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칼럼(2012. 01. 09)은 신선하고 참신한 맛이 있다. 상당한 독자들이 그의 글을 읽으며 느끼고 공감하는 바가 있어 그 다음 글을 기대하고 있을 듯싶다. 글로 뜻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유려하고 가독력을 높이는 리듬이 있어 좋다. 때로는 심금을 울리는 올곧은 지적은 그의 문맥의 일미로 칭송받는 것은 아닐까?
문화에는 종주국이란 없다. 부제로 태권도, 한류, k-pop, 코리아브랜드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 그 진정성이 얼마만큼 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문화에 왠 종주국을 들이대는 가가 시대적 후진성을 질타하고 있다. 통쾌한 글이다. 태권도인의 돌처럼 굳은 발상에 깨우침을 안겨주려는 무예인의 애정이라고 여겨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현이 제다 옳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가라테는 한국으로 이식되어 태권도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현지화하여 올림픽 종목으로까지 성장했다.
논리의 비약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가라테가 태권도로 둔갑하여 단지 이름을 바꾸고 “현지화”하여 올림픽 종목으로까지 성장했다고 하는 단정적 발언은 이해할 수 없다. 좀 더 사려있는 표현의 선택이 요구된다.
…종주국? 태권도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이 표현은 혹여 누가 태권도더러 한국 것이 아니라거나 과거 일본의 가라테를 경기용으로 바꾼 것이라고 시비라도 걸까봐 붙이는 수식어이다.
종주국이란 수식어에 필자도 진절머리가 난다. 필자뿐만이 아니다. 태권도의 발원지를 달리 표현하는 사례로 안용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태권도 ‘모국’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태권도 종주국 표현에 대한 지적은 지당하다. 태권도인이 아직도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면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 언론에서, 그것도 올림픽이나 세계적 대회에 맞닥뜨릴 때 즐겨 쓰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듯하다. 그 표현에서 “과거 일본의 가라테를 경기용으로 바꾼 것이라고 시비라도 걸까봐 붙이는 수식어이다”는 글쓴이의 독단적 병폐에 해당된다. 무예, 십팔기의 고수로서 무예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지존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요즘 올림픽 핵심 종목에 선정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태권도가 이런 한류 바람에 함께 편승하고자 애쓰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바람에 편승했다간 언젠가 그 바람이 잘 때 함께 추락할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태권도가 한류 바람에 동승할 자격이 있냐는 거다, 라고.
신성대 글쓴이는 쓸데없는 것에 모래알까지 빗대어 비논리적 비약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올림픽 핵심 종목 선정과 한류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한류를 놓고 볼 때, 한류는 언제부터 불기 시작한 것인가? 한류의 원조는 태권도이다. “무엇보다 태권도가 한류 바람에 동승할 자격이 있냐는 거다”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태권도인에게 밝혀야 마땅하다.
…코리안심볼 태권도? 이미 옛날이야기이다. 나랏돈으로 거대한 태권도공원을 만들어 그곳을 세계인이 찾는 태권도성지로 삼겠다는 꿈도 좋지만, 그게 과연 글로벌시대에 어울리는 발상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태권도의 글로벌심볼화에 무슨 딴죽을 거는가? 누구를 위한 항변 내지 불만을 토로하는 지 종잡을 수가 없다. 태권도공원 건립이 왜, 그게 과연 글로벌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발상인지 알고나 있는 지 되묻는 바이다. 전 세계 태권도 인(人)들의 정신적 모태가 되고 있는 태권도의 위상, 가치는 옥처럼 다듬어야 더욱 빛나게 되는 법이다.
…태권도 종주국 위상? 권위, 권리, 텃세? 다 버리고 오직 배려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최상의 스포츠외교다.
…그게 글로벌 시대의 무혼(武魂)이자 무덕(武德)이다.
신성대 글쓴이 자신이 되레 ‘태권도 종주국’을 즐겨 사용하는 듯하다. 스포츠외교란 오직 배려로 이뤄지는 것인가? 되묻는 바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스포츠외교는 피눈물나는 치열한 각축전이라는 표현이 더 다가서는 표현일 듯하다. “오직 무슨 배려”가 스포츠외교전에 양반처럼 끼어 넣느냐는 거다.
그리고 글쓴이는 진정한(?) 무예인으로 모든 칼럼에서 ‘무혼, 무덕’을 내세우고 있다. 필자는 그의 애틋한 무예인의 심경을 읽을 수 있어 든든히 여기도 있던 참에 이번 칼럼에서 글쓴이의 마음 속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고 한다.
태권도인의 한 사람으로 필자는 태권도의 미래를 우려하나 그렇다고 부정적인 사유는 삼가고 있다. 건강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로미 신야 박사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뻐하도록 해야 함을 권장하고 있다. 행복감과 긍정적인 생각이 엔 자임(효소)을 활성화시킨다는 이론을 말하고 있다.
문화에는 종주국이란 없다. 그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적잖아 몇 가지 글쓴이 문장을 사례로 들어가며 필자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한국무예신문 논설위원으로서 보다 예리한 그러면서도 절도를 잃지 않는 자세의 노력, 그리고 무예발전에 기여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