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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
합기도의 근대 무예사 탐색과 분석적 비판을 통해서
 
이호철 박사 기사입력  2015/07/0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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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철 박사     ©한국무예신문
한국의 합기도 역사에 대한 논쟁(論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존의 연구 자료들과 검증(檢證)되지 않는 사료(史料)들을 계속 재탕하거나 합기도의 역사 정립에 관한 사안은 기존의 문제점들과 비판(批判)만 반복하면 미래지향적인 해결책들 마련의 길은 요원(遙遠)하다 할 것이다.
  
합기도를 오랫동안 수련(修鍊)하고 연구해 온 필자(筆者)와 같은 무예인들은 합기도의 정통성(正統性)과 독자성(獨自性)을 지닌 근대 무예로서의 정립을 위해서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술기적으로 일본 무도(日本武道)의 색깔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힘이 든다는 것을 인정(認定)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무예의 역사는 우수한 정통성 있는 무예들이 수없는 시행착오(試行錯誤)와 과오(過誤)를 통해 시대적 상황과 요구(要求)에 따라 정(正)-반(反)-합(合)의 과정을 통한 변증법적(辨證法的)인 역사 발전을 이룩해 온 귀중한 교훈(敎訓)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예를 들어,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데와의 차별화 작업을 국가적으로 민간적으로 열심히 해 온 결과 명실상부(名實相符)한 한국의 국기(國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일본의 다양한 고대 유술(柔術) 스타일 속에서 근대식 유도(柔道)가 여러 고류 검술 유파들 속에서 근대식 검도(劍道)가 정착(定着)되어져 온 것이 좋은 사례(事例)들이다.
 
이러한 맥락(脈絡)에서 합기도를 근대 무예사 탐색(探索)을 위한 노력의 일환(一環)으로 현존해 있는 합기도의 역사적 문제점들을 냉철(冷徹)하게 인식(認識)하고, 시대별로 일어났던 합기도 관련한 일들에 대해서 분석적(分析的) 비판을 통해 미래지향적 해결책들까지 모색(摸索)하는 시도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본 칼럼에서 해보려고 한다.
         
1. 현존하는 합기도 역사 연구의 문제점들
2.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규명해야 할 2가지 전제조건
 (1) 최용술은 과연 대동류유술의 고수인 다케다 소우가꾸로부터 무예를 배웠는가?
 (2) 합기도 무명을 계속 써야하는가 아니면 개명해야하는가?
3. 합기도의 연대기별 근대사 구분과 시대별 사건들과 문제점들의 분석적 비판
4. 합기도의 근대무예사 정립을 위한 미래지향적 방향제시 및 대안들

1. 현존하는 합기도 역사 연구의 문제점들

무예역사학자의 역할(役割)은 무예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자료(사료)를 수집(蒐集)하고, 그 자료를 토대(土臺)로 과거의 사건을 조심스럽게 재구성(再構成)해야 한다. 무예역사적 사료에서 무의도적(無意圖的) 전승 무예사료와 의도적(意圖的) 전승무예사료가 있다. 무의도적 전승 무예사료로는 무예를 수련하고 교육하는 무예수련건물과 무예교육기관, 무예병장기, 무예 용어 등 관련 서적이나 저작물과 같은 문헌 사료이다. 의도적 전승 무예사료는 무예를 수련하고 교육한 연보, 연대기, 무예인들의 전기나 회고록 역사서 등을 들 수 있다.
 
실증적(實證的)인 자료의 뒷받침이 되는 무의도적 무예의 역사자료가 부족하기에 무예역사가들은 주로 의도적 무예사료들 중의 한 부분인 무예인들의 전기(傳記)나 회고록(回顧錄)에 의존(依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 중심적인 역사연구는 특정 인물을 영웅화시키는 신비주의적 무협지무예사관에 빠져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따라서 무예 사료가 불충분하면 남아 있는 무예 관련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分析)하고, 해석하여, 재구성하는 등 최대한 객관성(客觀性)을 띠려는 무예역사학자의 직관(直觀)과 추리(推理)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까지 합기도 역사학자들은 합기도의 역사적 발전사의 큰 흐름을 한국 고대 무예의 일본이전 후 일본에서의 합기술로 이전, 일본에서의 한국인의 대동류유술의 수련 등 전통주의(傳統主義) 합기도사관을 바탕으로 한 연구 방향을 잡아 왔다.
 
