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태권도인들은『태권도교본』(2005)을 통해 무용총 겨루기도(圖)는 ‘태권의 겨루기’라고 알고 있다. 그 知(지=앎)가 사실이 아니라면 “태권도의 역사”는 붕괴된다.
무용총 벽화는 ‘일본의 스모 장면’이라는 학설이다. 무용총 겨루기도가 일본 스모 장면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태권도인의 知가 붕괴된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각저총의 벽화 내용은 두 장사와 심판 보는 노인네로 보아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이 분명하다. 반면 무용총 천정의 두 장사는 수박희를 하는 씨름꾼이라고 얘기해 오고 있다. 하지만 머리 모양새나 복장 및 두 사람이 취한 동작과 몸짓으로 볼 때 무용총의 두 장사는 스모 선수이고, 벽화의 내용은 스모의 한 장면이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輯安市) 통구에 가면 광개토왕릉 북서쪽 약 1km 거리에 무용총과 각저총이 있다. 각저총과 무용총이 서로 나란히 있으면서 동남 방향의 광개토왕비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꾼을 표현한 벽화가 있는 무덤이어서 각저총(脚抵塚)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추는 모습에 착안하여 무용총(舞踊塚) 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성적 성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용총의 스모 벽화를 어찌 해서 ‘수박(手搏)’ 또는 수박희(手搏戱)라고 하게 되었을까? 수박이라면 소위 일본의 가라데(空手)와 비슷한 것 또는 택견과 비슷한 스포츠일 것으로 짐작한다. 서동인이 말하는 바를 더 들어보자.
맨손으로 하는 무예니까 空手라고 쓰고 ‘가라데’라고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원류는 한반도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라테를 唐手(당수)라고도 쓴다. 이 경우 唐(당)은 중국의 당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가라를 의미한다. 즉, 가라데 역시 가야(伽倻)에 뿌리를 둔 스포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스모 용어는 고구려어, 머리묶음새 ‘마게’도 벽화와 같아, 무용총 벽화에서 왼쪽의 장사는 오늘의 일본 스모토리(스모돌이) 모습 그대로이다. 스모가 고구려에서 시작된 스포츠라는 사실은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증명된다.
고려시대 무인들의 기본적인 수련 종목이 바로 수박이었고, 이러한 무예는 고대 한반도에 일찍부터 있었으니 수박도(手搏圖)라고 하는 평양의 안악3호분의 두 장사를 수박도 장면으로 볼 수 있을까? 이것이 수박도라면 고구려 시대에는 팬티만 입고 수박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안악3호분의 두 장사도 스모선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악3호분의 대련 장면은 수박도라 하자. 그렇다면 무용총의 두 장사가 벌려 선 장면은 안악3호분의 그림과는 다르며, 각저총의 씨름도와는 다르지 않은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伽倻)』에서 따온 대목들이다. 서동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무용총 천정의 장사는 스모(相搏) 선수다.”(서동인, 주류성, 2011)
무용총과 각저총 벽화는 고구려에 씨름과 스모가 존재한 증거이다. 일본에서는 자기네 스모가 고구려에서 왔으며, 그 물증이 무용총 천정벽화 가운데 두 역사(力士)가 마주하고 있는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신라문화의 기원은 가야에 있지만 삼국 중심의 고대사에서 가야사는 기록에서 누락되고 왜곡되었다. 지은이(서동인)이가 가야사를 조망한 것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가야사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줄 것이며, 학계와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 믿고 있다.
태권도의 역사 왜곡은 어찌 무용총 벽화만이겠는가. 우리는 미처 성찰하지 못한, 진실처럼 포장된 교본의 그것에 중독돼 있는 듯싶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무용총 벽화가 태권의 겨루기도가 아닌 스모 선수의 장면이라는 것에 국기원이 답해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