보이기도 한다.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는지 아니면 엉뚱한 길로 가는지,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는 저 일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가 지금 인생의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등 주변과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심기일전, 다시 전진한다. 힐링(heeling)이란 그런 것이겠다.


안락(安樂)에 병들고 환락(歡樂)에 미치다!

 

현대인들은 편안함과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육체는 끊임없이 퇴화되어 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영양은 풍부하고 의료기술은 발달하여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자손은 줄어들고 있다. 이는 동물로서의 인간이 절대적으로 운동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더하여 생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편안해진 육신만큼 정신은 오히려 더 힘들어지고 있다.

 

흔히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할 적엔 육체적 혹사보다는 정서적 혹사에 더 비중을 둔다. 육체적인 피로는 쉬거나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주면 회복되지만, 정서적 스트레스는 여간해서 풀기 쉽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원인이 해소되었어도 계속 시달림을 받기도 한다. 해서 그 긴장을 풀어주는 온갖 스포츠나 유희가 생겨났다. 약은 인간들이 그 약점을 핑계 삼아 마약과 전자게임, 가상현실까지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있다.

 

전자게임이라는 것이 순전히 과거 육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던 것을 오직 뇌의 즐거움(고통?)을 통해서 대리 경험을 하면서 만족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 문명인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종말을 향해 치닫게 된다. 기실 게임이라 하지만 손가락으로 모든 게임을 대신하는 변태적 자위행위이자 자기학대다. 자연계에서 보면 이런 인간은 변태를 넘어 글자그대로 미친 동물인 게다.

 

실제 전투가 아닌 게임 상황에선 육체적 쾌감(고통)이 없이 오직 상상적인 희열과 가학을 주고받는다. 가상현실? 그러니까 가짜 고통, 가짜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의 동의가 없는, 그러니까 혼()이 백()을 속이고 학대하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게 몸에 좋은 것처럼! 스트레스 푸는 중이라고!

 

여기에는 인간 최고의 편견과 선입견이 들어있다. 무슨 말인가? 알고 보면 그 게임이란 것도 실은 노동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릴없는 사람이 운동 겸 기분전환하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을 등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하인더러 산꼭대기 암자에 쌀이나 편지를 전해주고 오라면 그건 뭣이 되는가? 오락일까? 노동일까? 전자게임에 효과음향을 제거하고 혼자 한 시간을 해보라고 하면 과연 몇이나 즐거워할까? 텔레비전의 스포츠 중계나 오락 프로를 음향을 몽땅 꺼놓고 보라! 그게 그토록 재미있는 놀이일까?

 

처음 텔레비전을 보는 미개원시인이나 야생 짐승들은 아무 즐거움을 못 느낄 분더러 오히려 불안해한다. 그리고 조금 익숙해지면 저 인간들이 지금 왜 저런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인간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그런 걸 재미있고 즐거운 거라고 끊임없이 세뇌 받은 탓에 거기에 빠져드는 거다. 그렇게 보면 문화란 것도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모두 자기기만이고 사기다.

 

지구상 모든 생물을 그 종족의 보전을 위해 본능적으로 노력(실은 반응)한다. 생물의 현대적인 정의는 자기 복제능력을 가진 개체라 하지 않던가? 인간이란 동물은 지능이 발달하면서 문명이란 것을 만들어내었다. 이 문명적인 사고에는 종의 보전이 그저 육신의 복제를 넘어 인간 자신의 정신[]까지 전하고픈 것이다. 해서 지식이란 편견과 선입견을 교육이라는 행위를 통해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손이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에 더없이 소중한 경쟁력일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과도한 영양이 건강을 해치듯, 너무 많은 지식과 지혜와 부채가 정작 자손의 번식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이다.

 

결국은 뇌를 혹사시키는 현대인들은 기실 모두 환각(환상) 속에 살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너나없이 정신질환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해서 계속해서 정신질환은 늘어나고 저능아, 기형아, 정신지체아들의 출생도 끝없이 늘어갈 것이다. 그리고 도덕심과 복지는 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할 의무를 더욱 강요하여 국가의 건강성은 물론 인류의 전체적인 부실로 이어질 것이다.

 

▲ 사진출처: 인터넷 캡쳐     © 한국무예신문

 

참선(參禪), 명상(冥想), 묵상(黙想), 정좌(靜坐)

 

한때 요가가 광풍처럼 유행하더니 요즘은 명상이다. 절에서는 팀플스테이로 참선체험자를 모집하고 있고 직장에서도 선호하고 있어, 조만간 웬만한 기업 사원 연수교육이나 교양강좌에 명상이 필수과목으로 자리할 것 같다. 아무튼 스트레스와 긴장 이완에서 효과가 나타나고 있고, 한 번 경험한 사람들은 선호하기 때문에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참선, 요가, 명상, 기도 등등 피곤한 정신과 육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집중력과 함께 업무에 효율성을 높여주니 기업주로서도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한데 세상에 다 좋은 것은 없다.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점도 있게 마련이다.

