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불만을 품은 이종찬 광복회장의 망언 때문에 때 아닌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시비가 일어 그 불똥이 헌법 전문에까지 튀었다. 온전한 주인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식민지배하에서 개화하고, 다시 남의 덕에 국가와 주권을 되찾다 보니 국가와 헌법에 대한 개념이 흐리멍텅하여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헌법 전문 논쟁을 유발하였다.
역사관과 족보관이 헷갈리는 이종찬 회장과 그의 횡설수설에 동조하는 역사학자와 정치인,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일부 반(半)사이비 언론인들, 심지어 일부 법학자들까지도 상식 이하의 역사 지식으로 헌법 전문을 곡해해서 시민들을 선동하고 나섰다. 아마도 상당히 많은 한국인들이 일반계약서와 헌법을 동일시하는 무식함을 가진 듯하다.
사적인 계약의 본질은 상호 이해관계의 조정으로 이에 대한 ‘상호 계약 의사와 계약 대상의 존재’가 전제조건이 된다. 하여 계약서 ‘전문(preamble)’에 계약의 존립 기반에 대한 설명의 명시가 자연히 필요하게 된다.
간혹 국제 상거래에서 한국인들은 이 계약서의 전문에 대한 인식이 느슨한 바람에 유사시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트러블 발생 시, 평소 무관심했던 이 상투적 전문 문구의 어떤 항목이 ‘금반언의 원칙(禁反言 原則, estoppel)’에 해당되어 계약 존립 자체가 문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전문에 매도자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매도하기로 명기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 공장이 없더라”와 같은 경우이다. 사적 계약을 극히 존중하는 영미법 체계하에서는 소급무효 및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 소송 폭탄까지 얻어맞을 수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상 과정에서도 이 ‘전제조건’은 당연히 중요시된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 세계적인 이벤트를 연출했었다. 이듬해 2월 두 정상이 하노이에서 2차 회담을 열었다가 곧바로 결렬된 ‘김정은의 하노이 망신’이 그런 경우이다.
김정은이 회담의 목적이자 전제조건인 ‘비핵화’를 무시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 평화 체제 구축 등을 요구하자 트럼프가 바로 자리를 털고 나가버린 것이다. 얼치기 중재자 문재인 대통령의 감언이설에 잔뜩 기대를 하고 열차로 만 리 길을 달려갔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때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삶은 소대가리’ 운운하며 이를 갈았을까.
주권(sovereignty, sovereign power) 행위를 설명해놓은 게 헌법(憲法)이다. 모양새를 보면 일반계약서와 비슷하다. 하지만 계약서와 달리 헌법에는 전제조건이 없다. ‘국가가 존재함’ 그 자체 외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저 “과거를 묻지 않고, 닥치고, 이제부터 이렇게 살아나간다!”이다. 계약의 존립 기반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아예 없으니 실은 전문도 필요 없다. 계약 대상이 없으니 서명란도 없다.
기실 ‘전문(前文)’이란 표현은 일본식이다. 중국과 북한은 ‘서언(序言)’, ‘서문(序文)’이라 표현한다. 단순한 형식적 문장도입부에 불과한 이 ‘머리말’에 구구절절한 사연을 나열해놓고 그걸 ‘헌법정신’ ‘헌법가치’를 천명한 ‘전문규정’인양 떠벌이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해서 대표적인 몇 나라의 헌법 전문을 살펴보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의 각 민족 인민은 찬란히 빛나는 문화를 공동으로 창조했으며, 영광스런 혁명 전통을 갖추고 있다. 봉건국가였던 중국은 1840년 이후 겉으로는 봉건국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의 식민지인 반(半)봉건국가로 점차 변했다. 중국 인민은 나라의 독립·민족의 해방·민주 자유를 위하여 희생을 두려워 않고 전진하는 정신으로 용맹하게 싸워왔다. 20세기에는 중국에서 하늘과 땅이 뒤집힐만큼 커다란 역사적 변혁이 일어났다. 1911년 쑨원 선생이 이끌었던 신해혁명으로 봉건군주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건했지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중국인민의 역사적인 임무가 완전히 이루어지진 않았다. 1949년 중국 각 민족 인민은 마오쩌둥 주석이 수령이었던 중국 공산당의 지도로 오랜 기간동안 어렵고 험난한 무장 투쟁 과 그 밖의 형식의 투쟁을 겪고난 뒤, 마침내 제국주의‧봉건주의‧관료자본주의의 지배를 뒤엎고, 신(新)민주주의 혁명 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공산당에 대한 장광설이 한참 이어진다.)’
