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초, 두 사람이 설악산에 올랐다.
박대양 문주와 육태안 사범이었다. 수년째 "때가 되면 가자"며 미뤄온 약속이었다. 박대양 문주가 기천(氣天)을 수련했다는 바로 그 장소, 스승과 함께 땀을 흘렸다는 그 산속 어딘가를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설악산에 도착한 박대양 문주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말했다.
"산이 변해서 찾지 못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왔다. 육태안 사범은 기천문을 떠났다.
[기천(氣天)의 시작 · 박대양과 육태안]
기천은 박대양(朴大陽, 본명 박정용) 사부가 우리나라 전래 무예로 소개하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단전호흡과 칠보절권(七步折拳) 수련에서 나오는 기(氣)로 병든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이 박대양 사부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육태안(陸泰安) 사범이 신당동 기천 도장의 사범이 되면서 기천의 모습이 달라졌다. 중앙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나온 엘리트였던 그는 기천을 씨름·택견과 같은 우리 전통무예로 확신했다. 이소룡의 정무문(精武門)이 무예의 통합과 계승을 추구했듯, 기천도 그런 이름과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뜻으로 명칭을 기천에서 기천문(氣天門)으로 바꾸고 박대양을 문주(門主)로 지칭하게 됐다.
육태안 사범은 칠보절권을 바탕으로 천연수·천라수·천용수 등 기천문의 품새들을 발굴해 체계를 세웠다. 단순한 무예 수련이 아니라 전통 무예로서 기천문의 골격을 만들어낸 것은 육태안 사범의 공이었다.
그러나 도장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신당동 도장 문은 닫혔다. 육태안 사범은 자신의 중곡동 자택을 기천문 도장으로 열었다. 자택을 내준 것으로 모자라, 후배 변치호 사범의 매형이 운영하는 의류매장 부장으로 출근하며 기천문 운영 경비를 벌었다. 박대양 문주의 생활비도 매달 지급했다. 기천문이 흔들리지 않도록, 박대양 문주가 기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밀한 부분까지 챙긴 것이 육태안 사범이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면서 단 한 가지를 요청했다. 박대양 문주가 수련했다는 장소, 스승이 있다는 그 산속을 직접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기천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무예학자가 아니라 무예인으로서 당연한 요구였다.
그 요청이 수차례 반복됐다. 박대양 문주는 수차례 "때가 되면"으로 답했다.
그리고 1982년 초, 마침내 설악산에 올랐다. 돌아온 대답은 "산이 변해 찾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육태안 사범은 기천문을 떠났다. 그 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우리 전통무예를 찾아다닌 끝에 수벽치기(手壁-)를 발굴했다. 지금 그는 수벽치기 전수자로서 전통무예 최전선에 서 있다. 수년 전 박대양 문주의 부고를 듣고 제자로서 문상을 했다는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준다.
[김정호와 기천문 · 침술 학원에서 시작된 인연]
김정호가 기천문을 알게 된 것은 의외의 경로였다.
스페인의 김영구 대사범으로부터 조언이 왔다. 스페인에서 활동하려면 침술(鍼術)을 익혀두는 것이 유용하다는 말이었다. 김정호는 종로의 중앙침술학원에 등록해 침술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 배움의 과정에서 기천문의 기치료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박대양 문주를 찾아갔다. 문주는 말했다. 기치료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단전의 기에서 나온다. 단전을 키우는 것은 단전호흡과 칠보절권 수련에서 나온다. 김정호는 기천문 수련을 시작했다. 육태안 사범의 중곡동 자택에서 박대양 문주로부터 직접 사사를 받았다.
그리고 1982년, 오랜 친구 나한일에게 기천문을 소개했다.
[약수동 5층 · 나한일과 박대양의 만남]
육태안 사범이 기천문을 떠난 뒤, 중곡동 자택 도장으로 나올 수 없게 된 박대양 문주에게 새 공간이 필요했다. 김정호가 나섰다. 장충체육관에서 약수동 3거리를 관통해 동호대교로 신설되는 도로 공사로 인해 철거 대상이 된 약수동 3거리 7층 건물이 있었다. 건물주인 심 이사를 설득했다. 철거 전까지만 사용하겠다는 조건으로 5층을 얻어 기천문 도장으로 열었다.
이 무렵 김정호는 김영구 대사범의 초청으로 스페인 출국을 준비 중이었다. 떠나기 전 친구 나한일을 박대양 문주에게 소개하고, 기천문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나한일은 움직였다. KBS 방송인으로서 연예계 인맥을 십분 활용했다. 연예인 양택조, 방송인 이원춘, 이장호 영화감독, 배우 장미희, 가수 박상규 등 방송국 안팎의 인사들에게 기천문을 소개했다. 박대양 문주의 기치료 능력이 입소문을 탔다.
[GK 김우철 회장 · 3천만 원의 시작]
그 입소문이 한 사람의 귀에 닿았다.
양택조였다. 양택조는 친구인 영진영화사 김원우 사장을 찾아갔다. 김원우 사장의 친형 GK 김우철 회장의 차남 김영근이 소아마비 증상을 안고 태어나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재벌인 아버지 김우철 회장은 아들을 정상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나라에 치료를 의뢰하는 중이었다. 동생 김원우 사장에게 아들 김영근을 치료차 한국으로 보낸 참이었다.
"박대양 문주가 치료할 수 있다."
양택조의 말에 김원우 사장이 움직였다. 박대양 문주는 치료를 위한 도장 설립이 먼저라고 했다. 영진영화사는 3천만 원을 투자했다.
