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특집] 한자(漢字)가 새긴 전쟁 ④ : 일본이 재구성하고 한국이 전유한 무도무예(武藝)·무술(武術)·무도(武道), 한중일 삼국이 쟁탈한 언어적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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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예(武藝)·무술(武術)·무도(武道), 한중일 삼국의 언어적 영토 쟁탈전을 형상화한 이미지. ©한국무예신문 |
【핵심 요약】
이번 4회의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일본의 무도는 고대부터 변함없이 이어진 자연적 전통이라기보다, 전근대 무사 계급의 기술 전통을 바탕으로 메이지 이후 근대 국민국가의 교육·체육·군사 체계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된 신체 문화로 볼 수 있다. 1895년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 설립, 가노 지고로의 유도 창시, 術에서 道로의 언어적 전환은 이 재구성의 핵심 장면들이다.
둘째, 식민지 조선에서 무도는 학교·경찰·군사 훈련과 결합하며 신체 규율과 황국신민화의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 작동 방식의 핵심은 직접적 강제만이 아니라, 수련과 예법을 통해 규범을 몸에 익히게 하는 내면화의 구조였다. 다만 조선 무예인들은 이를 일방적으로 강요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기술과 제도를 습득하고 이후 전유의 가능성을 축적했다.
셋째, 해방 이후 한국 무예계는 일본 무도의 제도와 기술을 단순히 청산하거나 그대로 계승하지 않았다. 태권도와 합기도는 그 복잡한 전유의 역사 위에서 형성되었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계보와 정체성의 언어 전쟁을 치르고 있다. 특히 합기도의 계보 논쟁은 전유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현재진행형 사례다.
道라는 글자는 아름답다
道라는 글자는 아름답다.
노자의 도는 만물의 근원이자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절대적 원리다. 공자의 도는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윤리적 길이다. 선종의 도는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여정이다. 道라는 글자 안에는 동아시아 수천 년의 철학적 사유가 압축되어 있다.
바로 그 아름다움이 문제였다.
근대 일본은 이 글자의 도덕적 권위와 정신적 무게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봉건 무사 계급의 전투 기술을 근대 국민국가의 신체 훈육 장치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術의 언어를 道의 언어로 전환했다.
유술은 유도가 되었다.
검술은 검도가 되었다.
궁술은 궁도가 되었다.
기술은 수양이 되었고, 수양은 국민의 규범이 되었다. 道라는 글자는 신체 기술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고, 근대적 재구성을 오랜 전통의 자연스러운 연속처럼 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형성된 무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복종의 언어로도 작동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무예인들은 그 언어를 단순히 거부하지 않았다. 해체하고, 비틀고, 재조립했다. 때로는 식민의 도구였던 제도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국가의 신체 언어를 만들었다.
이것이 전유의 역사다.
전유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전유는 단순한 청산도 아니다.
전유는 남의 틀을 가져와 다른 목적과 정체성으로 다시 세우는 복합적 행위다.
그러나 전유의 역사는 승리의 서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유가 무엇을 얻었는지와 동시에, 무엇을 대가로 치렀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道의 원류와 전용
무도(武道)를 이해하려면 먼저 道라는 개념이 무예의 세계에 어떻게 결합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道는 본래 무(武)의 전용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과 윤리, 수양과 깨달음의 언어였다.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특정 기예에 道를 붙이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화도(華道), 다도(茶道), 서도(書道)처럼 예술적 수련에 道를 결합해 단순한 기술 이상의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 문법이 무예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 일본의 무예는 주로 術의 언어로 불렸다. 검술, 유술, 창술, 궁술. 이 접미어들은 기술의 언어, 숙련의 언어였다. 그것은 무사 계급의 직업적 기술이었고, 특정 도장과 유파를 통해 사제 관계로 전수되는 전문 지식이었다.
따라서 術에서 道로의 전환은 단순한 말 바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을 국민의 윤리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특정 계급의 전투 기술을 전체 국민의 수련 체계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봉건의 몸을 근대 국가의 몸으로 재편하는 작업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무도라는 말의 힘과 위험이 동시에 발생한다.
