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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백련교도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11/29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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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     ©한국무예신문
백련교도라고 하면 우선 원말의 홍건적을 연상할 것이다. 한산동은 백련교도의 신앙심을 이용해 농민기의를 일으켰고, 그것이 결국 원을 망하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청조 가경연간에 사천, 섬서, 호남에서 일어난 백련교의 기의도 있다.
 
청은 8년의 시간과 8억냥의 백은을 소모해 진압했지만, 그것을 기점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명 중기에 산서에서 일어난 백련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의 역사적 영향은 전자보다 약하지 않았다.
 
백련교도는 명과 몽고의 전략적 균형을 무너뜨렸다. 몽고군은 그들의 도움으로 북경을 포위했다. 이밖에도 그들은 막남몽고의 발전을 촉진하고 인구분포에 변화를 주었다.
 
백련교는 송대에 출현했다. 이 시기에는 종교단체라기보다는 백련사라는 비밀결사였다. 정토종과 연계가 있으나, 다양한 민간 종교를 흡수했다.
 
당시의 백련교는 세속과의 연계가 많지 않았다. 원조에 이르러 각종 모순이 드러나자, 민간으로 깊이 들어가 강력한 반항의식을 지닌 민간종교로 변했다. 원조정은 백련교를 금지했지만, 오히려 성장하다가 결국 원조를 뒤엎었다.
 
주원장은 백련교의 홍건군에 들어가 명을 세웠다. 그러나 백련교의 강한 항쟁정신이 통치에 불리하다고 판단해 금지했다. 압박과 반항이 교차되면서 백련교는 부단히 발전했다.
 
명 중기에 사회적 모순이 격화됐다. 강자의 토지겸병으로 농민들은 땅을 잃었다. 겸병한 토지에 대한 부세는 다른 농민이 부담했다. 관이 민의 반란을 부추긴 셈이다.
 
백련교가 농민에게 파고들었다. 산서와 대동은 백련교의 온상이었다. 대규모의 명군이 주둔했지만 가족들은 백련교의 선동에 쉽게 넘어갔다. 가족을 통해 백련교에 가입한 군인도 적지 않았다.
 
대동 주변에서 백련교가 성행하자 놀란 조정은 현지 백련교의 수령 여명진 등을 살해했다. 그의 제자인 구무와 조전은 장성을 넘어 몽고 알탄칸에게 도망쳤다.
 
알탄의 세력은 대칸을 위협할 정도였다. 가정 중엽, 알탄칸은 백련교도의 도움을 받고 북경을 포위했다. 백련교도는 명의 북방방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알탄칸은 백련교도의 도움으로 공성용 기계를 제조했다.
 
몽고군은 취약지점으로 침입해 약탈을 자행한 후 돌아갔다. 백련교도에 대한 명조정의 증오가 극심했던 것은 그들이 알탄칸을 도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몽고의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어 몽고군에게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백련교도를 잡기 위해 조정은 고심했다. 자객까지 잠입시켰지만 성과는 없었다. 조정은 천냥의 현상금과 관직까지 걸었다. 명의 관리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정제가 죽고 융경제가 즉위했다. 알탄칸은 새로운 황제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 그는 조전의 종용을 받아 6개 노선을 나누어 산서를 침범했다. 몽고군은 전투력이 강했다. 명군은 방어능력만 있었지 공격할 수는 없었다.
 
조전은 태원 일대를 점령하면 남북분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알탄칸은 조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물자확보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알탄칸의 손자 바하나기가 명에 투항한 것이다.
 
조전은 바하나기를 돌아오게 하려면 군사적 압력뿐이라고 건의했다. 명은 왕숭고의 주장에 따라 바하나기와 백련교도를 교환하고, 무역을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알탄칸은 변의 변경을 침략했다. 쌍방은 강화에 들어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역사상 유명한 융경화의이다.
 
바하나기와 백련교도 지도자 조전을 교환하고 국경 일대에서 무역이 재개됐다. 참수된 조전의 수급은 사방에 전시됐다. 몽고로 도망쳤던 대부분의 백련교도는 현지에 남아 농사를 지었다. 몽고인들은 백련교도로부터 주택건설과 농업을 익혀 정주생활을 시작했다. 알탄칸은 백련교도에게 궁전건설을 맡기고 의약과 수공업을 익혔다. 대막 이남에서 몽고인과 한족의 혼거지역에 확산됐다.
 
정치적 압박과 종교는 반비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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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29 [04:35]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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