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편집 2024.05.20 [13:21]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섹션이미지
신성대
이경명
김정록
김혁출
고성규
김용철
이호철
이지성
이송학
이창후
고영정
기고
역사산책
무협소설
무예이야기
축사
공지사항
회사소개
광고/제휴 안내
개인보호정책
청소년보호정책
기사제보
HOME > 칼럼 > 신성대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광화문(門化光)´ 석 자에 서린 무혼(武魂)
추사체가 나라를 지키나?
 
신성대 논설위원(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기사입력  2012/01/13 [07:10]
광고
▲ 신성대 주필     ©한국무예신문
예술성보다 역사와 시대정신을 더 소중히 해야
 
금간 광화문 현판을 다시 제작한다더니 결국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복원된 글씨가 도무지 살아있는 글씨 같지 않으니 이참에 새로 써야 한다거나, 그럴 바엔 차라리 이전의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다시 내걸어야 한다느니 갑론을박이다. 복원된 현판 글씨에 대해 왜 이제 와서 다시 논란인가? 가장 큰 이유는 옛 사진 유리원판을 무리하게 확대하여 복원하는 바람에 글씨가 생동감을 잃어 마치 죽은 글씨 같다는 것이다. 다음은 글씨 자체가 요즘 서예가들의 수준으로 봐도 그다지 잘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마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막상 그 글씨의 주인이 만만했던 게다. 당시 공사 책임자였던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다는 사실에 대해 일말의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왕이면 고종이나 대원군의 글씨였거나 역사책에 나오는 꽤나 알려진 인물, 혹은 당대 최고의 문필가가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에서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글씨라면 당연히 문인이 써야지 무인이 웬 말이냐? 해서 속으로는 현재 내로라하는 서예가라면 당연히 한번 도전하여 청사에 길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심을 숨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누가 다시 써도 저것보다야 더 잘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새로 쓰자는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이리라.
 
허나 옛 글씨가 남아있지 않다면 모르되, 임태영의 글씨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한글 현판이 버젓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 글씨를 받아 거는 것도 실낱같은 역사의 흐름마저 무시하는 처사라 두고두고 비난받을 일이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옛것을 무시하고 감히 광화문에 자기 글씨를 내걸겠다는 배짱 있고 덕망 있는 인물이 이 시대에 어디 있기나 한가? 해서 스스로 나설 수도 없어 말만 무성한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떠밀어 줄 것을 은근히 바라면서.
 
게다가 그런 일은 반드시 글씨를 잘 쓰는 서예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도 상투적이면서도 억지스런 편견일 뿐이다. 글씨를 자랑하기 위해 내건 현판이 아니다. 경복궁을 복원한 구한말로 돌아가 보자. 당대에 임태영만큼 글씨를 잘 쓰는 문관이나 선비가 없었겠는가? 아닐 것이다. 하다못해 이완용의 글씨만 해도 꽤나 잘 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글씨에 뛰어난 이가 아무리 많다 한들 대원군이라면 그런 나약한 문신들에게 맡겼을 리 없다. 대원군 자신인들 글씨에 자신이 없어 임태영에게 맡긴 것이 아닐 것이다.
 
사진의 유리원판의 ‘門化光’의 테두리 윤곽이 많이 부서져 전체적으로 70% 밖에 살리지 못해 죽은 글씨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지나친 결벽증에서 온 배타적 순결주의라 하겠다. 문화적 피식민주의에서 기인한 열등감에서 나온 반발심리에서 나온 주장이라 여겨진다. 70%가 아닌 7%를 바탕으로 복원된 글씨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 부실한 그대로, 남은 것 그대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적 관용과 포용의 자세가 절실하다 하겠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병사들의 유해를 찾아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걸로 소문나 있다. 뼈 한 조각, 수첩이나 군번 등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조그만 조각 하나라도 찾아내어 전사자 묘지에 안장하고 그 정신을 기린다. 유해가 70%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니 우린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광개토왕 비문도 그 윤곽이 마모되어 흐릿하니 죽은 글씨라고 단정해도 되겠는가?
 