메이지의 기획 — 만들어진 전통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을 봉건 막부 체제에서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무사 계급은 법적·사회적으로 해체되었다. 1876년 칼 착용 금지령(廢刀令)이 선포되었고, 봉건적 주종 관계는 근대적 국민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검술·유술·궁술 등의 신체 기술 체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을 특정 계급의 낡은 유산으로 남겨두는 것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균일한 질서와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폐기하기도 어려웠다. 무사 계급의 기술은 일본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독자적 신체 문화였고,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메이지 국가의 해법은 전환이었다. 무사 계급의 기술을 국민 전체가 공유하는 신체 이념으로 재편하는 것. 이 기획의 제도적 기반이 된 것이 1895년 설립된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였다. 이 조직은 전국의 무술 유파를 통합하고, 무도를 국민 교육과 군사 훈련의 체계 안으로 편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가 1882년 유술을 재편해 유도(柔道)를 창시한 것은 이 전환의 상징적 장면이다. 그가 유도를 단순한 격투 기술이 아니라 두 가지 원리를 추구하는 수련 체계로 제시한 것은 의도적 기획이었다.
정력선용(精力善用, 세이료쿠 젠요): 심신의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타공영(自他共榮, 지타 교에이): 자신과 타인이 함께 번영하는 것.
이 두 원리는 보편적 도덕 언어였다. 특정 계급의 유술이 아닌 전 인류의 수련 체계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였다. 가노는 일부러 유도술(柔道術)이 아니라 유도(柔道)라고 이름 붙였다. 術을 버리고 道를 택함으로써 이 기술이 단순한 싸움의 방법을 넘어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이 패턴은 반복되었다. 검술은 검도가 되었고, 궁술은 궁도가 되었다. 각 종목은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동시에, 인격 수양과 국민 훈육의 이념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학교와 경찰, 군대와 청년 조직을 관통하는 제도적 체계 속으로 무도가 편입되었다.
이 점에서 일본 무도는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고대의 전통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전근대 무사 계급의 기술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근대 국가가 필요에 따라 과거의 기술을 재해석하고 제도화한 기획의 산물이다. 道라는 글자의 도덕적 권위는 이 재구성 과정을 정당화하고, 그 인위성을 전통의 자연스러운 연속처럼 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것처럼 보이는 전통이 실은 근대의 특정 시점에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일 수 있다. 일본 무도는 이 역설의 가장 정교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식민지 조선의 道 — 복종의 길, 그리고 내면화의 장치
이렇게 재구성된 무도는 식민지 조선으로 이식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무도 체계를 조선 사회에 확산시켰다. 유도와 검도는 학교 체육 과정과 경찰·군사 훈련의 영역에 들어갔다. 도장이 세워졌고, 단과 급의 체계가 도입되었다. 1915년을 전후해 조선 각지에서 무도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했고, 경찰관 채용에서 유도 단증이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이 확산은 단순한 체육 활동의 보급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황국신민을 길러내기 위한 신체 규율의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 핵심을 짚어야 한다.
근대 국가는 인간의 몸을 직접적인 강제만으로 통제하지 않는다. 더 효율적이고 더 깊이 파고드는 방식은, 몸이 스스로 규범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칼을 휘두르는 행위는 도덕의 외피를 입었다. 신체 기술은 인격 수양이 되었고, 수련의 반복은 질서의 내면화가 되었다. 수련장에 들어서며 예를 갖추고, 스승과 위계에 복종하며, 반복 훈련을 통해 규범을 몸에 새기는 과정. 道를 통한 인격 수양의 서사. 이 모든 것이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길러내는 문화적 기제로 기능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강제보다 자발적 훈육이, 외부의 명령보다 내면화된 규범이 더 깊이 작동한다. 식민지기 무도의 道는 수양의 길이기 이전에 복종의 길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복종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더 복잡하게 작동했다.
다만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조선 무예인들이 일본 무도를 일방적으로 강요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유도와 검도, 공수도 등의 제도와 기술 체계를 습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이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축적했다. 일본 유단자 자격을 취득한 조선인 무예인들은 해방 이후 그 기술적·제도적 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 무예의 기반을 세우는 주체가 되었다.
지배의 도구를 몸으로 익히면서, 그 안에서 저항과 전유의 씨앗이 자라나는 역설적 과정이 식민지 무예 공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 전유의 시작, 그리고 분열의 시작
1945년 해방은 한국 무예계에 근본적 재편의 과제를 안겼다.
일본 무도의 제도와 기술 체계를 그대로 계승할 것인가.
완전히 청산할 것인가.
