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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F.A.맥켄지 등 순국선열·애국지사 106명 포상
건국훈장 74명,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22명
 
강한국 기자 기사입력  2014/02/2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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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오는 3월 1일(토) 제95주년 3.1절을 맞아 대한제국 시기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London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일제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을 후원한 F.A.맥켄지를 비롯한 10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74명(독립장 1, 애국장 14, 애족장 59),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22명이다.
 
  -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95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의 분석.검토, 적극적인 현지조사를 통해 101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 포상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포상자 중 8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 확인한 후 다시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거꾸로 추적하여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9,922명, 건국포장 1,048명, 대통령표창 2,539명 등 총 13,509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과 사료 수집 협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함으로써 숨겨진 독립유공자를 찾는데 더욱 노력해나갈 계획이다.
 
또한, 최근 발견된 '3·1운동 피살자명부' 에 대해서는 광복절 계기 포상을 목표로 분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명부에 수록된 분은 모두 612명이며 이 중 이미 포상된 분은 241명이다. 나머지 371명 중 46명은 입증자료 부족으로 포상이 보류되었던 분이며, 325명은 명부를 통해 새롭게 확인되었다. 국가보훈처는 현재 이분들에 대한 관련 문헌자료를 조사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와 협조하여 제적등본을 확인하고 있다. 앞으로 조사결과를 토대로 전공학자의 자문과 공적심사를 거쳐 광복절을 기해 포상할 계획이다.
 
금년도 제95주년 3.1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일제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F.A.맥켄지
   영국 London Daily Mail의 종군기자로 1904년과 1906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한 F.A.맥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그는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일제의 침탈상을 목격한 뒤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을 저술하여 세계에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3?1운동을 목도하고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저술하여 죽음을 무릅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또한 그는 1920년 10월 말 영국 런던에서 한국친우회 창립 식전에서 “한국의 소망(즉 독립)을 성취함은 한국민 자체에만 유익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일본에도 유익하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노예제도 하에 몰아넣고 또 동화정책을 쓰기 위하여 토지, 재산과 일반 자유를 빼앗고 더욱 한국의 예수교회를 없애려고 온갖 악수단을 다한 것은 1912년 105인사건이 유력한 증거”라고 설파하고, “한국민을 위해 정의를 옹호하며 자유를 회복함에 찬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를 두고 일제 정보당국은 “한국친우회의 미명 하에 사익(私益)을 챙기려는 것”이라고 모략하였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맥켄지의 활동은 한국독립운동이 정의와 인도에 기초한 인류 보편의 가치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합천에서 의병단을 조직, 군자금을 모집한 6인의 경남 의병
   1909년 2월 합천과 거창 일대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전성구(全聖九, 애국장), 김문점(金文點),김재한(金在漢),김상래(金尙來),전재관(全在寬),변원석(卞元石)(이상 애족장) 등 경남의병 여섯 분이 포상된다. 이들은 1909년 2월 경남 합천에서 동지 12명을 규합하여 ‘의병단’을 결성하고 합천과 거창 일대를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형 및 사형을 받았다. 국가보훈처가 의병단 조직의 주역으로 26년 만에 체포된 전성구의 활약상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발굴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동아일보』1934.10.21,「사형 받은 의병대장 26년 만에 잡혀 징역」). 이로써 동일 활동으로 이미 포상을 받은 심낙준(沈落俊)?김화서(金化瑞)(이상 애국장), 김유준(金有俊)?오낙삼(吳洛三)(이상 애족장) 등 네 분을 포함하여 모두 10분이 포상되어 그 동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던 경남 합천?거창지역의 의병활동을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 만세 소식을 처음 전한 영양의 숨은 독립운동가, 박윤규 선생
   1919년 3월 영양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박윤규(朴潤奎) 선생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16일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는 최초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며 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동월 18일 영덕읍 내 장날을 기해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았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우리 처에서 선생의 「신분장지문원지」,「신상기록카드」,「수형인명부」등 수형기록을 발굴하고 제적부 조회를 통해 후손을 파악?확인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박윤규 선생의 포상은 후손조차 잘 모르고 있었던 숨겨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 서울을 넘어 태평양을 가로지른 독립운동의 화신, 고재완 선생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미국에 건너가서도 끝까지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고재완(高在玩)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919년 3월 일본 동경물리학교 재학 중 서울 남대문역 앞, 종로 탑골공원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로 건너간 뒤 1930년 2월 뉴욕에서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재미동포들이 조직한 ‘내지학생운동대책강구회’에 참여하여 서기로 활동하였고 1932년 2월에는 미주 지역의 민족단일당 결성을 위한 공동대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국내와 미주에 걸쳐 3?1운동에서 광주학생운동과 민족단일당 결성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독립운동의 거족적인 노정(路程)에 동참한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한다.
 
