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든 전쟁에 지게 되면 승전국의 무예나 호신술을 선호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의 무예가 자신의 것보다 강하니까 이겼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서 열등한 것으로 확인된 자기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차 없이 내다버리게 된다. 특히 다른 문화에 비해 무예 분야가 심하다. 패자의 그것으로는 도무지 존심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자의 무예를 익힘으로써 강자의 편에 서서 자기 동포를 얕잡아 보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기비하 내지는 패배주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굳이 정책적으로 말살시키지 않아도 절로 그리 된다. 일제 시대에 우리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사상교육을 통해 신념을 바꾸게 하기는 어렵지만 육체적 단련을 통한 동화는 이렇게 의외로 저항없이 쉽게 이루어진다. 정신과 육체는 별개일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 일제가 무도교육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걸 배워 자신들에게 저항하라고 가르쳤겠나. 육체를 통제하면 정신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 무도 단련을 통해 오히려 충성스런 종복이 됨을 잘 알고 있었던 게다. 하여 36년 식민지배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에 한 세기로도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다. 무(武)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못 벗어난다.
무엇이 우리를 있게 하는가? 한 나라의 흥망은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였다. 천안함, 연평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벌이는 딴지걸기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이 패배주의의 소산이라 하겠다. 무예인(武藝人)은 ‘개념’이 없는가? 정신대, 독도, 이어도, 북한 인권에 대해 무예계는 왜 입도 벙긋 못하는가? 금메달을 돈메달로 여기는 스포츠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은 누구보다 먼저 분개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연예인들보다 애국심, 정의감, 동시대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해도 할 말이 없다. 그게 어디 진보 보수를 따질 일인가! 썩은 무혼(武魂)에 변태적 투혼(鬪魂)만 난무하고 있다. 왜 이 시대에 전통무예인가? 바른 역사, 바른 무예, 바른 정신이라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은 불문가지. 전통무예를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무예, 어디로 가는가? 태초에 무(武)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근사한 모습을 갖추어 태어난 것은 없다.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더해지고 꾸며지면서 성장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화와의 간섭과 변질을 거듭해가는 것이 문화의 속성. 온전한 우리 것, 혹은 전통적인 것이라야만 소중하고, 외래의 것이라 해서 다 하찮은 것은 아니다. 무예라서 더 귀하고, 놀이라 해서 덜 귀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뿌리를 감추려 하거나 억지로 꾸며 역사를 왜곡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무예는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미신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날 역사의 굴절로 인해 한국무예의 많은 것들이 왜곡되었지만, 언제나 학문의 변방 취급을 받아 온 탓에 터무니없는 무예인들이 저자거리에서 약 팔 듯 제멋대로 역사를 조롱하고 국민을 기만해왔다. 그런 일이 이제는 아예 전통무예계의 ‘전통’처럼 굳어져버렸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택견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무예종목으로 지정되었다. 택견은 무예인가, 놀이인가? 택견이 진정 세계인의 사랑받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그 역사부터 정확하게 이야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재물보(才物譜)》의 ‘탁견’ 정조14년(1790)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편찬된 지 8년 후, 정조 22년 이만영(李晩永)이 편찬한 백과전서류 《재물보》의 <기희조(技戱條)>에는 ‘卞 手搏爲卞角力爲武 若今之탁견’이라 하여 택견과 관련된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원래 이 글은 《한서(漢書)》 <애제기(哀帝紀)>에 나온다. ‘의식(贊)을 행할 때 변(卞)과 활쏘기(射)와 무희(武戱)를 관람하였다’는 구절의 ‘변(卞)’에 주(注)를 단 것으로 ‘手搏爲卞角力爲武戱 수박(手搏)이 변(卞)이고, 각력(角力)은 무희(武戱)가 된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 내용 또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권법(拳法)> 편 첫머리 안(案)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이를 이만영이 《재물보》에 옮기면서 ‘희(戱)’자를 빼고, 수박과 각력(씨름)을 지금은 ‘탁견’이라 한다하여 첨술한 것이다. 이미 <기희조(技戱條)>라 분류했기 때문에 끝의‘희(戱)’자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뺐을 것이다.