 

굳이 종교는 마약이다란 구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정신 수양엔 중독성이 따른다. 기호 식품이나 약물에 의한 것만 중독이 아니다. 중독이란 결국은 혼백(魂魄)이 중독되었기 때문에 자꾸 찾게 되는 것이다. 약물에 의한 중독은 육신[]까지 망가뜨리지만, 명상과 같은 체험의 중독은 그것만으로는 당장 해가 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한번 편안함을 맛보면 잊기 힘들다. 명상을 통해 효과를 본 사람은 다시 그 상황을 찾게 된다. 겨울을 모르는 적도지방 사람들은 아무리 덮고 짜증이 나더라도 이놈의 더위 빨리 가고 겨울이 왔으면 하는 말을 안 한다. , 여름, 가을, 겨울을 맛본 중위도권 사람들은 여름이나 겨울이 제발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누군가가 처음 운동을 하거나 댄스를 해봤는데, 남들보다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는 계속 그 놀이를 즐기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명상의 맛을 아는 사람은 자연히 빨리 일을 끝내고 명상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연유로 수행, 명상, 참선이 하루하루 일하거나 한참 땀 흘려 배워야 할 형편에 놓인 사람들에게 자칫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고요하고 평안한 자기 세계에 푹 빠지면 세상의 혼란스런 일들이 왠지 다 귀찮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여 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의 과정에서 자칫 현실감각을 잃고 허망한 상상계를 찾아 떠돌기도 한다. 차츰 일상 업무에서 오는 피로감이 빨리 찾아오고, 복잡한 토론이나 실랑이를 싫어하게 된다.

 

더구나 세속에서 가르치는 명상이니 참선이니 하는 것들이 대부분 제대로 된 수행법이라 하기엔 너무 빈약하다. 하여 수행 중에 겪게 되는 아주 사소한 경험을 마치 대단한 무엇을 건진 양 하고 빠져들기 십상이다. 대개는 무기(無記), 혼침(昏沈)에서 경험한 특이한 체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본격적인 정좌(靜坐) 수련법과 그 원리는 다음에 설명키로 하고 여기서는 명상과 걷기에 대한 얘기만 한다.)

  

동중정(動中靜) 정중동(靜中動)

 

기실 동물의 뇌는 움직임을 관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니 움직일 필요가 없는 식물은 뇌가 없다. 당연히 동물 중에도 이동할 필요가 없는, 근육이 없는 동물은 뇌가 없거나 있어도 굳이 클 필요가 없다. 바다의 산호나 따개비 등은 뇌가 없다. 멍게는 처음엔 뇌가 있지만 바위에 붙고나면 뇌가 없어진다. 지렁이나 해파리처럼 움직임이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하등동물은 뇌가 없다. 따라서 뇌가 있는 동물은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뇌가 활성화 되어 본연의 임무에 돌입하게 된다.

 

한데 인간의 뇌는 이 본연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기능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뇌(신피질, 신뇌)를 키워왔다. 해서 움직임을 멈추면 할 일이 없어진 이 겉뇌가 저 혼자 엉뚱하게 돌아간다. 소위 잡생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잡생각을 멈추고 에너지를 절약할 수 없을까? 남아도는 지능으로 이런 궁리를 하게 된 인간이 나름 갖가지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명상도 그런 것 중에 하나이다.

 

잡생각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노동이든 정신적인 노동이든 무언가에 몰두하면 된다. 목탁을 두드리거나 염불(노래)을 하는 것도 집중의 방편이다. 그 다음엔 그냥 잠자는 방법이 있다. 헌데 현대인들은 이 잠자는 것도 여의치 않다. 육체적으로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잠들려고 하니 누워서도 신뇌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덩달아 다른 뇌까지 온전히 쉴 수가 없어 피곤해진다. 헌데 위 두 가지 방법 외에, 그러니까 육체적인 동작도 없는 상태에서 깨어있으면서 고요하게 지낼 수 없을까? 그 상태에서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할 방법이 없을까?

 

사람은 일어나 걷기 시작하면 생각할 겨를이 줄어든다. 서거나 걷게 되면 혼()이 본연의 의무에 돌입하게 된다. 잡생각을 버리고 오감의 기능을 모두 행동에 필요한 정보 수집에 동원해야 하고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운동근육을 적절히 사용해서 판단하고 피해야 한다. 전시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다. 따라서 움직임에 필요한 판단 외에 다른 엉뚱한 생각은 가능한 중단해야 한다. () 또한 밖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안으로 자기들끼리 신호를 주고 받아 비상사태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 일부 기관은 운동에너지 사용에 대비한 보급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단순하게 안전한 곳에서 천천히 거닐기만 할 때는 그나마 다른 사색이 가능하지만, 뛸 경우에는 일체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진다. 몸의 움직임과 위부 환경에 보다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손까지 사용하게 되면 더욱 뇌는 바빠진다. 더 나아가 온몸을 사용해서 춤을 춘다든가 무예를 할 경우에는 오직 적과 자신의 신체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된다.