집자(集字)는 나라 망신
 
현재 활동 중인 서예가들 중에서 새로 현판 글씨를 쓰게 한다는 것은 가뜩이나 말 많은 세상, 온갖 논란을 불러 올 것은 빤한 일. 그랬다간 글씨의 수준을 논하기 전에 먼저 본인은 물론 조상들까지 모조리 청문회에 불려나올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국가에 대한 공이 있고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인물이거나 그런 인물의 후손이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서예가가 아니고선 국민 청문회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잘 쓴 글씨가 아니라 당당한 글씨여야 하기 때문이다. 해서 차라리 옛 명필가의 글에서 집자하자는 의견이 많지만, 이 또한 궁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오죽했으면 집자를 했을까 하는 비아냥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자를 하는 것은 그 글씨의 주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오죽 못난 후손들이 글자 석자도 못 써서 집자를 한다고들 난리인가 하고 말이다. 직접 쓴 일도 없는 현판에 자신의 글자가 오려붙여 내걸린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욕됨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슨 소리냐? 그렇게 해주면 고마워하겠지 어찌 그게 그분에게 욕되는 일이냐? 허나 가고 없는 사람의 생각을 어찌 그렇게 속단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한 것처럼 후세에 누군가가 꾸몄다는 걸 알면 선비의 자존심이 허락하겠는가? 삼류 졸장부라면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겠지만, 명색이 선비 된 자가 어찌 그런 일로 자랑스러워하겠는가.
 
집자란 글씨를 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느 조상이나 존경하는 분을 기념하기 위한 소소한 작업에나 허용되는 일이다. 해서 광화문이 어느 개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의 문이라면 그 분의 문집에서나 아니면 그 문중의 훌륭한 분의 글에서 집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글씨의 수준에 관계없이 이는 조상에 대한 예우이자 후손의 겸양을 나타내는 일이어서 굳이 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적인 대사에 어느 특정인의 글씨를 ‘무단’으로 짜깁기하는 것은 수치스런 짓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용이자‘짝퉁’인 것이다. 복원된 ‘門化光’이 아무리 생동감을 잃었다 한들, 또 글쓴이가 유명하지 않은 일개 무장이라 한들 어찌 짝퉁에 비하겠는가?
 
김정희나 한석봉의 글씨로 집자하자는 의견이 가장 많다. 물론 그 분들의 글씨는 훌륭하다. 하지만 그 평가 기준이란 게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히 그 주장대로라면 왜 굳이 광화문만이겠는가? 남대문 동대문 할 것 없이 전국의 현판 중 그 글씨 주인이 누군지 모르거나 유명치 않는 것, 수준낮은(?) 글씨들은 모조리 이참에 집자해서 바꿔 내거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닌가?
 
▲ 금이 가 새로 제작될 광화문 현판. © 한국무예신문
비록 현판에 금이 가서 새로 제작한다고 하지만, 이미 중건 당시 내걸었던 글씨로 복원했으면 좋든 싫든 그걸로 가는 것이 옳다. 박정희의 한글 현판에 대한 미련도 적지 않고 의미도 충분하지만, 이미 임태영의 글씨가 복원된 마당에 다시 그걸 내걸 명분은 약해졌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명필이라 하여 광화문과 아무런 역사적 인과가 없는 인물의 글을 집자해 내거는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집자로 인한 글씨 자체의 어색함과 광화문의 시대정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 생뚱함을 길이 후손들에게 전하려는가?
 
흐릿한 옛 사진을 한없이 확대하다 보니 글씨가 생동감을 잃는 것은 당연지사. 이는 컴퓨터에서 아흔아홉 번을 다시 뒤집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복원 과정은 흐릿하고 애매한 글씨의 외곽선을 임의로 그려 넣고 그 속을 매우는 방식이어서 당연히 모필의 생동감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글씨를 복원하는 기법을 달리하면 얼마든지 임태영의 글씨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복원 방법을 바꾸면
 
매사는 기본으로 돌아가면 의외로 잘 풀린다. 일반적으로 서예를 처음 배울 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옛 대가들의 글씨를 끊임없이 보고 그대로 써 보는 것에서부터 필법을 익혀 나간다. 이를 임서(臨書)라 한다. 열심히 임서하다 보면 그와 똑같은 글씨가 나오고, 이를 바탕으로 그후 자기만의 글씨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는 모사를 하며 글씨를 익히는 것이다.
 
