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세력이 강할 때는 함부로 공세를 취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득이 있거나 어쩔 수 없이 공세를 취해야 할 때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정적의 세력이 강하더라도 약자에게도 공격을 할 찬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약자도 주변의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고조 유방은 황제가 된 2년 후에 여후가 낳은 아들 유영(劉盈)을 태자로 책립했다. 그러나 나중에 척부인(戚夫人)을 사랑하게 되자 그녀가 낳은 아들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유방은 자신을 닮지 않고 유약한 유영을 싫어했다. 그러나 황태자의 폐위는 국본을 흔드는 대사이므로 쉽지 않았다. 여후도 방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이 없었다. 여후는 장량(張良)을 찾아갔다. 장량은 이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서 신선이 되겠다고 선언한 후 정치적 분규에서 떠나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여후의 사자가 그를 협박했다. “황제께서 태자를 바꾸려는데 어찌 베개를 높이하고 편안히 누워있을 수 있습니까?” 장량은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골육지간의 문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사양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장량이 대책을 제시했다. “주상께서 불러도 오지 않는 4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나이가 들어 세상을 등지고 삽니다. 이들은 한의 신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상도 이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십니다. 태자께서 친히 예를 다하면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적당한 때에 주상과 대면하게 하십시오.” ‘상산사호’로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이다. 상산사호는 과연 비범했다. BC 196년 회남왕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병에 걸린 유방은 유영에게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상산사호는 여후에게 유방을 찾아가 울면서 간청해 유방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유방이 출정할 때 장량은 병을 무릅쓰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방을 찾아가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의 군사를 감독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다. 장량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유방은 장량에게 태자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장량은 병에 걸린 유방에게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태자가 재빨리 병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유방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태자 교체를 서둘렀다. 장량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통하지 않자 숙손통이 목숨을 걸고 항거했다. 이때 유방이 상산사호를 만났다. 깜짝 놀란 유방은 아무리 불러도 피하더니 어떻게 스스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들은 태자를 위해 찾아왔다고 대답했다. 유방은 인심이 태자에게 기울었다고 생각해 마음을 바꾸고 척부인을 위로했다. 척부인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유방은 ‘홍곡(鴻鵠)이 높이 나니 한번에 천리를 가는구나! 날개를 이미 달았으니 사해를 누비겠지? 사해를 누비니 또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발뺌했던 장량은 누구도 몰래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유방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 여론이라고 판단했다. 여론의 힘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치권력의 향방을 좌우하는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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