 

반대로 가만히 서 있거나 앉거나 누우면 신체의 어떤 움직임도 없이 몸이 편해지면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그동안 모인 잡다한 정보를 정리할 수도 있고, 이미 지난 사건에 대한 회상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상상(망상)이다.

  

왜 명상을 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명상(사색, 참선)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인간이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겪는 번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뭔가 조용한 마음으로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천착해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마인드콘트롤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목적은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구는 단순하게 번잡함에서 벗어나 고요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있을 것이고, 누구는 어떤 종교적인 믿음에 마음의 모두를 바치고자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진리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어 정신적 건강을 찾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드물게는 집중력을 키워 공부나 업무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근자에 이런 수련법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으로는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화다.

 

실제 많은 수행자들이 명상 중에 희열에 가까운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이런 현상을 현대의 첨단과학으로 측정하기도 한다.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명상에 몰입하면 두뇌의 전두엽 특정 부위가 활성화 되는 것이 포착되는데 바로 그곳이 우리 인간의 행복감을 관장하는 곳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렴, 뇌 기능 중 어느 한 가지만 집중해서 사용하는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겠다.

 

, 그게 사실이라면 과연 명상을 통해 행복감을 얻는 것이 올바르고 정당한 일인가? 흔한 말로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지극히 정당하고 권장할만한 일이 아닌가? 예서 달리 의문점이 제기된다. 실제 현실에서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이 명상을 통해 행복감을 얻는다면 이는 자기기만 혹은 자기최면이 아닌가? 나아가 현실도피가 아닌가? 또 오직 명상만이 그러한 기능이 있는가? 술이나 마약 등 약물에 의해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제 고대에는 많은 수행자들이 지금에는 마약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약물들을 수행에 이용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약물들은 중독성이 있고 나중에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금지되고 있지만, 어쨌든 약물에 의해서건 명상에 의해서건 기타 다른 방법에 의해서건 인위적으로 안정감(황홀감)을 느끼는 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진리에 이르는 지혜를 찾으려는 노력 혹은 방편으로서의 명상이라면 그 추구하는 목적이 현실(fact)의 왜곡이 아닌가? 사물을 편견없이 선입견없이 있는 그대로 본질을 꿰뚫어보자는 것인데, 과연 그런 인위적인(어쩌면 가식적인)에서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모든 사물을 편견으로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닌가? 석가가 모든 상()을 버려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요함 속에 현실을 떠나 자기만의 평온함 속에 침잠해버리는 것이 과연 수행의 목적일까? 그렇다면 그건 결코 진리에 이르는 길이 아니지 않은가? 진리를 찾아가는 중 쉼터에 안주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몸을 학대하는 것만이 고행이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이 고행일진대 행복감에 도취되어 그곳에 영원히 머물기를 택했다면 이는 진리를 찾아가는 고행을 중도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해보고 반추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살면서 닥치는 어지간한 고통이나 불행은 당연하게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불행조차 맞닥뜨리길 두려워하지 말아야 진리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가상의 행복, 환상의 체험, 곤란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 수행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건 진실도 진리도 아니다. 명상의 목적은 행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석가세존이 행복을 찾아 수행길에 나선 것이 아니다. 생로병사를 면해볼 요량을 찾아 떠돈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생로병사의 고통을 맞닥뜨리려 찾아 나선 것이리라.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초월한 것이리라. 행복의 방편을 찾은 것이 아니다. 고통을 참고 이겨 극복한 것도 아니다. 결국에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초월한 거다.

  

의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명상은 반드시 앉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다. 불교의 참선과 같이 종교적 목적이 아니라면, 또 내공 강화를 목적으로 정공(靜功)을 수련하는 무예인이 아니라면 굳이 정좌를 고집할 필요 없다. 산책하면서도 수행이 얼마든지 기능하다. 오히려 혼백의 균형이 잘 잡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진리 탐구에 더 유리하다. 그러니 학문을 하건 예술 창작을 하건 산책을 잘 이용하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을 수 있다. 신선한 발상은 의문에서 나온다. 의심이나 회의가 없다면 굳이 철학이 생겨났을 리 없겠다.

 

생각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지[氣魄]이 모자라 행동하지 못할 때 사람은 비루해진다.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조용하게 좌선, 명상해서 정신을 맑게 하는 것만 수행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명상을 하더라도 반드시 몸과 같이 단련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결국 경쟁이고 도전이다. 식물성이 아니고 동물성이다. 하여 명상을 하더라도 가능한 짧게 하되 반드시 스포츠나 도인체조 등 육체단련과 병행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생존은 동사다. 이런저런 잡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이제 슬슬 귀신을 찾아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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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23 [09:55]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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