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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기도 역사적 정립의 올바른 방향 제시(4)
합기도의 연대기별 근대사 구분 및 분석 비판: 합기도의 형성기(1945년-1969년)
 
이호철 박사 기사입력  2015/08/0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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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철 박사     © 한국무예신문
합기도의 광복이후 지난 70년 동안의 근대사는 한 인간의 흥망성쇠의 과정과 같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태권도가 한국의 대표무예로 정착될 때까지는, ‘코리아 가라데’의 오명을 벗는데 각고(刻苦)의 노력과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합기도 또한 단체난립과 기술체계의 미정립 및 무명(武名) 논란 등의 부정적인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단 한번도 ‘코리아 아이기도’라는 무명을 국내외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색(倭色) 무예로서의 콤플렉스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차별화된 훌륭한 합기도의 한국적인 호신 술기들이 발달되고 진화해 오면서 명실상부한 한국의 신체문화가 녹아 있는 근대무예로서 국내외적으로 발전되어 왔던 긍정적인 합기도의 흐름을 우리는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합기도 무명의 개명(改名)의 불필요성에 대한 당위성(當爲性)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기 전에, 더 설득력 있고 실증적인 주장을 위해 필자가 절실히 깨달은 것은 해방 이후에 합기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의 필요성이다.
 
합기도의 수련경험의 유무를 떠나 합기도의 올바른 역사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합기도의 연대기별에 의한 근대사적 사실들을 알리고 분석적인 비판과 함께 병행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합기도 근대사를 연대기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1945년 이후 현대 한국합기도의 역사 구분은 60년대 말까지를 합기도의 형성기,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를 합기도의 발전기, 1990년대부터 2009년까지는 합기도의 확장기, 그리고 2010년 이후부터는 합기도의 정체기로 필자는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합기도의 연대기적인 근대 역사의 구분이 향후 후학들이 합기도의 역사를 재정립을 위해 근대역사의 기틀을 만들어가는 작업에 미미(微微)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합기도의 형성기(1945-1969)
 
1) 일본식 근대무예의 한국 유입과정
 
한국에 근대식 무예의 도입은 근대화 초기시기인 개화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구한말기에 조선에 현대식 군대와 경찰 시스템을 보급한다는 명목 하에서 일본식 격검(검도)과 유술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도관이 설립되고 군사훈련용 무도교육이 실시되면서 경기화도 이루어지면서 무도단체가 결성되었다. 공수도, 유도, 검도 등과 같은 근대식 일본무도의 도입은 자발적으로 필요성에 의한 국가간의 교류(交流)가 아닌 일방적(一方的)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 정부에 의해서 반강제적인 과정은 일본 무도 문화가 우수하다는 명분으로 한국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이러한 근대식 일본무도들이 일본에 유학을 갔던 한국 학생들에 의해서도 한국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무도의 한국 유입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위한 강제식 유입과 함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도 자발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방 후에 귀국한 일본 유학생들은 한국사회의 신지식인으로 개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유학시절에 그들이 수련한 일본식 유술 및 검술, 공수도, 당수도 등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유학생들의 긍정적인 역할은 부분적으로나마 국력 신장과 국권수호를 위해서 교육기관에 유술 및 검술과를 설치하여 교육을 실시하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친일의식으로 무장된 일부의 일본유학생들에 의해서 일제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면도 적지 않았다. 하여튼 사회적으로 일본무도에 관심이 확대되면서 일반인들도 일본식 근대무도를 대중적으로 수련하기 시작했다.
 
 광복초기에는 일제시대의 일본식 무도종목들이 여전히 학교 및 군대에서 경찰교육을 위한 무예로 장려되었다. 특히 대한체육회의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무예단체는 대한체육회의 산하단체로 가맹되었고, 무예의 스포츠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합기도의 역사적 정체성이 일본무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해방 직후에 일본무도의 문화가 합기도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가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던 시기로부터 한국 무예가 어떤 것이든 일본적인 색깔을 금방 벗었을 수 없는 상황적인 불가피성이 있었다.
 
이는 향후 합기도가 일본 아이기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만연(蔓延)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서, 특히 체육계 지도자들이나 무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합기도의 원형은 일본 아이기도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이 난무(亂舞)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일본화를 위한 한국의 무예의 정립을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6·25의 한국내전으로 인해서 혼란한 한국 사회에서 자체적인 무예문화의 정립의 기회를 상실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란(戰亂) 후에는 무예단체의 융합(融合)과 분화(分化)가 반복되는 과정을 겪었다.
 