중국 헌법의 전문으로 너무 길고 장황해서 다 읽으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헌법 조항들은 다른 선진민주국가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그럴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공산당 규약이 헌법보다 우위에 있으니 헌법 자체가 유명무실하다 하겠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이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그 기치밑에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광복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군사분야에서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은데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였다. …(계속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찬양이 이어진다.)’
1948년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소련이 만든 다른 동구권 위성국가들의 헌법을 그대로 가져다 국호만 바꾼 것이다. 그러다가 1972년에 새로 헌법을 제정했는데 당시에는 서문이 없다가 1998년 9월 5일에 채택된 일명 '김일성헌법'으로 불리는 사회주의헌법에서 처음으로 들어갔다. 이후 개정 때마다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찬양이 늘어나 ‘용비어천가’가 되었다. 어차피 법치국가인양 보이기 위해 만들어둔 헌법으로 실제 인민들의 삶과는 상관이 없다.
‘일본 국민은 정당하게 선거된 국회에서의 대표자를 통하여 행동하며, 우리와 우리 자손을 위하여 모든 국민과의 협화에 의한 성과와 우리나라 전 국토에 걸쳐 자유가 가져오는 혜택을 확보하고, 정부의 행위에 의하여 또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함을 결의하며, 여기에 주권이 국민에 있음을 선언하여 이 헌법을 확정한다. 본디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이며, 그 권위는 국민에게서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이를 행사하며, 그 복리는 국민이 이를 누린다. 이는 인류 보편의 원리이며, 이 헌법은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반하는 일체의 헌법, 법령 및 조칙을 배제한다. 일본 국민은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며, 인간 상호의 관계를 지배하는 숭고한 이상을 깊이 자각함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공정과 신의를 신뢰하여,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보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우리는 평화를 유지하며, 전제와 예종,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이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국제 사회에서 명예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우리는 전 세계의 국민이 모두 공포와 결핍을 면하고 평화롭게 생존할 권리를 가짐을 확인한다. 우리는 어느 국가도 자국만을 전념하여 타국을 무시하여서는 아니되며, 정치 도덕의 법칙은 보편적이며, 이 법칙에 따르는 것은 자국의 주권을 유지하고 타국과 대등한 관계에 서겠다는 각국의 책무라고 믿는다. 일본 국민은 국가의 명예를 걸고 전력을 다하여 이 숭고한 이상과 목적을 달성할 것임을 맹세한다.’
소위 말하는 일본의 평화헌법 전문이다. 사실상 근대적 헌법을 만들면서 전쟁범죄를 분명하게 상기시킬 필요에 따라 ‘전문(前文)’이라는 억지춘향식 반성문을 끼워 넣었다. 덕분에 선진국가의 헌법치고는 품격이 너무 너절해졌다.
‘러시아연방의 영토 내에서 공동운명체로 결합된 다민족인 우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국민의 평화와 동의를 확인하면서, 역사 속에서 키워온 국가적 일체성을 보존하면서, 권리평등과 민족자결이라는 보편적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여, 조국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그리고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선조들을 기억하면서, 러시아의 주권국가체제를 부흥시키고 견고한 민주적 기반을 확립하면서, 러시아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세대 앞에 조국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가 세계사회의 일원임을 인식하면서 러시아연방의 헌법을 채택한다.’
