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序說)
1980년대 중반에 대학가에서 우리 것 찾기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겨레의 혼보(魂寶)가 담긴 전통무예의 총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실기 ‘십팔기(十八技)’가 1907년 조선군이 무장 해제된 이래 정확하게 80년 만에 다시 이 땅에서 되살아났다.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란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으며 이 겨레의 터전과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근 250년의 시기 동안 전승무예와 신식 무기(武技)를 집성하여 조선조 22대 정조의 무치(武治)에 따른 어명(御命)에 의하여《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었고 그 실기는 ‘십팔기(十八技)’였다.
▲ 경복궁에서 십팔기보존회에 의해 시연되고 있는 <첩종>의 한 장면. © 한국무예신문 | |
국가에서 정한 최초의 무예, 십팔기(十八技)는 조선의 멸망과 함께 전설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그 십팔기의 자리에 일제의 식민화 정책에 의한 겐또(劍道), 가라테(空手道), 쥬도(柔道) 등의 일본 무도(武道)가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중국의 화교들에 의하여 전래된 쿵푸(Kung-Fu)와 1991년 중공과 국교가 수립된 이후 국제경기와 중공의 중화문화의 전파 정책에 의하여 우슈(Wu-Shu) 등 중국 무술(武術)이 이 땅에 전래되었다.
무예, 무술, 무도의 수련은 국민건강이나 호신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 본연의 무예 정신과 실기를 왜곡하면서 국민들의 정서를 문화적으로 암암리에 잠식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에 1987년,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이 수양하는 문중의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평생 수양의 방편으로 보존해 온 십팔기를 공개하여 실연하고, 당시 문화재전문위원인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 선생이 해제하여 《무예도보통지실기해제》본이 도서출판 동문선을 통하여 출간되면서 ‘십팔기(十八技)’가 다시 이 나라에 공포된 것이다.
그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전통무예의 붐이 일어나게 되었고 기존의 일본 무도류와 중국의 무술류가 상업적으로 흥행되는 유행을 타고 해동검도 화랑검도 본국검도 수벽치기 등등의 이름으로 전통무예로 탈바꿈하여 옷을 갈아입기에 급급하였다.
더욱이 대한십팔기협회에서는 《무예도보통지》에 입각하여 전통의 무예문화를 바로 알려 주기 위하여 대학가에 결성된 전통무예 십팔기 동아리 학생들에게 무예 십팔기를 지도하였고 여러 가지 시연행사와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동아리 학생지도와 시연과 공연으로 공개된 십팔기(十八技)를 일본과 중국 아류의 무술인들이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가서 십팔기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십팔기의 유사단체를 만들어 전통무예라고 거짓 선전을 하면서 무예의 문외한인 공무원을 속이고, 국고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통무예의 본연의 정신과 실기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 조선 왕조 정부에서 규정한 무예의 공식 명칭조차도 왜곡하는 더욱 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인은 해범(海帆) 선생의 뜻을 따라 평소에 정리하여 둔 자료를 토대로 《무예도보통지주해》본을 쓴 바 있으며 조종의 무예를 왜곡하는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잘못된 현상을 바로 잡고자 《무예도보통지》의 원문(原文)을 순서대로 들어서 조선에서 정한 국가의 공식무예의 명칭은 ‘십팔기(十八技)’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한다.
▲ 자료이미지. 어정무예도보통지 서문. © 한국무예신문 | |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 기재된 ‘십팔기(十八技)’ 학자 군주로 널리 알려진 정조 임금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제59권 <잡저(雜著), 무예도보서술(武藝圖譜敍述) 1. 연기(緣起)>에 따르면, <어제무예도보통지서>의 문장은 정조 임금이 몸소 직접 지었고[親撰序文]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蔡濟恭)이 대신 필서(筆書)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서문에서는 조선의 무예 십팔기(十八技)가 형성된 역사적인 유래와 사적을 기재하고 있는데 먼저 임진왜란 때 육기(六技)를 담은 《무예제보(武藝諸譜)》와 정조의 생부인 소조(小朝)가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편찬한 것과 생부인 현륭원(顯隆園)의 유지(遺志)를 계승하여 십팔기(十八技)를 더욱 더 발양(發揚)하며 충직한 군사를 양성하여 국방력의 강화를 도모한다는 등의 찬술 의지와 목적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영조(英祖) 기사년(己巳年, 영조 25년, 1749)에 이르러 소조(小朝)께서 서무(庶務)를 섭정(攝政)하실 때 죽장창 등 십이기(十二技)를 더하여 도보(圖譜)를 만들어서 육기(六技)와 함께 통관(通貫)하여 강습(講習)한 일이 있었다. ○현륭원(顯隆園)의 뜻으로서 십팔기(十八技)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及至○先朝己巳○小朝攝理庶務以竹長槍等十二技增爲圖譜俾與六技通貫講習事在○顯隆園志而十八技之名始此
◇《무예도보통지》서문
이 문장에 나오는 ‘소조(小朝)’는 대조(大朝)인 영조(英祖)와 대비하는 말이며 15세가 되던 영조 25년(1749)부터 11년 동안 대리청정을 맡았던 장헌세자(莊獻世子)이며 바로 정조 임금의 생부(生父)였던 분이다.