가령 일본무도의 정체성이 확실한 유도나 검도와는 달리 태권도는 기존의 당수도와 일본의 공수도가 결합된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었고, 합기도는 대한기도회 등을 시작으로 다양한 합기도단체가 생겨나가 시작했다.
 
무예문화의 교류의 핵심은 무예경기가 스포츠를 지향함에 따라 그 기속화가 이루어졌다. 국내는 대한체육회가 주관하는 전국체육대회의 종목으로 채택되어 무예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개화기에 일본의 근대식 무도의 위로부터 아래로부터의 도입방식은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 무예인들간의 상호교류의 성격을 지닌 민간교류에 의한 전통무예의 조화 및 동화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적 통치의 야심에 의한 반강제적 군사교육목적으로 또는 친일의식을 지닌 유학생들에 의한 일본의 근대무도의 유입은 특히 한일합방 후 일제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바람직한 한국식 근대무예의 형성과 토착화(土着化)는 불가능해졌다.
   
가라데, 유도, 검도와 같은 일본 근대식 무도가 무차별적으로 수용돼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사용되어지는 중 갑작스럽게 타의에 의해 광복을 맞은 상황에서, 합기도 또한 일본에서 대동합기유술을 수련한 최용술과 장인목 등에 의해서 도장에서 시작되었기에 국가적인 정책이나 방향의 도움 없이는 일본무도의 색깔에서 탈피한 한국식 무예로서의 합기도는 한계점을 가질 밖에 없었다.     

2) 합기도는 최용술의 제자들에 의해서 관(도장)에서 협회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다
 
 합기도의 근대무예로서의 형성은 최용술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영남대 법학도였던 서복섭이 최용술의 첫 제자로 1959년에 최용술로부터 독립하여 서울 낙원동에 도장을 운영하면서 체육과 대학교수로도 후진 양성을 하는 역할을 했다.
 
그 후에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이 시기에는 최용술은 합기도란 용어를 쓰지 않고 야와라, 유술, 합기술 등의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기술 또한 적은 움직임의 동작에 의한 회전법과 직선법을 사용하는 관절기 위주의 실전적 술기 위주로 수련하였다.
 
지한재는 일본유술 지향적인 합기도를 한국식 합기도로 탈바꿈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술적 특성이 강한 합기도에 족술(발차기)을 접목시켰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는 발차기, 낙법, 각종 세분화된 종류의 술기들이 수련되어지는 모습을 갖추면서 기존의 일본식 무도와는 차별화되어 가는 모습을 띠기 시작한 동시에 합기도의 기본 수련체계인 낙법, 발차기, 술기의 수련구분이 형성되었다.
 
▲ 한국 합기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용술과 지한재. 일본에서 대동류유술을 수련한 최용술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대구에서 서복섭과 1951년도에 처음으로 대한합기유권술 도장을 개관했다. 최용술의 제자인 지한재는 1955년 경북안동에 합기도장을 열었고(합기도 명칭 최초 사용), 2년 후인 1957년에 서울에 성무관을 창관했다.     © 한국무예신문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한재가 1955년 안동에서 도장을 열면서부터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57년 서울에 창관한 성무관 이후부터였다. 이는 최용술의 첫 제자인 서복섭이 대동류합기권유술에서 ‘유권술(柔拳術)’이라고 명칭을 제정했다가 다시 ‘합기유권술(合氣柔拳術)’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에 착안해서 지한재가 합기도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회고록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대동류유술을 배운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대동류합기유술에서 아이기도라는 무명이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합기도’가 ‘아이기도’의 이름을 차용하였다는 사실과는 전혀 무관(無關)함을 알 수 있다.
 
1961년 대한민국합기도협회가 처음으로 창단되었다. 그 산하로 1961년 8월 10일 김무홍에 의해 신무관이 개관됐다. 도장수가 늘어나면서 난립되어가는 합기도 계열들을 통합하고자 최용술을 중심으로 서복섭, 김정윤, 지한재 등이 1963년에 최초로 문교부에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대한기도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통합의 노력이 서로의 이해관계로 무산되고, 1968년 4월에 지한재를 총관장으로 하는 대한합기도협회가 결성됐었고, 1968년 5월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합기도의 통합의 필요성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시기에 합기도라는 용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던 최용술도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결국 합기도의 통합시도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또 하나의 합기도 단체가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명재남에 의해서 국제연맹합기회(재남무술원)가 창설되어 더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3) 형성기의 문제점들과 아쉬운 점들
 
한 무예의 초기의 지도방식과 수련체계는 그 무예의 전승과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령 유도나 가라데와 같은 일본무도의 초기의 도장의 대부분 수련방식은 한 명의 사범이 다수의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직접교수법에 따라 사범의 시범을 모방(模倣)하고 반복(反復)하는 상대방과의 공방형식으로 수련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아이기도도 예외 없이 이러한 도장문화의 수련이 행하여졌다.
 