 전통주의 합기도사관은, 합기도가 고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발생하여 오늘날까지 전승되었다는 식으로, 합기도의 전통성을 홍보하는 목적(目的)과 취지(趣旨)에서 서술(敍述)된 합기도가 한국의 전통 무예임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대다수의 합기도 교본을 비롯한 문헌(文獻)에서 나타나는 합기도역사 기술 방식 그리고 고대 동양무예들이 서로 영향(影響)을 주고받았고 이러한 영향력에 의해서 형성된 대동류유술이 최용술과 장인목 등에 의해서 한국에 재유입 된 내용 등에 초점(焦點)을 맞추어 왔다.
  
따라서 전통주의 합기도사관에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합기도에 전통 또는 민족 등의 수식어(修飾語)를 붙이게 되었고, 전통성이나 고유성을 뒷받침하는 근거(根據)가 될 수 있는 발생 기원(起源)과 내력(來歷), 그리고 발전 과정에 대한 실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이유로 내용의 왜곡(歪曲)과 과장(誇張)이 생기는 문제점 등으로 인해 합기도에 대한 정통성 시비(是非)는 공공연히 논쟁(論爭)의 연장선 속에 아직 있다.
 
기존의 전통주의 합기도사에 반론(反論)에 대한 명목(名目)으로 합기도의 실재적(實在的) 발생 과정을 소상하게 언급(言及)한 논문과 서적 발간(發刊)의 노력들이 있었는데, 가령 북한과 중국 등지에 발견된 고구려 고분 벽화, 무용총, 삼실총에 그려진 맨손 격투경기 그림을 두고 합기도의 동작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의 진위(眞僞) 여부에 대한 이의(異議)와 비판만 불러일으키는 부작용만 초래(招來)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주의 합기도사의 잘못된 역사관점에 대한 반성(反省)과 개선(改善)의 움직임이 합기도의 역사를 올바르게 보려는 몇몇 양심(良心)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의도적으로 묵인(黙認)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그 이유는 한국과 일본이 합기도 역사의 논쟁을 통해 민감(敏感)한 문화민족주의의 대립적(對立的)인 시각(視覺)과 갈등(葛藤)이 잠재(潛在)해 있는 현상으로 인해서 정부 관계자, 역사 연구자, 전문 번역가들조차도 합기도의 기원이 일본과 연관되어 재규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간과(看過)하거나 눈감아주는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무예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질적(痼疾的)인 문제점(問題點)은 한국의 근대무예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유입(流入)된 일본 무도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이 한국에서 전이(轉移)되어 다시 역유입된 것이라는 억측(臆測)에 가까운 주장들로 일관(一貫)하여 오고 있다. 따라서 무예사적 관점에 의한 기존의 합기도역사 서술의 문제점은 한국의 전통무예와 관련된 많은 사건들을 고의적(故意的)으로 연관(聯關)시켜 나열(羅列)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련 사실들이 한국의 역사 전체와 어떤 연관성을 갖는 것인지, 당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脈絡)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아무런 구체적인 실증적이거나 고증적인 설명이 없다. 그러다보니 실증적인 증명(證明)을 위한 방편(方便)으로 합기도의 역사 왜곡은 반복(反復)되었다. 더 심각(深刻)한 것은 이러한 과정들이 일본의 무예 학술자료 및 용어, 사상 등을 무차별(無差別)적 수용(受容)하여 한국의 전통무예인 것처럼 조작(造作)하여 합기도의 사상적(思想的)인 이론적(理論的) 토대를 포장(包裝)하여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합기도 역사의 올바른 정립의 부재는 현재 합기도가 당면(當面)한 문제와 직결(直結)된다. 가장 핫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합기도(合氣道; Hapkido)가 일본의 아이기도(合氣道; Aikido)와 한자어 무명(武名)의 동일성(同一性)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합기도의 대중적(大衆的) 인기로 인해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난 양적 증가 속에서 경제적(經濟的) 이익(利益)과 명예욕(名譽慾)을 즐겨왔던 난립(亂立)된 협회(協會)들과 단체들간의 갈등(葛藤)과 불협화음(不協和音)은 결국 합기도가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에서 추방(追放)되는 오욕(汚辱)과 전통무예진흥 기본계획(안)에서 외래무예로 분류되는 악재(惡材)까지 겹치게 되었다.
 