서예의 비조라 할 수 있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도 실은 원본이 아니다. 후인이 임서한 모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비록 모본이라 하나, 그 글씨는 진본에 다름없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월이 흘러 원본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에는 이같이 임서하여 후세로 전했던 것이다. 또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똑같은 것을 갖고 싶을 적에도 이처럼 임서를 했었다. 그도 아니면 돌에다 새겨서 후세까지 전하게 하였고, 이를 탁본하여 가지기도 했었다. 이처럼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고대의 글씨나 회화엔 모본이 꽤 많다. 웬만큼 서예에 능한 사람에겐 남의 글씨를 똑같이 임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복원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흐릿한 옛 사진 속의 ‘門化光’에서 원래 모필의 맛까지 살려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원본을 찾아내거나 다시 직접 쓰지 않고는 밋밋해져 버린 글자의 경계선을 되살려낼 도리가 없다. 해서 필자는 옛 사람들의 임모 방식으로 ‘門化光’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면 한다. 사진을 바탕으로 컴퓨터가 아닌 붓으로 복원하자는 말이다. 유리원판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인지 특히 ‘門’가 투박하여 가운데 네모 빈 공간이 너무 매어져 있고, 최종의 삐쳐 올린 부분이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이는 분명 사진 상의 문제로 그리된 것이리라. 아무렴 다시 썼으면 다시 썼지 글씨를 그렇게 답답하게 썼을 리가 없다.
 
지금 복원된 ‘門化光’을 현재 활동중인 이름난 서너 명의 서예가에게 임모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임모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글씨 위에 종이를 겹쳐 얹어 놓고 임태영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붓을 그어나가 모사할 수도 있다. 그리하면 임태영의 글씨는 그대로이면서 임모한 이의 필력이 더해져 죽은 듯한 글씨가 생명력을 얻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더불어 부자연스런 필획도 어느 정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무슨 확대 복사기가 있었겠나? 현대에도 작은 글씨나 그림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생동감이 사라져버린다. 애초에 큰 붓으로 쓴 큰 글씨와 작은 붓으로 쓴 작은 글씨를 확대한 것은 그 맛이 전혀 다르다. 사진에서 작은 렌즈와 큰 렌즈로 찍은 것이 다르고, 바로 앞에서 찍은 것과 멀리서 당겨 찍은 것이 다르듯 말이다. 현재 걸려있는 다른 현판들도 멀리서 사진을 찍은 다음 바로 그 사진으로 수 십배 확대하면 역시나 생동감이 죽어버린다. 그러니 설사 어느 명필가의 문집에서 ‘門化光’을 집자하더라도 위의 방식을 거치지 않고는 글자의 생동감을 완벽하게 되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임모 과정을 거친 서너 작품을 놓고 그 중 가장 나은 것으로 각을 해서 내걸면 역사성도 살리고, 살아있는 힘찬 ‘門化光’이 될 것이다. 특정 서예가가 새로 쓰는 것에 비해 말도 덜날 것이다.
 
문(門)은 창칼로 지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정신을 살려내지 못하는 문화재 복원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외세의 억압에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강력한 왕권을 대내외에 내보이고자 하여 중건한 것이 경복궁과 광화문이다. 해서 충성스런 무관의 힘 있는 글씨로 내걸었던 것이다. 우연히도 한글 현판을 썼던 박정희 역시 무관 출신 대통령이었다.
 