   - 서북을 뒤흔들어 침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11인의 항일 전사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송영수(宋英秀),김중보(金仲甫)(이상 애국장),맹희준(孟希俊),이찬기(李燦基),장기순(張璣淳),이찬지(李燦芝),조창락(趙昌洛),유승익(劉承翼),이지선(李芝善),송영진(宋英珍),조삼룡(趙三龍)(이상 애족장) 등 11명의 천마산대(天麻山隊) ‘항일전사’들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이들은 1923년 9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일제의 창참(倉站)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여 일경 1명을 처단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전소시키다 체포되어 대원 전원이 징역 5년을 받았다. 이 가운데 송영수?김중보 두 분은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과 악형으로 순국하였다. 천마산대는 한말 군인 출신들이 조직한 무장단체로 적유령산맥의 천마산에 근거지를 두고 일제의 시설 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적(敵)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피고들은 처음 경찰에 체포되는 당시 전후 열하루 동안이나 지독한 고문을 당하여… 그 흔적이 아직도 완연하다고 옷을 벗어 보이고… 경찰에 고문당한 상황을 울며 호소”(시대일보, 1924.5.4)할 정도로 잔인한 고문을 가하여 사회적으로 큰 물의가 일어났다.
 
   - 총상을 입고도 끝까지 항전한 불요불굴의 독립군, 박일훈 선생
   중상을 당한 몸으로 일경과 싸우다 총상 후유증으로 순국한 독립군 박일훈(朴日勳)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3년 6월 의성단(義成團) 단원으로 1923년 6월 평안북도 의주에서 영산(永山)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다 4발의 탄환을 맞고도 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이듬해 초 중국 장춘에서 의성단장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총상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독립신문(1923.7.21)은 “더욱 분기가 맹렬하여 기사분투(期死憤鬪)하다 적탄 4발을 맞아 부상하였으나…2시간 분전하야 마침내 동 주재소를 전소”했다면서 선생의 투혼을  독립군의 모범사례로 특필하였다. 일제조차 선생에 대해 “의성단 단원 중 가장 흉포한 자로, 편강렬의 신용이 두터운 자”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 북만주 일대를 호령했던 신민부의 별동대장, 윤영순 선생
   신민부 간부로 활약하다 체포된 뒤 옥중에서 순국한 윤영순(尹永順)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7년 7월 50세를 눈앞에 둔 적지 않은 나이에 길림성 위하현(葦河縣)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당시 북만주 일대를 대표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에 가입하여 경리부 위원, 별동대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단체 척결에 앞장섰다. 1928년 1월 신민부 총회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탐지한 일본총영사관 경찰대가 석두하자의 근거지를 급습할 때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매일신보(1929.5.27)에서 옥중 순국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광복 직전까지도 조국탈환을 고대했던 OSS의 노병, 이초 선생
   1916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미국에서 한인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고 미군에 입대하여 국내침투 훈련까지 받은 이초(李超)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1915년 미국에 건너가 요식업과 호텔을 경영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한 뒤 이를 발판으로 대한인국민회 클레이몬트지방회?새크라멘토지방회?샌프란시스코지방회?로스앤젤레스지방회?중앙총회의 재무?학무?회장?총무?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에서 수학했다. 특히 1941년 1월 미군에 자원하여 OSS(전략첩보국)의 민간 요원으로 한국침투를 위한 방첩?사보타쥬 훈련을 받았으며 1943년 2월에는 미군에 정식 입대, 야전침투훈련반(Field Experimental Unit)에 배치되어 특별훈련을 견디면서 1945년 9월 육군상사로 제대할 때까지 조국침투작전 참가를 열망하였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도 식지 않았던 선생의 독립의지는 신한민보 인터뷰(1941.3.27,「우리의 만사여의가 광복군 성공」)에서 언급한 다음의 내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늘 우리의 만사여의는 광복군 성공에 있는 것이다… 우리도 나라있는 백성이 되어 남과 같은 인격을 가지는 것이 한가지요, 국외에 나와 유리방황하지 말고 고향에 돌아가 평안히 살자는 것이 또 한가지니, 총히 조상이 물려주신 만세유업을 우리가 적에게 빼앗겼으니 이 유업을 우리의 손으로 적의 수중에서 다시 찾아내어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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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26 [16:53]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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