 현재의 합기도는 정체기에 빠진지 오래이며 고사(枯死) 상태에 있다고 한탄(恨歎)하며 애석(哀惜)해하면서도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해결(解決)하려는 시도(試圖)나 노력들을 추진(推進)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裝置)가 부재하다. 특히 거의 모든 합기도 도장(道場)들이 영세성을 면하지 못한 상태에서 협회나 정부의 정책기관으로부터의 후원(後援) 부재 상황은 그런 우려(憂慮)를 더욱 심화(深化)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냥 손을 놓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불평(不平)만 늘어놓으면서 불확실(不確實)하고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기대감(期待感)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이론적이나 아직 논란의 연장선(延長線) 속에 있는 합기도의 근대무예사의 정립을 위한 지속적(持續的)인 연구(硏究)와 노력(努力)을 통해서 현실적인 접근(接近)에 대한 방법을 계속 찾기 위해 매진(邁進)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와 같은 합기도인들의 공통(共通)된 생각일 것이다.    

2.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규명해야 할 2가지 전제조건

 근대무예로서의 합기도의 역사정립은 1945년 이후부터 형성(形成)되기 시작한 합기도에 대한 역사적 정립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說得力)이 있고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무예사 시작 시점인 해방(解放) 후 시기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유입되었던 유도, 가라데 또는 검도 등의 일본식 무도의 강제적(强制的) 주입(注入)으로 인해 어떠한 한국식 근대무예의 형성에서 일본적인 색깔을 벗을 수 없는 불가피성(不可避性)과 한계성은 한국의 독자적인 근대무예사 작업에 큰 난관(難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근대무도는 단급제도와 다양한 수련 체계, 승단제도와 정신적 가치(價値)의 부여(附與) 등으로 체계화 되고 확립되어 있었다. 반면 태껸이나 씨름과 같은 일종의 전통 놀이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한국무예 또는 중국무예에 대한 탄압(彈壓)과 억압(抑壓) 속에서 음성적(陰性的)으로 민간에서 전승(傳承)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전통무예는 중국의 무예들과 함께 공개적(公開的)인 교육체계로써 틀을 형성한 일본의 무도체계와 비교(比較)해서 그 체계성과 대중성에 있어서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합기도의 역사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대립적인 시각의 차이가 올바른 근대무예사 연구에 더 어려움을 가중(加重)시킨다. 양국의 수구적(守舊的)인 민족주의 및 민족우월주의는 합기도의 역사 고증(考證)의 공동 연구작업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 되어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함께 하는 시도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예로서의 합기도의 오랜 역사적 정체성은 아직 명확(明確)하지 않다. 그것은 일본의 대동류유술과 아이기도와의 관계에서 대한 정확한 구분(區分)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아이기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동류유술과 다른 유파의 무술을 수련해서 새로운 형태의 무술을 창시하게 되었다”고 정확한 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합기도는 일본과 동명(同名)의 명칭(名稱)을 사용하면서 역사적 정체성의 혼란(混亂)을 야기(惹起)시키고 있다.
 
 합기도는 한국의 신체문화적인 특수성이 포함(包含)되면서 일본의 아이기도와는 다른 형태의 기술과 수련체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해방이후의 합기도는 일본 무도의 특성(特性)에다가 중국무예와 한국 고유 무예가 융합(融合)되어 다양한 발차기 및 권법(拳法), 형(型) 등이 접목(椄木)되어 대동류유술이나 아이기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닌 무예로서 변형되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동류유술과 아이기도(合氣道)와 전혀 다른 한국의 독창적(獨創的)인 기술의 수련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이체의 현상을 보이면서 명확한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무예로서의 합기도의 역사적 정립을 위해서 그 전에 명확히 해야 할 두 가지 전제조건으로, 첫째는 최용술이 다케다의 제자라는 사실의 진실공방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다. 최용술이 한국의 근대무예로서의 합기도의 형성에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한 창시자의 위치(位置)에 있기 때문이다. 최용술이 대동류유술을 다케다 소유가꾸로부터 직접(直接) 지도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정통성 정립에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둘째로는 ‘합기도’ 무명의 사용여부에 대한 결단(決斷)이다. 여전히 합기도가 일본의 아이기도와 한자어(漢字語)가 동일한 무명을 지니고 있기에 일본무도와의 차별화 또는 독립화에 가장 큰 장벽(障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이 두 가지 전제조건들, 즉 ‘최용술은 과연 대동류합기유술의 고수(高手)인 다케다 소우가꾸로부터 무예를 배웠는가?’와 ‘합기도 용어를 계속 써야하는가 아니면 개명해야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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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7/03 [23:37]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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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심자 2015/07/04 [13:55] 수정 | 삭제
  • 최고요. 솔직하고..
  • 조관장 2015/07/04 [07:42] 수정 | 삭제
  • 두손들고 환영하는 바 입니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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