현실은 이 이분법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해방 직후 한국 무예계는 혼돈 속에서 재편을 시작했다. 일본 유학이나 도장 경험을 통해 무도를 익힌 무예인들이 각자 관(館)을 설립했다. 청도관, 송무관, 무덕관, 오도관, YMCA 권법부 등 여러 관이 경쟁하며 난립했다.
이 분열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기술을 중심에 두는가, 어떤 역사 서사를 채택하는가, 누구의 계보를 정통으로 인정하는가. 이 경쟁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한국 무예계의 언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 무예인들은 일본에서 배운 기술과 제도적 틀을 토대로 삼으면서, 거기에 전혀 다른 정체성의 서사를 입히기 시작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박도, 신라 화랑도의 무예 수련, 조선의 수박과 택견의 전통. 민족 무예의 기억이 호출되었다.
이 재편 과정의 핵심 과제는 하나였다.
일본 무도의 형식과 제도적 요소 일부를 참조하되, 그것이 일본의 것이 아니라 한국의 신체 언어로 다시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일. 식민의 흔적을 지우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의 무예를 창조하는 일.
이것이 전유였다.
전유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전유는 단순한 청산도 아니다.
전유는 남의 틀을 가져와 다른 목적과 정체성으로 다시 세우는 복합적 행위다.
그러나 전유는 언제나 위험하다. 가져온 틀을 바꾸는 데 성공하면 새로운 창조가 되지만, 그 틀에 갇히면 또 다른 종속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태권도 — 전유의 성취, 그리고 올림픽화가 치른 대가
태권도는 이 전유의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1955년 태권도라는 이름이 공식화되기 이전, 한국의 공수도·당수도 도장들은 기술적으로 일본 가라테와 상당 부분 겹쳐 있었다. 도장 제도와 급단 체계, 수련 방식과 형의 구조까지, 일본 무도의 제도적 틀이 한국 무예의 초기 형성에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었다. 한국 무예인들은 이 골격 위에 전혀 다른 서사를 덧입혔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박도, 신라 화랑도의 무예 수련, 조선의 택견과 수박의 전통. 태권도는 일본 가라테의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전통 무예가 근대적으로 계승된 것이라는 역사 서사를 구축해 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이름 바꾸기가 아니었다. 포장지만 교체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의 제도 파편을 활용하면서 전혀 다른 목적과 정체성을 가진 구조물을 세우는 복합적 작업이었다.
냉전의 국제 질서, 반일 민족주의의 정치적 동력, 국군과 경찰 체계를 통한 제도화,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해외 보급. 이 모든 요소가 결합하면서 태권도는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신체 언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최홍희(崔泓熙) 장군이 중심이 된 국제태권도연맹(ITF)과 대한태권도협회를 모체로 한 세계태권도연맹(WTF) 사이의 분열은 태권도의 정통성과 세계화 전략을 둘러싼 또 다른 언어 전쟁이었다. 이 분열은 태권도가 하나의 종목이 되기 이전에 이미 복수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시범 종목,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 이것은 전유의 성취다.
그러나 이 승리의 서사와 함께 불편한 질문도 끌어안아야 한다.
올림픽 종목이 되는 과정에서 태권도는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규칙과 점수 체계를 갖추었다. 경기는 명확해졌고, 대중화는 쉬워졌으며, 국제 보급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떤 몸짓은 중심이 되었고, 어떤 몸짓은 주변으로 밀려났는가. 겨루기의 경기화는 태권도의 세계화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무도적 수련과 전통적 몸의 감각을 약화시킨 측면은 없었는가. 품새와 겨루기, 호신과 수련, 도장 교육과 올림픽 스포츠 사이의 균형은 충분히 유지되고 있는가.
전유는 성공했다. 그러나 전유 이후의 제도화는 다시 새로운 질문을 낳았다.
태권도는 일본 무도의 형식을 전유해 한국의 세계 종목으로 성장했다. 이제 태권도는 자기 안에서 다시 몸의 다양성과 수련의 깊이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합기도 — 계보 논쟁이라는 언어 전쟁
합기도는 태권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유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합기도의 기원 서사는 최용술(崔龍述, 1904~1987)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던 시절 대동류 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의 창시자 다케다 소가쿠(武田惣角, 1859~1943)에게 사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45년 귀국 후 대구에서 자신이 익힌 기술을 합기유술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후 지한재(池漢載) 등의 제자들이 이 기술 체계를 발전시키며 합기도라는 이름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 계보 서사는 논쟁의 대상이다.
