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입. 화천 감성마을을 찾았다. 간만에 다시 《이외수문학관》을 둘러보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20여년을 함께 작업했으니 《이외수문학관》이 곧 ‘동문선문학관’과 진배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 이외수 선생이 안 계신다. 춘천의 한림대병원에 항암 치료 차 입원 중이란다. 해서 점심 한 점 얻어먹고 다시 춘천으로 내달았다. 병실에는 이미 다른 출판사 팀들이 와서 편집회의 중이었다. 한 시간도 더 지나서야 겨우 통성명(!)을 하고 병문안 마치고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를 일러 ‘트위터 대통령’이라 부르고, 다른 작가들은 그를 두고 복(福)도 많다고들 하며 부러워한다. 도대체 그가 왜 늙어갈수록 더욱 인기를 누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시샘 담긴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필자는 가족처럼 지내며 함께 한 긴 세월이 있었기에 작가나 작품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오늘은 그가 왜 그 같은 인기를 누리는지에 대한 궁금증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 한다.
매너는 감동이다! 그날 춘천 한림대학병원 병실에서 필자가 쓴 《품격경영》을 드리며, 역으로 제 책에 선생의 사인을 받고 싶다면서 책 면지에 그냥 사인만 해주십사고 부탁했다. 그러나 선생께선 그럴 수 없다면서 지필묵을 준비시켰다. 잠시 소동 끝에 상을 받치고 준비된 종이에 나무젓가락 끝을 살짝 뭉개어 글자 수만큼이나 먹물을 찍어서 축사를 쓰고 낙관을 찍었다. 사인하는데 3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바로 저거다! 필자가 30년을 지켜보았지만 그가 작품을 할 때는 물론이고 사인할 때에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에게서 글쓰기는 고행이자 기도다. 백수의 왕인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혼신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표현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사인 하나에 저토록 정성을 바치다니! 주위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조차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가 사인을 마치자 ‘아하!’하고 감탄사와 함께 숨을 몰아쉰다.
아무렴 그 정성이 어디 가겠는가? 사인 하나만으로도 그 정성, 그의 예술혼이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감사와 행운을 빌어주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음을 누가 봐도 알겠다. 그는 그렇게 독자들과 소통한다.
《이외수문학관》으로 전국에서 저자 사인한 책 주문이 매일 수십 건씩 들어온다. 당사자가 그 자리에 없어도 그의 사인 자세는 언제나 똑같다. 그 사인에 감동받은 독자들은 당연히 독자 아닌 신자(!)가 되는 것이겠다. 한때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의 인기 비결은 타고난 복(福)도, 요행도, 기행도, 글재주도 아니다. 독자에게 바치는 두 마음 아닌 지극 정성이다. 비록 근년에 들어 현실 참여적 언행으로 작가적 순수성이 많이 퇴색했다고들 하지만 독자를 대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정성만한 매너는 없다! 보통 사람들도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물론 전시회, 기념식 등등 방명록에 사인할 일이 많다. 한데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놓인 ‘싸구려’ 수성펜으로 출석부 체크하듯 이름 석 자 ‘찍’ 갈겨 써놓고 얼른 들어가 버린다.
비록 요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신사라면 그같이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표현해내야 한다. 만년필이나 붓펜 등 자기만의 필기구로 정자체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정격이다. 덕담까지 보태면 더욱 좋겠다. 굳이 달필로 뽐낼 필요도, 악필이라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 그냥 정성껏 또박또박 바르게 쓰면 된다.
▲ 이외수 작가의 사인 자료. © 한국무예신문 | |
《설원(說苑)》에서 ‘높은 산은 우러러 보아야 하고, 훌륭한 행동은 따라하고 볼 일이다. 高山仰之 景行行之’고 했다. 설사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좋은 점은 ‘닥치고’ 따라하고 볼 일이다. 그 또한 지혜로운 자의 매너다.
‘일등’과 ‘일류’의 차이! 아직도 혁명을 꿈꾸고 혁신을 해야 한다며 주먹을 쳐드는가? 사소한 습관(매너) 하나가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어찌 보면 가장 쉬운 일들 중의 하나다. 그런 쉬운 일도 못 하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치는 건 난센스다. 그러길 기다리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일등’과 ‘일류’를 구분할 줄도 모르는 후진국 졸부들. 삼류 막장 드라마 보고 배운 왕(王)질, 갑(甲)질을 해보고 싶은 천민근성이 발동한 것이다. 그것도 만만한 국적기, 자기회사 비행기에서. 감히 선진국적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서양인 스튜어디스였다면 쪽도 제대로 못 펼 인사들이.
자기 회사 직원부터 정성으로 대해야 그 정성이 고객에게 전해질 것이 아닌가? ‘아랫것들’을 노예 부리듯 호통 쳐서 만든 매뉴얼 서비스에 무슨 정성이 있겠는가? 품격 있는 선진국 신사들은 그런 억지 서비스의 거북함을 금방 알아차린다. 아무렴 공짜로 태워준대도 그 ‘땅콩 리턴’항공사 일등석에는 타지 못할 것 같다.
명품은 품격으로 만들지만 명품 걸쳤다고 종복이 신사가 되지는 않는다. 쩐(錢)질로 일등은 할 수 있어도 일류는 못 되는 이유다. 졸부와 신사의 차이다. 품질과 품격의 차이다. ‘너부터’는 종복근성이고, ‘나부터’는 주인장 마인드다. 주인에겐 사소한 것이란 없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혁명이나 혁신이 아니다. 그런 사소한 것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