왕세자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였으며 효성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15세에 청룡도를 휘두르는 장사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군사방면에 탁월한 소질이 보였고, 유가와 병가의 서적을 두루 읽어 타고난 무인군주(武人君主)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서무(庶務)를 섭정(攝政)하실 때 죽장창 등 십이기(十二技)를 더하여 도보(圖譜)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리청정 기간 중인 영조 35년(1759년)에 무관들에게 무예를 상습(常習)시킬 목적으로 《무예신보》를 지어 반포한 것을 말한다.
‘십이기(十二技)를 더하여 도보(圖譜)를 만들어서 육기(六技)와 함께 통관(通貫)하여 강습(講習)한 일이 있었다’는 것에서 ‘십팔기(十八技)’가 이미 소조(小朝)의 섭정 당시에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십이기(十二技)와 육기(六技)가 통관(通貫)되어 ‘십팔기(十八技)’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도보(圖譜)가 바로 《무예신보》이며, 육기(六技)는 왜란 당시에 《무예제보》에 정리되어 당시 군사훈련에 이용되던 기예를 말하고, 강습(講習)의 강(講)은 무관들의 군사교육인 무강(武講)이며, 습(習)은 군졸들의 군사훈련인 이습(肄習)이다.
《무예도보통지》의 원전에서 누차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지만,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임금의 생부가 이룩해 놓은 ‘십팔기(十八技)’의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더욱 더 발양하고, 앞서 나온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한 권으로 다시 묶어서 당시의 군사훈련의 표준을 제시하고, 무예의 근원적인 자료에 관하여 더욱 더 완벽성을 기하여 후세를 위하여 보존하는 목적으로 나온 서적이다.
전통무예의 상업적인 흥행을 타고 십팔기 단체의 기예를 모방하여 24기 또는 24반 무예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예신보》에서 십팔기가 형성되고 《무예도보통지》에서 24기 또는 24반 무예로 발전하였다고 선전하는 것은 선인들이 신고(辛苦)와 질곡(桎梏)으로 점철된 민족역사의 과정에서 규정(規定)된 민족무예 명칭을 왜곡하는 배덕(背德)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민족무예의 정신과 기예를 속여서 팔려는 무예계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매기(賣技)행위이며, 누천년 겨레의 무예문화의 명예를 훼손하는 역적(逆賊)의 행위이며, 정명론(正名論)의 관점으로는 하나의 무예에 여러 명칭을 사용하여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배률(背律)의 처신들인 것이다.
▲ 경복궁에서 십팔기보존회가 시연을 펼치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호위군 사열의식 <첩종>의 모습. © 한국무예신문 | |
‘현륭원(顯隆園)의 뜻으로서 십팔기(十八技)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한 문장은 우리 무예의 공식적인 명칭이 ‘십팔기’냐? ‘24기’냐?는 더 이상 논할 것도 없는 확고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읽을 줄 모르니 이런 저런 논란이 오고 가는 것이다.
현륭원은 역시 정조 임금의 생부였던 억울하게 돌아가신 장헌세자의 능호(陵號)인데 정조 임금이 굳이 능호를 사용한 것에서 애닮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보이고 있다.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한 명칭이 조선 무예의 공식적인 명칭의 유래를 밝힌 것이다. 현륭원의 뜻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십팔기(十八技)에서 24기로 발전되어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면 문장을 이렇게 짓지 않는다.
정조 22년(1798)에 이상정(李象鼎)이 편찬한 《병학지남연의》의 주(註)에 ‘병서 가운데의 문자는 일찍이 하나의 글자라도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兵中文字 未嘗經下一字也]’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은 경서(經書)를 짓거나 특히 병서(兵書)나 무학서(武學書)는 정확한 글자로 그 글자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는 사고로서 서적을 만드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전문서적이면서도 병서인데 서적 전체에 있어 마치 집을 지을 때 완벽한 설계를 하고 기반의 받침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설치하고 구들을 놓고 마루 공간을 만드는 등 각자의 역할이 있고 일련의 절차와 순서에 따라 짓듯이 한 문장 한 문장들이 독립되어 벽돌을 세우는 것처럼 이루어져 있다. 편하게 붓이 가는 데로 맡기는 수필문장이 아닌 것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