그런데 합기도의 초기 수련은 최용술은 영세한 좁은 도장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상대로 개인 지도식 술기 전수방식으로 학생들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지도하였기에 통일된 시스템에 따른 도장문화 수련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의 합기도 기술지도에 체계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였던 유병돈의 진술(陳述)에서 잘 나타난다.
 
“최용술 선생님은 체계를 갖추고 지도를 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었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그 때 그 때 기술을 가르치신 것으로 보아 도장문화의 수련을 하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이는 곧 제자들마다 공통적이 아닌 다른 낱술기들을 지도하였고, 타 무도와 같이 수준에 따라서 수련해야하는 통일된 형(품세)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향후 이는 합기도의 통일된 술기체계를 갖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최용술의 제자들 특성에 따른 지도방식은 제자들의 합기도 기량(技倆)의 향상에 큰 역할을 하였지만, 독립한 제자들이 도장을 차려 지도할 때에는 도장마다 술기 수련의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통일된 술기체계에 따른 심사제도가 없었기에 사범의 임의 판단에 의해서 급이나 단을 주는 개별적인 형태는 도장의 수(數)와 수련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문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심사의 통합성과 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협회가 창립되어져 갔지만, 통합된 하나의 협회가 아닌 수련스타일과 기술체계가 상이한 도장들로 이루어진 협회들도 난립하게 되고 말았다.
 
경기화된 무예는 규정된 경기 규칙에 맞추어 훈련하기에 경기시합에서 쓰일 수 있는 기술들 중심으로 수련체계가 이루어지는 이유로 기술들의 통합이나 정리가 자연스럽게 되어간다. 오늘날 스포츠무예가 된 태권도, 유도, 검도 등은 경기화를 통해 기술적인 통합이나 체계가 이루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합기도는 경기화 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에 의존(依存)하였다. 일정한 기준이나 규칙에 따른 통합된 기술체계가 없다는 의미는 임의적인 호신술기들이 검증 없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수련되면서 합기도의 술기가 무려 3,000여 수(手)를 넘는 양적인 팽창을 초래하였다.
 
이는 곧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술기들의 수련의 효과가 상쇄(相殺)되는, 질적 하락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시합이나 경기화하지 않고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고수(固守)한다는 명분(名分)하에 이러한 통합성과 체계성이 부족한 합기도 술기에 대한 고질적인 문제의 발단이 합기도의 형성기부터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최용술이 합기도를 보급하던 시기에 태권도의 최홍희 장군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 즉 군인장교나 민족지도자 또는 교육자의 직위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가령 최홍희는 회고록에서 태권도란 무명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공수, 당수는 일본말로 가라데인데, 이 좌석에서 가라데를 고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요. 나는 일제 시대 가라데를 배웠으며 (…) 우리가 해방되었고 또 우리 민족무도를 만들자는 뜻에서 가라데를 버리자는 것인데 해방 후에 배운 당신들이 무엇 때문에 가라데를 고집하는 거요?라고 언성을 높이며 강력히 주장한 것에 대해 모두들 아무 반박도 못하고 “그러면 태권도로 합시다” 하고 동의했다는 사실이나 자신이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된 것은 그 당시에 도장(관) 관장들은 그의 육군 소장이라는 권위가 있었기에 순순히 응했다”고 술회(述懷)하고 있다. 
       