흡사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박희와 각저희 풍경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만 같다. 이는 고구려가 한(漢)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비슷한 그림이 중국에도 많이 남아 있다. 이 같은 고대의 수박과 각저와 같은 몸싸움놀이를 통틀어 정조 때에는 우리말로 ‘탁견’이라 했음을 알리고 있다. 당시 이에 대한 한자 표기를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민간에서만 통용되던 용어였음을 짐작케 한다. 해서 이만영조차도 ‘탁견’의 한자어에 대한 정확한 확신이 없어 한글로만 표기해둔 것이리라. 게다가 어느 특정한 것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박이나 각저 등 몸싸움놀이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무렴 그렇다한들 그만한 학자가 무예와 놀이(戱)를 구분하지 못해 <기희조(技戱條)>편에 넣었을 리는 없다. 더구나 정조 대에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무예 체계가 가장 잘 정리되어 국가적으로 진흥되던 시기였다. 만약 탁견을 무예로 여겼다면 분명 기희조(技戱條)가 아닌 기예조(技藝條), 또는 무예조(武藝條)로 분류했어야 했다. 또한 굳이 ‘탁견’이란 말 대신 그냥 ‘권법’이라 했을 것이다.《재물보》에는 무예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해동죽지(海東竹枝)》의 '탁견희(托肩戱)' 일제시대 제국신문 주재(主宰)를 지냈던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죽지》(1925년) 놀이[遊戱]편에 <탁견희>가 소개되었다. 허나 이 책 역시 무예서가 아니다. 줄다리기[引索戱], 씨름[角觝戱], 손뼉치기[手癖打], 돈치기[打錢戱], 제기차기[蹴雉毬], 강강수월래[强强曲], 연싸움[鬪風箏], 공기놀이[五卵戱], 팽이치기[氷毬子], 줄넘기[跳索戱], 그네뛰기[送唾韆], 널뛰기[跳板戱] 등등 온갖 풍속과 민속놀이를 모아 설명하고, 거기에다 저자의 문학적 흥취로 한시(漢詩) 한 수씩을 지어 붙인 책이다. 《재물보》와 마찬가지로 단 한 종류의 무예도 실리지 않았다.
<탁견희(托肩戱)>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차서 거꾸러뜨린다.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상투에 떨어진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내기하여 빼앗는다. 법관으로부터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다.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백 가지 기술 신통한 비각술
가볍게 상투와 비녀를 스쳐 지난다
꽃 때문에 싸우는 것도 풍류의 성격
한번 초선(貂蟬)을 빼앗으면 의기양양하다
百技神通飛脚術 輕輕掠過琦簪高
投花自是風流性 一奪貂蟬意氣豪
<수벽타(手癖打)>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 갔다 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기면 곧 타도(打倒)당한다. 이것을 손뼉치기라고 한다.
검술은 먼저 손재주의 묘한 것으로부터 온다
척장군이 하마 군사에게 재주를 가르쳤다
세 절구에 만일 한 절구만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劍術先從手術妙 戚將軍己敎兵才
三節朧如差一節 拳鋒一瞥落頭來
수벽타에 부친 한시에서 척계광(戚繼光) 장군 운운했듯이, 그도 이미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잘 알고 있다. 탁견희, 수벽타가 무예가 아니며, 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들을 각각 별개의 놀이로 분류하고 있다. 수벽타는 일반명사 수박(手搏)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마주 서서 노는 탁견희와는 달리 지금의 어린이들 손뼉놀이처럼 ‘마주 앉아서’ 손바닥으로 상대의 손을 때리고 노는 놀이라고 분명히 설명했다. 탁견희 역시 수박의 형태에서 상당히 멀어져 오직 발차는 기술로만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을 합쳐야만 원래 수박의 모양새가 조금이나마 나올 것 같다.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의‘택기연(擇其緣)’ 그러다가 구한말 일제 시기의 국학자이자 우리나라 민속학의 선구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저서 《조선해어화사》(1990)가 번역 출간되면서 택견의 어원에 대한 학구적인 연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책의 원전은 1930년에 출간되었다. 구한말 학자로서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을 지내면서 학문을 하여야 했던 이능화는, 스스로의 호를 '무능(無能)'이라 지어 부를 만큼 자책하면서도 우리나라 종교와 민속, 역사 방면에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왜놈 치하에서 저술을 하여야 했던 그는 왜놈들의 글자 사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렇다고 한글로는 책을 출판할 수도 없어 고의적으로 전부 한문체로 글을 썼다. 일반적인 우리말까지 모조리 한자로 표기하는 바람에 이두(吏讀)식 표기가 수없이 많이 사용하여 어지간한 한문학자도 그의 저서들을 번역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해어화사》의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듣는 꽃', 즉 기생(妓生)을 말한다. 《조선기생사》의 완곡한 표현이다. 이 책의 '미동(美童)'에 대한 주석에서 택견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다.