오늘날에는 ‘門化光’보다 훨씬 더 예술적이고 멋진 서예 간판들이 골목마다 흘러넘친다. 현대적 심미 기준으로 옛 글씨의 예술적 수준을 평가하는 것을 말릴 순 없는 일이다. 허나 광화문 현판의 글씨는 예술성을 논하기 전에 역사성과 그 시대 정신을 먼저 헤아려야 마땅하다. 광화문을 보며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는 무혼(武魂)을 읽고 기리는 것이지, 현판의 서예 글씨 감상하고 그 수준을 겨루는 곳이 아니다.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부실한 사진 원판대로만 확대해서 복원할 것이 아니라, 여기에 다시 임모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힘차고 당당한 무풍(武風)을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 장군과 함께 언제까지나 광화문을 빛내주길 기대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네이버
기사입력: 2012/01/13 [07:10]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 온누리 2012/01/19 [16:17] 수정 | 삭제
  • 무술인의 안목을 이렇게 넓게해주는글 처음봅니다.
    친구소개로 좋은글 읽어 반갑습니다.
    이전글도 열독중입니다. 감사감사!!
  • 문무 2012/01/18 [16:36] 수정 | 삭제
  • 광화문 현판의 글씨를 역사성과 그 시대 정신을 먼저 헤아려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임모하는 과정을 거쳐 힘차고 당당한 무풍(武風)을 되살려내어 채택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글씨가 걸린 광화문을 보며 나라를 굳건하게 지켜야 한다는 무혼(武魂)을 읽고 기리자는 주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하겠다.
    광화문이 국방의 의미를 가진 구조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화문은 통치자와 민심 간의 소통이 차단된 구중궁궐의 대문에 불과하다.

    통치자의 현판의 서예 글씨는 보다 품격있고 예술적 감상이 가능하다면 그 도한 괜찮은 것이다.

    또,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실종된 병사들의 유해를 찾는 노력과, 유해가 70%밖에 발견되지 않았으니 우린 그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가? 광개토왕 비문도 그 윤곽이 마모되어 흐릿하니 죽은 글씨라고 단정해도 되겠는가?
    라는 식의 비유는 적절하지도 않고 설득력도 모자란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훈련대장이라고해서 반드시 무인이지도 않았다.
    무를 천시하는 풍조는 무에 탁월하고, 문에 서툰 사람도 다 문인으로 행세했다.

    필자의 글은 무인의 시각에서 세상을 평가하려한다는 취지나 그 노력, 그리고 다양한 식견, 예리한 관찰, 광범위한 관심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무예, 무인, 무를 고양하려는 의욕이 지나쳐서 가끔 무리한 논리가 나오고 그게 자격지심으로 비쳐지기도 하여 오히려 무를 폄훼하는 역작용이 될까 우려된다.

    특히 이 글의 무인에 대한 경도된 편협성은 앞에 필자의 글 의 열린안목, 대범한 논리와 서로 모순이 된다.
관련기사목록
[신성대칼럼] 파주 적군묘지에 벽오동 심은 뜻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9/05/
[신성대칼럼]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런 만신창이의 나라가 되었나?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7/05/
[신성대칼럼] 매너와 품격으로 자기완성적 삶을!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5/22/
[신성대칼럼] 대한민국 위기냐, 다시없는 기회냐?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4/11/
[신성대칼럼] 한국인들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4/10/
[신성대칼럼] 대통령 탄핵, ‘품격사회’로 가는 성장통인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3/16/
[신성대칼럼] 중국이 자국민의 한국관광을 막는 이유?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3/10/
[신성대칼럼] 막무가내 콩글리시와 미쳐 돌아가는 한국사회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2/17/
[신성대칼럼] 무너지는 대한민국, 왜 리더가 없는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2/05/
[신성대칼럼] 우리는 왜 그런 대통령을 뽑았을까?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1/29/
[신성대칼럼] 대한민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7/01/01/
[신성대칼럼] 무예(武藝)냐 예술(藝術)이냐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12/21/
[신성대칼럼] “바보야, 이건 품격의 문제야!”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11/27/
[신성대칼럼] 사교(邪敎)라고? 차라리 용서받지 않겠다!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11/21/
[신성대칼럼] 대한민국에서 ‘정치’란 무엇인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10/30/
[신성대칼럼] 주먹질로 날 새는 이상한 나라 코리아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08/06/
[신성대칼럼] 북한에 ‘뺏긴’ 조선 국기 십팔기 교본 《무예도보통지》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07/24/
[신성대칼럼] 전쟁과 범죄의 경계가 없어졌다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07/18/
[신성대칼럼] 전세계에서 한국인들만 삿대질이 중범죄인지도 모른다!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07/09/
[신성대칼럼] 놀 줄 모르는 공부벌레, 일벌레들이 한국을 망친다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2016/06/26/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회사소개광고/제휴 안내개인보호정책청소년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