비록 최용술이 뛰어난 합기도 술기와 카리스마적인 지도스타일로 근대합기도를 형성한 우수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지만, 개인적인 도장에서의 사제관계로 끝나고 세력이 커 갈수록 그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지도할 수 있는 경제적 또는 사회적 위치가 미미(微微)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유도를 일본의 국기화 시킨 가노지고로는 동경대학의 교수였으며, 태권도도 최홍희의 군대의 장군급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한국의 국기(國技)로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절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력한 통치력을 지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는, 최용술이 해방 직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했던 민족투사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었고,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무도를 배웠다는 그 당시로는 취약점이 있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최용술은 제자들에게 합기도 술기를 가르치는데 열중하였으나, 지도하는 무예에 대한 철학이나 사상과 같은 이론적인 지도, 특히 한국무예로서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는 무예 지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세계대전 후에 미국에 의해 일본무도 수련 금지가 된 상황에서 지도수련을 하기 위해서 일본무도철학을 내세우며 종교적 색채(色彩)를 띠는 일본의 아이기도와는 다른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해방직후에 반일감정이 충만해 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일본의 대동류유술을 영세한 도장에서 지도한 최용술의 합기도 수련의 시작은 주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용술의 까다로운 개인 지도식 낱기술 지도방식에서는 뛰어난 기술에 비해 무예철학이나 사상적으로 이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최용술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제자들이 나중에 독립해서 교육적 목적이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도장을 차리고 운영하면서 경제적인 마찰로 인해서 갈등과 반목이 생겼을 때 최용술이 스승으로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기도는 형성기부터 분열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고, 세력을 넓혀가면서 갈등과 함께 단체들의 분열은 심화되어갔다. 따라서 최용술이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민족의 지도자 계열이나 사회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 합기도는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으로 형성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적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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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8/09 [00:16]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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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chael 2015/09/06 [06:09] 수정 | 삭제
  • 두가지 요점:1. 당수도나 공수도나 같읍니다. 애초에 당수, 수로 오키나와에서 부르던 무술을 지친 후나코시 선생이 일본으로 당수를 전파하며 나중에 공수도로 개명한것입니다. 2. rockstream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대동류 합기유술을 배운 두사람이 나중에 독립해서 합기도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것이 큰 논쟁이 될수없습니다. 최용술, 지한재가 일본 합기도의 이름을 도용했다기보담은 자기가 배운 "합기유술"에서 "합기"라는 이름을 따와서 사용했다는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그증거가 제시하는것을 따라야지요.
  • 2015/08/18 [10:30] 수정 | 삭제
  • 문제가 있으면서도 고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것 보다 차라리 사이비무술 영원사원들의 헛소리가 논리와 이치에 맞고 더 와닿는 이유는 왜일까요? 더이상 미래가 없어보이내요. 이러니 관장님들이 한숨만 쉬죠.
  • IN2U 2015/08/17 [13:24] 수정 | 삭제
  • 한국형 합기도란 말은 도대체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군요. 개혁을 빙자한 세력 확장과 더불어 이곳에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이비 무술 영업사원들의 헛소리에 웃음만 납니다. 지금 현재의 합기도가 어떻게 해야 개혁이 되고 발전을 할까요? 새로운 무명을 제시? 이 것 또 한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당장에 현실적인 문제점 부터 뜯어 고쳐야 발전은 시작 됩니다.
  • 815광복절 2015/08/15 [12:54] 수정 | 삭제
  • 합기도도 이제 독립합시다. 일부 합기도관장들이 언제부턴가 합기도창시자가 최용술옹이라고 입에 거품물고 우겨대는걸 보니 구역질납니다. 합기도창시자가 최용술옹이면 86년 사망하셨으니 합기도 명칭과 기술에 대한 권리가 유족에게 남아있는겁니다. 우리나라는 사후 70년까지 지적재산권이 인정되는 나라이기도합니다. 그렇다면 합기도란 이름쓰고 도장내는 사람들은 최소한 유족들에게 허가를 받던 인정을 받던 해야지 그냥 씁니다. 법으로 따지면 다 도용입니다. 일본것 도용한것 아니라고 우기고 최용술옹이 만들었다고 했으면 유족한테 허락받고써야죠. 지한재선생님이 합기도란 이름을 만든 사람이라고 주장들 하려면 그 명칭의 권리도 인정하고 부터 시작하시죠. 만든사람이 임자잖아요. 다를 지한재선생님한테 허락받고 간판다시오 지한재선생님이 합기도 명칭을 만든 분이라면 생전이시고 사실이라면 상표법으로도 지한재선생님 상표로 인정됩니다. 사실 이말도 거짓부렁이니 상표등록도 못하죠. 댁들이 합기도명치을 만든 사람이 지한재선생이라고 말하고 있잖소. 그럼 기술이야 그렇다치고 최소 합기도란 이름을 쓰려면 당연히 지한재선생한테 허락받아야하오, 일반명사니 이따위 말 하지마쇼. 지한재선생이 만들었다면 고유명사가 소유권이 있는 상표란 말이요. 허락없이 쓰면 그건 죄다 도적들뿐이요. 삼류소설도 이정도는 안해요. 없는 창시라로 고인을 제맘대로 이용하고... 이름의 책임은 지한재선생한테 떠넘이면서 정작 자기내들은 허락도 없이 쓰단 말이지.. 이게 앞뒤 맞는 말이요. 그만들 하시고 오늘 광복절이고하니 이제 독립을 하세요. 독립운동을 하란 말입니다.
  • 합기인 2015/08/15 [05:39] 수정 | 삭제
  • 중요한건 과거 논란에 지나던 것이 이제는 단순히 논란에 지나지 않고 일본무도명인 합기도를 버리고 다른 무술임을 천명하고 새로운 무명으로 독립을 위한 결행을 했다는점이죠. 한국에는 아직 합기도란 일본의 이름을 계속쓰는 분들이 많은 지금까지는 한기도, 화랑도, 아사흔과 같이 합기도에서 일명한국형합기도의 새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 무술들을 인정하고 않거나, 용무도, 회전무술, 경호무술, 특공무술, 공권유술과 같이 새롭게 만들어진 한국의 창시무술들을 그저 합기도의 아류라고 폄하고 있는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는 상황인것 같습니다. 시간은 지나기 마련이고 벌써 30년 20년 전 한국형합기도의 새로운 무술임을 천명하였거나 독자적인 무술로 창시된 한국의 무술들이 역사를 더해가며 말 그대로 독립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하나의 무술종목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많은 무술들이 지금은 20~30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창시무술로 인정받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영향에서인지 과거 삼국시대설로 포장되며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무술이라고 말해왔던 합기도도 요즘은 한국의 창시무술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위 칼럼을 기준하면 合氣道란 이름을 쓴게 1955년 이니 창시 60년을 주장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合氣道는 일본무명이니 말이 안되고 한글 발음 합기도라면 잘해야 30년을 인정할수 있을까요. 아직도 合氣道를 간판 등판에 달고 있는 것이 한국합기도의 현실이니 그것도 많이 잡아준것같습니다.