“[미동(美童)] 세속에서는 비역(枰役)이라 칭하는데, 남색(男色)을 이른다. 중국의 상공자(相公者)와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其緣)으로 싸워 자웅(雌雄)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給寄弄)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哲宗, 1849-1863 재위) 말년부터 고종(高宗, 1863-1887 재위) 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최영년과 함께 그 시기를 살며 어렸을 적부터 택견을 보고 자랐던 당대 최고 민속학자의 설명이다. 그가 자신의 책보다 수년 앞서 나온 《해동죽지》를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탁견(托肩)'을 따르지 않고, '택기연(擇其緣)'으로 그 어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조선 말 피폐했던 사회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들이 살기 힘들어지면 성(性)풍속이 매우 문란해진다. 조선 말기는 나라가 피폐해져 백성들이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모두 다 먹고 살기 힘들어 딸을 낳으면 버리거나 관기(官妓)로 보내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했다. 그 바람에 어떤 고을에는 관기가 2백 명도 넘었다고 하니 관리의 부패와 백성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 등 여러 유랑예인 집단들이 생겨나 기희(技戱)와 함께 매춘(계간)도 함께 하고 다녔었다. 민속학자이자 오랫동안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심우성(沈雨晟) 선생의 저서 《남사당패연구》(1974)에는 당시까지 현존했던 남사당패 출신들의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당시의 풍속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 있다.
“남사당패는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조직의 제일 말단인 '삐리'는 전원이 여장(女裝)을 하고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짝을 이루었는데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 차지할 수 없었고,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인기가 좋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가 없고,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주는 얼마간의 노자가 수입원이 되었다. 이밖에 마을의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해우채[解衣債, 몸값]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작전(作錢)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한양은 외세와 더불어 서구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고, 경제가 피폐해 서민들의 삶이 무척 곤고한 시기였다. 이 놀이패가 많이 노닐던 왕십리는 하층민과 하급 군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하릴없는 동네 아이나 건달들이 이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네마다 건들대는 왈패들이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서로 겨루었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웠다고는 하나 조선은 엄연히 엄격한 유교 국가였다. 설마 양갓집, 아니 상놈의 여자라 해도 그런 짓거리로 여자를 뺐거나 빼앗기는 작태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능화 선생의 주장대로 비역질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 놀이임이 분명하다. '미동(美童, 혹은 舞童)'이니 '사랑하는 여인'이니 '꽃'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삐리'의 완곡한 시적(詩的) 표현이다.
이능화 선생이 택견의 어원으로 '택기연(擇其緣)'이란 한자어를 무리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가 왜놈 글자를 싫어해서 한자어로 표기하다 보니 엇비슷하게 그 내용과 어울리는 한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만약 한글로 글을 쓸 형편이었으면 굳이 '擇其緣'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조선 말 관립한성법어학교 교장,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학감을 지냈으며 4개 국어에 능통했던 대단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비록 조어를 만들었다 해도 전혀 터무니없는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세속에서는 ‘급기롱(給寄弄)’이라 부른다고 하여 신빙성을 높이고, 그것이 성행했던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택견은 민속놀이다그 외에 택견에 대한 자료로는 조선 말기 유숙의 그림으로 추측되는 〈대쾌도〉, <기산풍속도>, 외국 선교사가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전해진다. 〈대쾌도〉에는 씨름과 함께 노는 택견이 그려져 있다. 이런 놀이판들은 대개 성문 밖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벌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택견은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다른 택견 그림도 줄타기 등 여타 민속놀이와 풍속을 그린 그림들과 함께 전해진다. 이들 그림과 사진에서의 품세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택견이 민속놀이로서 그 형태가 정형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자료로 살펴 보건대 택견은 일종의 발차기[脚法, 脚術] 놀이임이 분명하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으로 누가 먼저 상대의 어깨나 상투를 맞혀 밀쳐내느냐로 승부를 다투는 장난이자 겨루기 놀이였던 것이다. 분명 조선 말기의 택견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주먹을 쓰지 않고 발로만 태권도 시합을 하면 당시와 거의 같을 것이다.