일본 측 기록에서 최용술이 다케다 소가쿠의 정식 제자였다는 증거는 불분명하다. 다케다 소가쿠가 남긴 방명록이나 수련 기록에 최용술의 이름이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일본과 국제 무예사 연구 쪽에서 제기되어 왔다. 반면 한국 합기도계 내부에서는 이 계보를 정통의 근거로 삼는다.
이 논쟁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용술이 귀국 후 가르친 기술이 대동류 계통의 관절기와 유사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보의 공식 여부와 무관하게, 기술적 영향 관계는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합기도를 일본 대동류나 아이키도의 복사본으로 규정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지한재를 비롯한 이후 세대의 수련자들은 발차기와 타격, 무기술, 낙법 등을 흡수하며 기술 체계를 독자적으로 확장했다. 여러 창시자와 도장 계열, 지역별 전승과 현대적 응용이 결합하면서 한국 합기도는 일본 아이키도와 실질적으로 다른 수련 체계로 발전했다.
여기서 핵심은 이것이다.
계보 논쟁 자체가 이미 하나의 언어 전쟁이다.
"우리의 기원은 독자적이다"와 "너희는 일본 것을 가져온 것이다"의 대립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어떤 계보 서사를 공인하느냐에 따라 합기도가 한국 무예인지, 일본 무예의 변형인지가 결정된다. 이름의 주도권, 기원의 주도권, 역사 서술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이 합기도 계보 논쟁의 실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과 무관하다"는 단절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대로 일본 계통의 영향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합기도의 정체성은 설명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언어다.
어떤 기술 요소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제도적 형식이 어떻게 변형되었는가.
한국의 도장 현장과 수련 문화가 무엇을 새롭게 만들었는가.
한국 합기도가 일본 아이키도와 실질적으로 어떻게 다르고, 그 다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 단순 부정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않으면, 합기도의 전유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합기도는 전유의 미완성 과제를 보여주는 현재진행형 사례다.
태권도가 올림픽이라는 세계 무대에서 자기 이름을 강하게 각인시켰다면, 합기도는 아직도 이름과 계보, 제도와 대표성의 문제를 더 깊이 정리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한국 합기도의 과제는 일본적 흔적을 단순히 지우는 데 있지 않다. 그 흔적을 정확히 읽고, 그 위에 한국적 재구성의 실제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데 있다. 계보를 증명하려는 싸움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새롭게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싸움이어야 한다.
무도의 전유가 남긴 제도
일본 무도의 영향은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영향은 제도에 있었다.
도장.
급과 단.
사범과 제자.
예법과 복장.
수련 순서와 승급 심사.
전국 단체와 중앙 본부.
국가대표와 국제 연맹.
이런 제도적 형식들은 해방 이후 한국 무예계의 형성에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다. 물론 한국 무예계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교육 체계, 군대 문화, 민족주의, 스포츠 행정, 해외 보급 전략과 결합시켜 새롭게 운용했다.
하지만 제도의 언어는 강하다.
한번 만들어진 승급 체계는 몸을 일정한 단계로 나눈다. 중앙 본부는 각 도장의 다양성을 관리 가능한 단위로 만든다. 단증은 수련자의 성취를 증명하지만, 동시에 권위를 독점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예법은 수련의 질서를 세우지만, 때로는 비판 없는 복종을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이 무도 제도의 양면성이다.
제도는 전승을 돕는다.
그러나 제도는 몸을 길들일 수도 있다.
질서는 수련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질서는 때로 다양성을 억누른다.
한국 무예계가 일본 무도의 제도적 형식을 전유했다면, 이제 그 제도가 한국 무예의 몸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전유는 끝난 사건이 아니다.
전유 이후에도 제도는 계속 몸을 만든다.
무도에 맞설 말은 반일이 아니라 무예다
일본 무도의 역사를 읽는 목적은 반일 감정을 반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너무 쉽다.
일본 무도는 식민지 조선에서 신체 규율의 장치로 활용되었다. 이 사실은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국 무예의 미래가 열리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한국 무예계는 일본 무도의 기술과 제도, 예법과 단급 체계, 도장 문화의 일부를 경험했고, 그것을 해방 이후 다른 방향으로 재구성했다. 그 과정에서 태권도라는 세계적 종목이 탄생했고, 합기도를 비롯한 여러 한국 무예가 성장했다.