    제가 볼땐 이제 더이상 그 무술들은 사이비무술로 말할수 없고 그 무술들이 합기도의 자리를 치고들어가려 하지도 않는것 같습니다. 합기도는 일본무술이니 한국의 무술로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의 무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제도가 생겼다죠. 앞으로 십여년이 더 지나면 30~4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창시무술들은 한국사회에서 한국의 문화로 인식되고 저변화될겁니다. 그때에 합기도는 어떨까요. 한국에서 검도, 유도, 공수도, 합기도라 읽컬어지는 일본무도로 인식될겁니다.

    20~30년 전부터 합기도를 버리고 새로운 무술로 독립하거나 창시한 무술들을 애써 폄하하려해도 명분이 없내요. 이제는 합기도가 한국무술이름이라고 하는 분들이 억지부리는 것으로 인식되잖아요.

    순수한 창조던 재조합을 통한 체계이던간에 그 무술들은 자리잡았고 합기도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해도 이미 사회적으로 인식된 것임으로 되려 합기도인들이 인정운운하는 것을 비웃고 있을겁니다.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구요. 제가 볼때 그 무술들은 합기도의 자리에 치고들어갈 생각도 없어보입니다. 제가 알기로 요즘 한국에는 주짓수나 외국의 무술들이 ?을 넓혀가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기반이 대부분 한국에서 합기도도장을 하는 관장들이 합기도가 안돼니까 접고 주짓수, 칼리, 크리브마가, 삼보, 킥복싱, 종합격투기 도장을 차리고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갈수록 없어져가는 침체된 처지에 있으면서 발전을 길을 거부하는 이유를 모르겠내요.
  • IN2U 2015/08/14 [15:34] 수정 | 삭제
  • 그러한 뜻에서 새로운 무명을 들며 학계에 계신 분들 께서 제시를 하였죠. 그런데 그 학교 라인에서 창조 된 무술이 몇 가지 인지 아시는지요? 지난 유병언 사건 때도 무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 유도, 태권도 시범단을 운영 하였고 과거 5공화국 ?는 전경환 씨와도 친분 관계가 있어 합기도에도 어느 정도 관여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민감한 문제지만 새로운 이름으로 제시 된 종목도 그러한 취지에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지금 까지 제시된 새로운 이름의 무술들은 제가 봤을 때 순수한 의도의 창조는 없는 듯 합니다.
  • 반대의견합기인 2015/08/14 [04:22] 수정 | 삭제
  •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합기도는 일본무도라는 것은 논란거리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다르게 발전한 무도라면 지금이라도 합기도로부터 독립하기위한 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고봅니다. 무예신문에 송일훈박사님의 칼럼(http://www.mooye.net/sub_read.html?uid=9886§ion=sc2§ion2=%C4%AE%B7%B3)이 현실적인 문제해결방안 입니다. 외래어인 합기도는 우리의 이름이 아닙니다. 완전한 독립을 위해 각기 다르게 변질된 난잡한 기술들을 표준적인 체계로 만들어 정립하고 새이름으로 합기도에서 완전한 독립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 소모적 논재이 각기 찬반의 생각이 다를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전 외색이 짖은 외래어 합기도를 계속 써야 한다는 생각은 다름이 아닌 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자의 윤리와 양심을 걸고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정확한 해법을 제시한 송박사님의 바른말을 우리는 숙고하여 이루어내야 합니다.
  • IN2U 2015/08/13 [22:10] 수정 | 삭제
  • 역사는 돌고 돕니다. 1960년대 여러 이름의 무술로 갈라지거나 단체가 난립 하였죠. 현재에 와서도 단결과 통합을 바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무술명을 들며 이러한 무술을 제시 한다는 부류도 있죠. 거기다 이런 틈을 타 비주류 또는 합기도 파생 무술 세력들의 세력 확장 등. 이러한 점들이 그 당시 1960~70년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차라리 군사정권 시절 처럼 국가 개입에 의한 통합이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드네요. 50여개 합기도 단체가 어떻게 생겨 났고 어떻게 단증을 판매 하고 있는지 너무나 의심스럽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합기도인 스스로가 자존심을 팔지 말아야 겠죠. 요근래 사이비 무술인들이 합기도의 자리를 치고 들어 오려는 속셈이 눈에 보여 합기도인으로서 참 허탈 합니다. 일선지도자들의 자세도 중요 하지만 단체장들의 노력이 어느 ? 보다도 필요한 시기 인 것 같네요. 다 같이 노력합시다.
  • rockstream 2015/08/12 [23:23] 수정 | 삭제