물론 그 근원을 멀리 고구려 고분의 수박도 그림으로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나 씨름 등 여타 다른 잡기나 놀이들도 주장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유추일 뿐이며, 설사 그렇다한들 그 또한 유희(遊戱)이다. 게다가 이 놀이는 구한말 한양에서 한때 성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단편적이나마 택견에 관한 자료를 남긴 이들이 모두 한양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택견의 어원적 추측 탁견희(托肩戱)의 ‘托’은 기실 ‘손으로 밀어 치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탁’이든 ‘택’이든 발차기의 의미를 지닌 한자어를 찾을 수가 없다. 수많은 놀이마다 한자어 명칭과 한시를 하나씩 지어 붙일 정도로 한문에 능한 최영년도 도무지 '탁견'에 걸맞는 글자를 찾지 못해 고민했던 것 같다. 해서 겨루는 모양새, 즉 발로 어깨를 밀치는 것에 착안한 한자어 표기이다. 사실 글자그대로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치는 놀이였다면 차라리 수박희(手搏戱)라고 했어야 옳았겠지만 이미 ‘탁견’이 발차기놀이의 고유명사로 굳어졌기 때문에 무리한 한자어를 고른 것이리라. 만약 모양새로만 한자어를 고르자면 아마도 ‘척견(踢肩)’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능화 역시 같은 고민 끝에 택견으로 승부를 가려 미동을 차지하는 당시의 풍습, 즉 그 용도를 보고 ‘택기연(擇其緣)’이라는 민속학자다운 나름대로의 한자어를 유추해내었을 것이다. 그 외에 십팔기 중 <권법(拳法)>은 물론 여타 기예의 여러 세명(勢名)에서도 그와 유사한 한자어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튼 순 우리말치고는 너무 생소하다. 비슷한 말로는 ‘티격태격하다’가 유일한데 이는 어느 정도 뜻이 상통한다. ‘티격’은 손으로 치고, ‘태격’은 발로 차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상의 모든 문헌 기록에서 하나같이 택견을 '희(戱)'로 분류하였으며, 이능화는 세속에서는 이를 ‘給寄弄’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전래의 탁견이 그 시대에 와서는 ‘희롱(戱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이다. 최영년도 탁견희에서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어졌다’고 했으며 이능화도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역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탁견으로 삐리를 차지하려는 풍습(작난)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탁견 자체가 없어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그 둘 다였을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풍속을 단속하다보니 그 수단으로 이용되던 택견마저 절로 시들해진 것이다.
이만영, 최영년, 이능화가 모두 택견에 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그것이 생겨난 연원에 대한 연구는 없었고, 다만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아무튼 택견의 한자적 이름이 ‘擇其緣’이든 ‘托肩’이든 그것이 성행하던 시기에 ‘미동’ 혹은 ‘여인’을 차지하기 위한 겨루기로도 사용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최영년(崔永年)과 이능화(李能和)의 기술이 서로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택견의 발생 자체가 처음부터 삐리를 차지하기 위한 놀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재물보》의 기록으로 미루어 정조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분명하고, 그때도 사회가 피폐하여 성풍속이 문란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정조 대에는 수박희나 각저희와 같은 놀이를 ‘탁견’이라 했고,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민속놀이화하여 구한말에는 최영년과 이능화가 본 정형화 된 발싸움놀이[脚術]의 고유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권법>과 택견의 연관성?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나 호신술, 전통 무무(武舞), 민속놀이로서의 권박(拳搏)을 연구하자면 먼저 십팔기 각 기예와의 연관성부터 탐색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학문적 완성도를 인정받기 어렵다. 그걸 애써 모른 척하고 둘러가거나 훌쩍 뛰어넘으려는 바람에 역사를 건너뛰기 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하여 택견과 군사무예 십팔기 중의 일기인 <권법>과의 연관성을 살피자면, 당시 훈련원(訓鍊院)을 비롯한 군영의 군사들이 연마하던 <권법>이 동네 아이들에게 전해져 놀이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33년 4월에 비망기(備忘記)로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어제 중국 병사들이 진 친 곳을 보니, 그 중의 한 부대는 모두 목곤(木棍)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중국 조정의 말을 들었는데, 목곤의 기술이 장창이나 용검(用劍)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그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가 없다. 또 권법(拳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이니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동네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힐 아동을 뽑아서 종전대로 이(李) 중군(中軍)에게 전습(傳習)받게 할 것을 훈련도감에 이르라"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 가운데 목곤과 권법에 관한 두 도해에 표식을 붙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법을 훈련도감에 보이라" 하였다.'