[서초동 계약 · 명의 분쟁]
1982년 5월, 김정호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그러나 두 달 만에 돌아왔다. 타국이 아닌 종주국 한국에서 해동검도를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982년 7월 24일, 경기도 안양에 해동검도 도장을 열었다.
그해 10월, 친구 나한일이 안양 도장을 찾아왔다. 기천문 도장 자리를 함께 찾아보자고 했다. 김정호는 서초동에 도장 자리를 계약했다. 전세 2,700만 원은 영진영화사 명의로, 나머지 300만 원은 시설비와 간판 비용으로 썼다. 계약을 마친 김정호는 안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한일이 박대양 문주를 만나자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서초동 도장 계약 명의를 내 이름으로 바꿔주지 않으면 김영근 치료를 하지 않겠습니다."
나한일과 양택조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김정호가 박대양 문주를 직접 설득했다. 김영근은 아직 치료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고, 치료 결과도 확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명의를 먼저 요구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고 했다. 치료 성과를 먼저 보여주면 김원우 사장은 3천만 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례를 할 분이라고도 했다.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박대양 문주의 대답은 하나였다. 명의를 자신에게 달라.
김정호는 친구 나한일에게 기천문을 소개한 것을 후회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12월의 치료 · 그리고 한 달 만의 귀국]
결국 치료는 시작됐다. 1982년 12월 1일부터 김영근은 여의도 김원우 사장 자택에서 영진영화사 차량을 타고 서초동 도장으로 매일 출근했다. 나한일이 치료 사범으로 몸 자세를 잡는 운동요법을 진행했다.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12월 말, 김영근은 아무 말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심검도에서 해동검도로 · 제2도장의 탄생]
1983년 1월, 나한일은 기천문 간판 대신 심검도 간판을 달고 도장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두 달을 버티지 못했다. 방송 일과 도장 운영을 동시에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한일이 친구 김정호를 찾아왔다. 조건 없이 도장을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김정호는 안양 도장 운영도 벅차다고 했다. 나한일이 답했다. 안양은 최 사범에게 맡기면 되지 않겠느냐.
기천문 소개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김정호는 단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심검도 도장이 아니라 해동검도 도장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한일은 심검도 도장으로 남기길 바랐지만, 김정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해동검도 아니면 안 됩니다."
나한일도 수긍했다. 그렇게 서초동 제2 해동검도 도장이 탄생했다.
[기천문의 이후 · 계룡산까지]
기천문은 제2대 문주를 거쳐 박사규 제3대 문주에게 이어졌다. 이태원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박사규는 기천문의 후원회장 역할을 하며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석촌호수 근방에 5층 건물을 신축해 1개 층을 기천문 본관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사업이 부도났다. 건물도 무산됐다. 박사규 문주는 그 아픔을 딛고 계룡산에 기천문 본관을 세워 지금도 산중 무술 기천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마무리 · 길은 막힌 곳에서 열렸다]
설악산에서 수련터를 찾지 못했다고 했던 박대양 문주. 3천만 원 명의를 요구했던 기천문.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김영근. 그 모든 꼬임 속에서 서초동 도장이 해동검도 제2도장이 됐다.
"기천문에 소개했던 것이 친구 나한일한테 미안했지요. 그런데 그 도장이 결국 해동검도 도장이 됐습니다. 막힌 길이 다른 길을 열었습니다." — 김정호 총재 구술 (2026)
[인물 정보]
박대양(朴大陽, 본명 박정용) 문주 — 기천 창시자. 단전호흡·칠보절권·기치료를 핵심으로 삼음. 이후 작고.
육태안(陸泰安) 사범 — 중앙고·고려대 출신. 기천문 체계 정립. 설악산 확인 후 기천문 이탈. 수벽치기 발굴·전수.
박사규 — 기천문 제3대 문주. 이태원 의류 사업가. 1997년 IMF 이후 계룡산에 기천문 본관 설립.
나한일(羅漢一) — 서라벌고교 16회. 김정호의 친구. KBS 방송인·심검도 총관장. 기천문 연예인 홍보 기여. 서초동 도장을 조건 없이 김정호에게 이양.
김원우 사장 — 영진영화사 작가 겸 사장. 기천문 도장 설립에 3천만 원 투자.
GK 김우철 회장 — 김원우 사장의 친형. 차남 김영근의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파견.
김정호(金正鎬) 총재 — 서라벌고교 16회. 심검도 시범 주역. 1982년 친구 나한일에게 기천문 소개. 1982년 7월 24일 안양 해동검도 창립. 서초동 심검도 도장을 해동검도 제2도장으로 인수. 이 연재의 구술자.
다음 회 → 제8회 — 1982년 7월 24일, 안양. 수련생 한 명 없이 문을 연 도장에 중앙시장 상인 대표가 기세등등하게 찾아왔다. 85킬로그램 체중을 자랑하던 그 사람이 의자에서 2미터 뒤로 밀려난 그 순간부터 해동검도의 역사가 시작됐다. 「1982년 7월 24일, 안양 — 목검 하나로 시작된 도장」
※ 이 글은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의 구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인물의 경력과 사건 경위는 구술자의 기억과 제보에 근거하며, 각 회차는 김정호 총재의 사전 확인을 거쳐 게재합니다.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부분은 향후 보완 예정입니다. 아울러, 등장 인물 중 일부는 당사자의 요청 또는 편집상의 필요에 따라 실명 대신 예명을 사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저작권자 ⓒ 한국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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