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劍과 길] 제8회 : 1982년 7월 24일, 안양 — 목검 하나로 시작된 도장해동검도 창립 · 명동 물랑루즈 · 상인 대표와 의자 시범
수련생이 없었다. 목검 하나뿐이었다. 1982년 7월 24일 오전, 경기도 안양시 중앙시장 상가 2층. 작은 공간에 간판을 달고 문을 열었다. '海東劍道.' 훗날 182개국에 보급될 그 무예의 첫날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시작됐다.
1982년, 한국은 전두환 정권 2년 차였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지 한 해가 지났고, 컬러 TV가 안방으로 밀려드는 시대였다. 무술은 붐이었다. 이소룡의 영화가 아직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었고, 전국 골목마다 태권도와 합기도 도장 간판이 내걸렸다. 공원에서 발차기 시연을 하면 구경꾼이 몰려드는 시절이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한 청년이 '검도'를 들고 나왔다. 문제는 이름이었다. '검도'는 이미 대한검도회가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명칭이었다. 대한검도회는 일본 겐도(剣道)의 한국식 이름이었고, '검도'라는 글자 자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다. 해동검도 — 이름만으로도 싸움이 예고된 그 무예는, 싸움 전에 먼저 존재해야 했다. 도장 문을 여는 것이 먼저였다.
■ 1982년 6월, 명동 물랑루즈
안양 도장 문을 열기 한 달 전, 서울 명동에서 사건이 있었다.
스페인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김정호를 위한 환영식이 물랑루즈에서 열렸다. 고향 예산 선배들과 무예 동지들이 자리를 채웠다.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기도(キャバレー) 직원 여덟 명이 일제히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술 마시려면 우리 룰이 있습니다."
억지 시비였다. 귀국 환영 자리에 찬물을 끼얹는, 이유를 댈 수 없는 위협이었다. 직원 한 명이 먼저 손을 뻗었다.
김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로 반탄권(反彈拳)을 썼다. 그 다음엔 천강권(天降拳). 몸을 비틀고, 막고, 쳐냈다. 여덟 명이 상대였다. 40분이 걸렸다. 테이블이 뒤집혔고, 유리잔이 깨졌다. 명동 거리 한복판에 소란이 일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다. 김정호는 중부경찰서 유치장으로 갔다. 귀국 환영식의 마무리가 그랬다.
전화가 온 것은 다음 날이었다. 경향신문의 김성주였다. "내가 형사한테 말해놨어." 그 한 마디에 유치장 문이 열렸다. 이름 하나, 안면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시절이었다.
스페인에서 세계를 봤다. 귀국하자마자 유치장을 봤다. 그래도 도장을 열어야 했다.
■ 1982년 7월 24일
안양시 중앙시장 상가 2층, 작은 공간이었다. 넓지 않았다. 도구도 없었다. 호구도, 운동복도 갖춰지지 않았다. 목검 한 자루뿐이었다.
간판을 걸었다. 해동검도(海東劍道). [편집자 주] 1982년 7월 24일 안양에서의 해동검도 창립에 관해서는 현재 무예 역사학계 내에서 이견이 존재한다. 나한일 한국해동검도협회 총재는 당시 활동이 심검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연재는 김정호 총재의 구술에 따른 기록임을 밝힌다. 본지는 향후 관련 사료 및 당사자 양측의 입장을 추가 취재해 보완할 예정이다.
개관 당일 수련생은 없었다. 전단지를 돌린 것도 아니었다. 홍보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문을 열었다. 7월 한여름 오전, 텅 빈 도장에 김정호 혼자 서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중앙시장 상인 대표가 찾아왔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몸무게 85킬로그램, 시장 통에서 힘 좀 쓴다는 이가 기세를 잡고 들어섰다. 눈빛부터 위협적이었다. 시장 안에 새로 들어선 도장이 마땅치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한번 시험해보자는 것인지. 뚜렷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검도? 여기서 뭘 가르친다는 거요?"
김정호는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한번 앉아보시겠습니까."
상인 대표는 어깨를 쫙 펴고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김정호가 움직였다. 기술은 한 번이었다. 상인 대표는 의자째 2미터 뒤로 밀려났다.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조용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나갔다.
다음 날부터 수련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상인 대표가 직접 시장 주변에 알리고 다녔다는 말이 나중에 들렸다. "그 도장, 진짜야."
그날부터였다. 해동검도의 역사가 그 순간에 시작됐다.
■ 목검 한 자루가 품은 것
도장 살림은 빠듯했다. 수련생이 느는 속도만큼 조금씩 도구를 마련했다. 목검으로 기본기를 익혔다. 형편이 나아지면 호구를 샀다.
그래도 사람이 왔다. 이소룡 영화에 열광하던 시대였고, 칼을 쓰는 무예는 낯설었다.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따라왔고, 태권도를 배우던 청년들이 기웃거렸다. 김정호는 매일 새벽 혼자 검을 들었다. 수련생이 보는 앞에서도, 아무도 없는 새벽에도.
안양 중앙시장 골목에 해동검도라는 이름이 서서히 퍼졌다.
한편, 대한검도회의 견제는 시작되고 있었다. '검도'라는 이름을 도장 상호에 쓰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해석은 달랐다 — "검도는 특정 단체가 독점할 수 있는 보통명사가 아니다." 이 유권해석이 나오기까지 수차례의 민원과 항의가 필요했다. 안양 도장은 그 싸움의 출발점이었다.
海東劍道 — 한반도를 뜻하는 해동, 그리고 검의 길. 이름 자체가 주장이었다.
■ 이후의 길
안양 도장에서 수련한 이들이 다음 해 서초동으로 이어진다. 그 서초동 도장이 다시 삼성동으로 이어진다. 1989년 사회단체 대한해동검도협회 등록, 1997년 미국 뉴저지에 세계해동검도연맹 창설, 2000년 용평돔 제1회 세계대회 — 모든 것이 이 날에서 시작됐다.
1982년 7월 24일. 수련생 하나 없던 안양 상가 2층, 목검 하나뿐이던 도장.
그 날을 역사적인 날이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정호 총재의 기억에도 그 날은 담담하다. "그냥 문을 열었지. 다른 게 없었어." 그러나 그 담담함 안에 45년치의 길이 접혀 있었다.
【인물 정보】
▶ 김정호(金定鎬)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1982년 7월 24일 경기도 안양에서 해동검도 창립. 서라벌고교 16회, 예산중 20회. 스페인 체류 후 귀국, 이 연재의 구술자.
▶ 김성주 1982년 당시 경향신문 기자. 물랑루즈 사건 직후 중부경찰서에 연락해 김정호의 석방을 도움. 이후 태국 재벌그룹 CP(Charoen Pokphand)그룹 한국지사장으로 재직 중(현). 무예계와 언론·재계를 넘나드는 오랜 인연.
【다음 회 예고】
▶ 제9회 — 나한일로부터: 심검도 도장이 해동검도 도장이 된 사연 친구 나한일이 심검도 서초동 도장을 넘기며 조건 하나를 달았다 — "해동검도로 이름을 바꿔라." 전세보증금 2,700만 원을 대납한 60대 회원 최도원의 정체가 1984년 설날 드러난다.
※ 이 글은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 김정호의 구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록입니다. 인물의 경력과 사건 경위는 구술자의 기억과 제보에 근거하며, 각 회차는 김정호 총재의 사전 확인을 거쳐 게재합니다.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운 부분은 향후 보완 예정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무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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