러시아연방의 헌법 전문으로 미국과 같이 단순히 헌법 제정 취지를 비교적 깔끔하게 서술해놓았다. ‘혁명의 나라’에서 빠질 수 없는 러시아이지만 일체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 미국 국민은, 보다 완전한 연합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며, 국내의 평안을 보장하고, 공동 방위를 규정하며, 국민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 미국 헌법을 제정한다.’
단순 도입부 문장으로 미국 헌법의 제정 취지만을 짧게 언급했다. ‘메이플라워 서약’이나 ‘독립선언’, ‘노예해방’, ‘권리장전’ ‘건국의 아버지들’ 등등 역사적인 중대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평등·연대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헌법 전문이다. ‘프랑스대혁명’ 등 인류사에 기념비적인 그 많은 엄청난 사건 등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고, 오직 ‘법원(法源)’에 대한 문건과 제정 취지만 간단하게 적어두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이다. 건국에 대해 딱히 내세울 공적이 없어 여러 미사여구를 동원한 것까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란 논리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끼워 넣는 바람에 문제를 잉태시키고 말았다. 북한을 의식해 그것으로라도 국가의 정통성(체통)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이후 4‧19가 들어가고, 5‧16이 들어갔다 빠지고, 민주개혁, 평화적 통일을 더하더니 이젠 5‧18까지 넣어달라며 개헌하자고 아우성이다. 뭐, 이왕 버린 몸! 동학란도 넣고, 4‧3도 넣고, 한강의 기적도 넣고, 촛불혁명도 넣고, 화폐 인물들도 넣고, … 또 넣고! 당파 간 정치적 목적과 족보관에 찌든 일부 유공자들의 과욕과 억지에 굴복해 헌법이 걸레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방관한 헌법학자들의 나태함은 준범죄적이라 하겠다.
효력도 없는 헌법 전문을 두고 계약서 전문 마냥 우리끼리 상투 잡고 지지고 볶고 시시덕거리는 게 일상사라지만, 선진우방국들과 잠재적 적국들에게 한국정치인들과 국민들의 수준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무뇌아, 무지성, 전근대적 비문명인으로 우습게 보여 국가 안보나 경제 협상에서 벌레취급 받을 우려가 다분하다 하겠다.
물론 헌법 전문의 효력을 ‘다수긍정설‘로 인정하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헌법정신이 흐릿한 덜 개화된 국민의 국가들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특히나 한국인들처럼 문해력이 떨어지고 뻔뻔하게 우기기를 좋아하는 단순무지한 국민들의 나라에선 전문이 마치 신성불가침한 절대명제인 것처럼 받들어질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헌법은 역사교과서가 아니다. 국민교육헌장도 아니다. 누구네 족보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헌법은 ‘닥치고, 이제부터!’이다. 헌법 반포(건국) 이전의 역사적 사건(과거사)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헌법 전문으로 국뽕‧가뽕하는 것은 헌법을 개칠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토록 팔불출이 되고 싶으면 따로 ‘신(新)국민교육헌장’이나 ‘5·18헌장’을 만들어 제 동네에 홍살문을 세워 걸어둘 일이다.
그리고 헌법은 잘난 시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애국자든 매국노든, 독립투사든 친일파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무식자든 유식자든, 좌파든 우파든, 훌륭한 시민이든 범죄자든 가리지 않고 이 땅에 사는 모두의 것이다. 해서 선진문명국가의 헌법 전문에 특정 사건, 특정 인물, 특정 지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설사 기미독립선언으로 나라를 되찾았어도 헌법 전문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제발이지, 징징거리며 생떼를 써서 헌법 전문에 ‘트집거리’를 억지로 쑤셔 넣으려는 노비근성을 자제해서 선진문명국처럼 단순 문장도입부 정도로 대폭 줄여야 한다. Less is More! 우리 헌법 전문도 전 세계 이성적 법체계의 기초가 된 나폴레옹 법전(Code Napoleon)처럼 간단명료하게 다듬어서 이번 건국 논쟁과 같은 시시비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