  • 合氣道의 발음인 합기도와 aikido 에서 촉발된 이름 자체의 원조 논쟁은 충분히 다뤄 질 문제이나.... 합기도 와 aikido 를 같은 무술로 보는 분들은 정말 도장의 매트 위에서 땀을 흘려본 분들인지... 아니면 정말... 소위 말하는 Key Board Warrior 들인지...
    大東流合氣柔術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된 두 무술을 한자가 같다고... 합기도를 aikido 라고 보는 분들이 아직 있군요...
    합기도를 大東流合氣柔術과 비슷하다고 하면 혹 또 모를까....마는...
  • 김성진 2015/08/12 [14:46] 수정 | 삭제
  • 윗글 이중성글 공감하고 좋은 글이네요 ^6 사고이 다양성 1. 이 그날 그날에 따라 지도했다 도장문화에 ..... 전 다르게 생각 역으로 생각해봅니다 트레이닝 방법론에 -과부화의 원리-반복성의 원리-점진성의 원리-개별성의 원리-특이성의 원리- 의식성의 원리 방법들이 있습니다 최용술의 교습법은 그 개인이 가진 특성(성별.체형. 근력.근지구력.수련정도.학습정도) 이렇게 생각하면 더욱 과학적인 교수법인것이지요 .^^ 다양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단정하기보단 혹 다양한 교류가 필요하다면 연락 주세요 010-9179-3773
  • 이중성 2015/08/12 [12:56] 수정 | 삭제
  • 태권도가 한국의 대표무예로 정착될 때까지는, ‘코리아 가라데’의 오명을 벗는데 각고(刻苦)의 노력과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합기도 또한 단체난립과 기술체계의 미정립 및 무명(武名) 논란 등의 부정적인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단 한번도 ‘코리아 아이기도’라는 무명을 국내외적으로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색(倭色) 무예로서의 콤플렉스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전 이 자체가 너무 억지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코리안가라데는 외국인들의 인식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이후에도 공수도(空手道)란 이름을 써왔던 사실을 모르는이 없죠. 당연히 공수도라 간판을 달고 한국것이라 우기니 코리안가라데라는 인식이 있을 수 밖에요. 태권도(跆拳道)란 무명을 창명해 새로이했을때에도 기존의 인식이 하루아침에 달라질수는 없죠. 더군더나 외국에도 공수도를 수련하고 있는 인구가 많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 태권도의 독립선언을 인정하고싶진 않았겠죠.
    그러나 필자의 말대로 태권도는 각고의 노력끝에 전세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국의 대표문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태권도는 한국이 종주국인 세계적 경기스포츠종목이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전후로 공수도, 유도, 검도, 합기도가 한국에 유입되었습니다. 이중 태권도는 공수도로 부터 완전한 독립을 시도했고 성공했습니다. 그 독립 시도의 첫번째가 바로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는 것이였고 그 이름하에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정립해냈습니다.
    반면, 일본무도면 어떻냐고 공수도에서 굳이 독립하지 않았던 곳은 지금 그 이름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지부로서 그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유도와 검도도 그 이름 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지부로서 그 역활을 하고 있죠. 합기도 또한 마찬가지이죠. 한국을 대표하는 지부도 있구요.
    코리안아이기도, 코리안합기도란 말 자체가 없고 누구도 그렇게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유야 당연하죠 코리안공수도,코리안유도,코리안검도란 인식이 없는것 처럼 합기도는 일본의 무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만 합기도가 다르다고 하는 것일뿐 그걸 외국에서 알수없죠.
    태권도와 비교 하려면 말이죠. 태권도 처럼 하면서 비교해야 맞습니다.
    합기도는 유도, 검도, 공수도에 비교해야 하는 것이고 같은 상황이랍니다.
    일본무도면 뭐가 어떻습니까. 좋으면 그만이고 올림픽, 아신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 등 국위선양하는 우리 선수들을 보면 자랑스럽기만 한걸요. 일본무도라는 것이 뭐가 흠이됩니까.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님다. 되려 무도인의 삶에 자긍심을 가질 일이죠.
    공수도, 검도, 유도를 수련한 분들이 역사를 왜곡하진 않습니다. 유독 합기도만 그러는 이유를 알수 없내요. 합기도가 일본무도인게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대요.
  • 무술인 2015/08/12 [12:31] 수정 | 삭제
  • 합기도는 일본의 무도임을 부정 할수는 없습니다.