따라서 한국 무예가 일본 무도에 맞서야 한다면, 그 방식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어야 한다.
무도에 맞설 말은 반일이 아니라 무예다.
무예는 더 넓은 말이어야 한다. 무도만을 배척하는 말이 아니라, 무도까지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일본의 道를 비판하면서도, 한국의 藝가 품은 문헌과 몸, 기술과 수양, 관과 민의 이중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무예 담론은 일본 무도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그 안에 담긴 근대 국가의 기획을 읽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작동한 신체 규율을 읽어야 한다. 해방 이후 한국 무예계가 그것을 어떻게 전유했는지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유가 오늘날 어떤 제도와 몸을 남겼는지도 읽어야 한다.
반일은 감정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담론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예는 그보다 더 커야 한다.
한국 무예의 전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한국 무예계는 일본 무도의 흔적을 단순히 지우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와 바꾸고, 다른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정체성 안에서 다시 조직했다.
그 결과 태권도는 세계의 종목이 되었다. 합기도는 한국적 종합 무예의 한 흐름으로 성장했다. 유도와 검도 역시 한국 사회 안에서 별도의 제도와 선수층, 수련 문화를 형성했다.
그러나 전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유는 이름을 바꾸는 순간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유는 계속되는 해석이다. 제도 속에서 반복되는 몸의 문제다. 어떤 전통을 호출하고, 어떤 몸짓을 중심에 세우며, 어떤 역사를 가르치고, 어떤 계보를 침묵시키는가의 문제다.
태권도는 아직도 묻고 있다.
나는 무도인가, 스포츠인가, 무예인가.
나는 올림픽 종목인가, 한국의 신체 문화인가.
나는 경기장 위의 발차기인가, 도장 안의 수련인가.
나는 세계화된 브랜드인가, 살아 있는 몸의 전승인가.
합기도도 묻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그 기원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나는 계보 논쟁에서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가 새롭게 만든 것을 설명하는 싸움을 하고 있는가.
나는 한국 무예라는 상위 담론 안에서 내 자리를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한 질문을 피하면 전유는 신화가 된다. 전유를 신화로 만들면, 역사는 다시 권력의 언어가 된다.
한국 무예는 신화가 아니라 해석을 선택해야 한다.
Budo 이후의 Muye
일본은 Budo라는 이름을 세계에 심었다.
유도, 검도, 가라테, 아이키도는 세계 곳곳에 도장을 만들었고, 일본의 신체 문화는 예법과 정신 수양의 이미지로 국제화되었다. Budo는 단순한 종목명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상위 언어가 되었다.
한국에는 태권도가 있다. 그러나 태권도 하나만으로 한국 무예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에는 《무예도보통지》가 있고, 씨름과 택견이 있으며, 합기도와 수많은 현대 무예 현장이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말이 필요하다.
그 말이 무예다.
Muye는 Budo의 단순한 대응어가 아니어야 한다. Muye는 일본 무도를 부정하기 위한 말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Muye는 한국의 문헌과 민중의 몸, 전통과 현대, 경기와 수련, 제도와 자유를 함께 담는 상위 언어가 되어야 한다.
Budo가 術에서 道로의 전환을 통해 기술을 수양의 길로 재구성했다면, Muye는 藝를 통해 기술과 몸, 기록과 전승, 교양과 실천을 함께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Budo 이후의 언어가 아니라, Budo보다 더 오래되고 더 넓은 언어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무도 이후의 언어는 반무도가 아니다.
무도 이후의 언어는 무예다.
다음 회 예고
제5회, 최종회에서는 이 모든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 무예가 서야 할 세 개의 전선을 제시한다.
중국은 Wushu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세계의 언어로 만들었다. 일본은 Budo라는 이름으로 무도를 세계의 정신 수양 언어로 제도화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Muye라는 이름을 어떻게 세계의 언어로 세울 것인가.
한국에는 태권도라는 세계적 자산이 있다. 《무예도보통지》라는 문헌적 자산이 있다. 씨름과 택견이라는 민중 신체의 전통이 있다. 합기도와 수많은 한국 무예 종목의 현장이 있다.
그러나 자산만으로 언어적 영토가 확보되지는 않는다.
최종회는 한국 무예가 가동해야 할 세 개의 전선을 다룬다.
기록 외교.
K-컬처 전략.
민중 신체의 복권.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언어적 영토를 얻는 일과 몸의 영토를 지키는 일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