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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합기도(合氣道) 수련 이야기

박세림 이학박사 | 기사입력 2025/02/03 [09:53]

70년대 합기도(合氣道) 수련 이야기

박세림 이학박사 | 입력 : 2025/02/03 [09:53]

 

▲ 1972년 대한기도회 본부 도장 심사 후 단체기념사진


합기도가 이 땅에 자리 잡은지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본 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합기도 단체에 대해 알아보고 1970년대 합기도 수련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대구는 많은 피난민과 시민이 섞여 힘겹게 살아온 삶의 터전이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예술인과 문인은 대구에 터를 잡고 중심지에서 왕성히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대구에 정착한 최용술 도주 역시 중심지역 중 한 곳인 대구시 중구 포정동에서 풀빵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최용술 도주는 서복섭 씨의 도움으로 장소를 빌려 합기도를 교습할 수 있었고 시간이 흘러 제자들의 도장과 교습 인원이 많아짐에 따라 합기도를 대표할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설립을 준비한다. 단체 설립에는 도주의 제자들이 행정적인 부분을 맡았고 또 다른 합기도의 효시인으로서 장인목 선생 역시 참여 하여 1963년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의 합기도 단체인 '대한기도회(大韓氣道會)'가 설립되고 이내 공식 본부 도장 역시 대구시 중구 교동 시장 내 미군 PX 건물을 개조해 공식 본부 도장을 개관 하게 된다.

 

최용술 도주가 개인 도장을 운영하던 1950~60년대에는 손목을 잡으면 사람이 휙휙 날아간다는 소문에 합기도는 타무술보다 교습비가 고가(高價)였다. 그런 이유로 관원이 양복점 대표, 금은방 대표 등 주로 형편이 좋은 사람 들이 많았으나 이후 1970년대 협회 공식 도장에서는 성인과 더불어 소년, 소녀 관원도 수련을 하였다.

 

▲ 심사 전 도주 훈화 연설

 

당시 도장은 단층으로 바닥은 다다미에 포장마차에서 볼법한 천막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이 시기 대한기도회 본부 도장에는 많은 무술인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본부 도장과 가까운 중구 동인동(현 대구시청 건물 옆)에 위치한 대구 무덕관에서 수련중인 검도인과 유도인들이 합기도에 관심을 보이며 자주 왕래 하였다. , 이 당시 대구시 중구 교동 시장 부근은 문인과 예술인, 무술인까지 모여드는 그야말로 대구의 문화 심장부였다.

 

단체 사진 중 최용술 도주 옆 색안경을 낀 사람은 화랑류 발도술을 창안한 대한검도 8단 범사 남정보 선생이다. 대한검도를 함께 수련한 박병관 선생의 소개로 두 무술인이 친분을 쌓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대한기도회 술기에 단장술(지팡이술)이 이미 존재 하였다. , 병장기로 목검, 중봉, 지팡이 등을 활용한 수련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수련 모습의 차이는 현재 도장들의 쾌적한 시설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외형을 제외한 정신적 측면에서 수련의 방향이 과거에는 성인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에 어린이나 중, 고교생 수련생도 엄숙한 분위기에 맞춰 수련에 임했다는 차이가 있디. 이렇게 엄숙한 분위기에서 수련한 어린이들은 성격이 차분하여 학급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등 보통 어린이들과는 다른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 신문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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