    한국의 합기도인들이 합기도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한국의 무도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치에 맞게 우리나라 무도로 만드는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합기도와 아이기도는 다른 이름이라니요. 이건 제3자가 보더라도 말도 안되는 억지라고 할수밖에 없겠내요. 재팬이란 국명을 우리나라 말로 일본이라 국명을 쓰면서 다른 나라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 이치인가요?

    간단한 이치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역사에서 배우십시오.
    수천년 수백년 같은 땅이였지만 역사는 국가가 바뀌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국명을 새롭게 하는 것이였답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십시오.
    선사시대를 거처 고조선시대에 단군조선, 위만조선, 진국으로 나라가 바뀔때 국명을 바꾸었고, 원삼국시대에 부여, 옥저, 동예, 삼한(마한,진한,변한)으로 국명을 각 새로이했습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남북시대에는 신라와 발해로 후삼국 시대에는 신라, 후백제, 태봉(후고구려)로 통일왕조시대에는 고려, 조선, 대한제국으로 새로히 국명을 바꾸었습니다. 식민지배를 거쳐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대한민국(한국)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나라를 새워 국명을 새로이 했습니다. 한국이란 이름의 역사는 70년 나라를 잃었을때 임시정부까지 해도 90년전의 일입니다.

    같는 영토이고 결국에 같은 민족임에도 역사는 새로운 이름의 국가로 그 정체성과 기원역사를 가지고 내려오고 있는 것이랍니다.

    합기도는 일본의 무도인데 어떻게 합기도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무도라고 주장 할수 있단말인가요? 간간한 역사의 이치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도 아닐터 우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합기도와 아이기도라는 한자와 일본어의 한글발음입니다. 결국 다 한글표기이기 한자도 일본어도 아닙니다. 우리식으로 표기된 낱말을 가지고 각기 다르다고 하는건 언어자체를 이해 못하는 것이고 우리의 한글과 국어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진실 또한 거짓으로 포장 할수 없습니다. 일본의 것이 아닌 한국의 무도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면 기본적으로 이름부터 우리 무도이름으로 바꾸세요. 이 주제의 컬럼을 읽고 느낀바는 해법을 알면서도 어떤 이유에선지 핵심적 문제를 흐리고싶어 한다는 인상입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핵심을 해결하지 않고선 그 어떤 발전도 기대 할 수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해결해야할 다른 문제들도 있어보이지만 선결해야 할 것은 이름을 창명하는 것과 기술을 표준화 하는 것이 먼저인것같내요.
  • 이중성 2015/08/12 [12:06] 수정 | 삭제
  • 일본의 무명인 합기도란 이름을 변경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면 애초에 이 논란도 없는것이고 이 글도 필요없겠죠. 학자의 양심은 어디에 있는지.....
    지한재원로님이 합기도의 창명자라는 허무맹랑함은 무언가.
    아쉽게도 거짓으로라도 그렇게 포장 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진실을 담은 자료료 남아있는 지한재원로님 자신의 인터뷰와 안다는 사람은 다 안다는 합기도란 이름을 그냥(도용이라해야겠죠)쓰게된 계기말이죠.
    하루는 신문에 실린 합기도기사를 보고 지한재원로님이 최용술옹에게 기사를 보여주며 이것이 우리가 하는 무술이 맞습니까라고 물었고 최용술옹께서 맞다고 확인해주셔서 그때부터 일본의 합기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 말이죠.
    당시에도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합기도란 이름을 쓰는 것이 홍보와 운영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란 점 모르는이 몇이나 될까?
    ‘합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한재가 1955년 안동에서 도장을 열면서부터라는 필자의 주장도 당연히 합기도니 일본의 그 이름을 쓴것임을 증명하는 것이고 필자의 주장에 의하면 합기도 이름을 차용했다는 건데 그때에 지한재선생이 이름을 차용했다면 일본에 허락을 받고 빌려?어야 함인데 그도 아니다. 그냥 쓴 것이고 그냥 쓴것은 합기도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다르다고 하다보니 도용이 된 격이다.
    필자가 한자와 한글은 틀리다고 또 억지를 주장할터 지한재선생님이 도장을 개관 할때 간판, 현판, 도장정면, 도복에 [合氣道]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나온 사진자료들만 보더라도 필자의 주장은 억지이고 거짓이다.
    무술의 이름은 그 무술의 정의, 의의, 철학, 사상, 목적, 기술체계 등 모두를 함축하여 나타내는 정체성이며 그 자체이자 역사이다.

    이름을 차용했다니 어이없다. 빌려주지도 않았고 빌려달라 하지도 않고 쓴것인데 어떻게 차용인가? 말그대로 도용이다. 도용도 모자라 그 정체성과 역사를 훼손하는 것은 해서는 안된다. 더군더나 학자라면 더더욱그러하다.
  • 독자 2015/08/11 [18:47] 수정 | 삭제
  • 최용술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보고 느낀건데 합기도를 체계적으로 정립해서 발전시킨다거나 하는 것은 본인이 할일이 아닌걸로 생각하신듯 합니다 술기도 어떤체계를 가지고 전파한게 아니고 그날 그날 그냥 생각나는데로 하셨다는데 조선에서 온거니까 그냥 한번 뿌려보신것 같습니다

    이렇다할 무술이 없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이거를 할거라는건 예상 하셨을 것이고 자기는 씨앗만 뿌리고 가꾸는건 다음세대가 원하면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지한재님이 합기도라는 이름을 생각한게 아이키도를 생각해서 그런게 아니라 합기유권술이라는 이름에서 착안하셨다는 말씀이신데 합기도는 그렇다 쳐도 합기 유권술이라는 이름은 아이키도 영향을 받은게 아닐까요?

    합기라는 것은 기와 관련된 단어이고 내공을 연상케 하는 말인데 내가 배운 합기도를 기준으로 볼때 내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여간 합기도의 질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일단 단체부터 통합하는게 우선인것 같습니다

    그동안 합기도로 알려져 왔고 합기도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이름을 바꾸면 그만큼 거기에 필요한 일이 생기고 일이생기면 노력과 투자는 당연한 것인데 합기도의 발전을 위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전영만 2015/08/09 [08:08] 수정 | 삭제
  • 초등시절부터 태권도를 수련하면서 청소년기시절에는 종합체육관에서 합기도 검도까지 배웠답니다. 대학태권도전공하면서도 계속수련하고 태권도장을 개관하면서 제자들에게 합기도를 덤으로 지도했더니 주변 이아무개와 여러명의 태권도관장이 찾아와서 합기도를 못가르치게 했었답니다. 엉터리 가짜 태권도장라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덕에 도장은 날로 번창하여 주변에만 도장을 4개를 개관했었답니다. 여러도장의 수련생이 늘 1.000명을 넘었답니다. 물론 그후에 타 시도와 외국에도 개관을 했었지요. 합기도와 태권도, 킥복싱은 가장 궁합이 잘맞는 무예입니다.
  • 김순열 2015/08/09 [08:07] 수정 | 삭제
  • 합기도인의 한 사람으로 항상 감사드립니다.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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