전쟁 통에 명군(明軍)으로부터 어렵사리 입수한 비급 《기효신서》까지 훈련도감에 내려 보내며 임금이 직접 내린 명이니 분명 그대로 실행되었을 것이다. ‘종전대로’란 조선군에서 이전에 70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 이여송(李如松) 휘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의 군영에 들여보내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곤(棍)>과 <권법>을 제외한 병장기예를 전습(傳習) 받아 조선군에 보급한 일을 말한다. 일전에 왕이 이여송에게 보여줄 것을 사정했어도 군사기밀이라며 보여주지 않은 것이 바로 《기효신서》이다. 해서 몰래 역관을 시켜 빼냈지만 무용지물, 당시 조선의 무장이나 학자들 중엔 이를 해독해낼 만한 무학(武學)을 지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군사들을 중군(中軍)에 들여보내 직접 배워 나오도록 했었다. 나중에 조정에서는 이 《기효신서》를 영인하여 발간했으며, 그와 별개로 그때 익힌 6기(六技)만으로 《무예제보》를 만들어 조선군의 무예교본으로 삼았다. 그리해서 왕명에 의해 당시 군사훈련장 근처의 동네 아이들부터 <권법>을 배운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이들이 배웠다고는 하지만 군사들처럼 의무적인 훈련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관리되고 전습될 리가 없었을 터,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그 중에서 어렵고 힘든 동작은 차츰 떨어져나가고 재미있는 몇 동작만 남아 유행되다가 민속놀이화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권법>에는 ‘현각허이세(懸脚虛餌勢)’ 등 활달한 발차기 동작이 많다. 굳이 선조의 명이 아니라 해도 군영 근처의 동네 사내아이들이라면 그런 멋진 동작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을 터, 부러움에 금방 흉내 내어 저희들끼리 으스대며 티격태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보다 앞선 선조 31년, 32년에 중국 병사들의 ‘권법’을 ‘타권(打拳)’이라 부른 적이 있다.
‘유격이 타권(打拳)의 기법을 앞에서 보여줬는데, 그 법은 뛰면서 몸을 날려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이나 목, 혹은 등을 치며 가슴과 배를 번갈아 치기도 하며 볼기와 허벅지를 문지르기도 하는데, 주먹 쓰는 것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하든지 사람이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이 별전에 나가 두 부사를 접견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저의 부하들이 타권(打拳)을 잘 하는데 왕께서 한번 관람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타권(打拳)은 《기효신서》에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무예 가운데 한 가지이니 보아야 할 듯하다”고 하였다’
‘유격’은 중국 장수 허유격(許遊擊)을 가리킨다. 선조가 중국 병사들이 활달하게 주먹으로 온몸을 쳐가며 권법을 익히는 걸 수차례 직접 보고 감동을 받으면서 차츰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을 대비해 목곤과 함께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실제 《기효신서》에는 ‘타권’이 아니라 <권법>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그러니까 ‘타권’은 이 <권법>의 별칭이었던 것이다. 이후 광해군 때 만든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이 <권법>이 정식으로 도입된다.
혹여 이 ‘타권(打拳)’이 나중에 ‘탁견’으로 변이되지 않았을까 하는 논문(김산/허인욱, 체육사학회지 제9호)도 발표된 적이 있었다. ‘타권’과 ‘탁견’ 사이 2백년이라는 공백과 놀이화의 핵심 요소인 ‘겨루기’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만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겨우 ‘打拳’ 정도의 의미가 분명하고 쉬운 한자어라면 설사 민간에서 수 세기, 아니 수십 세기를 흘렀다 해도 이만영 등의 학자들이 짐작 못할 만큼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조 37년에 한 번 더 ‘打拳’이 등장하지만, 위의 예문에서 보듯 그전에 이미 정식 명칭인 <권법(拳法)>으로 대치되면서 기록에서 사라진다.
‘타권(打拳)’, 동네 아이들이 먼저 배우다 헌데 상기 문헌 기록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이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타권(打拳)’이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당시 명군(明軍)에서는 <권법>을 ‘타권’이라 불렀고 이를 조선에서 따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선조도 ‘타권’이 곧 《기효신서》의 <권법>임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헌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조선에서 이 권법[打拳]을 처음으로 익힌 사람은 조선의 병사들이 아니라, 동네 아동들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도 ‘종전대로’, 즉 아이들을 중군(中軍)에 들여보내어 중국 병사들한테서 직접 전습(傳習)케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打拳’이 당시 중국식 발음과 함께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탁견’으로 변해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아이들이 중국 병사들에게서 놀이삼아 배운데다 얼마 후 조선군에 <권법>이 정식으로 도입되는 바람에 관에서는 그때의 일을 곧 잊었을 것이다. 선조가 의도한대로 아이들끼리 서로 본받아 놀이로 삼아 번져나갔으니 그것으로 목적을 이룬 때문일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打拳’과 <권법(拳法)>이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수백 만 년 전 인간과 원숭이가 갈라지듯이.
‘打拳’을 현대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따췐’이 된다. 이를 배워 기고만장해진 아이들이 ‘따췐(打拳)’의 글자(한자)를 몰랐거나 알았다 해도 관심 없이 당시 중국식 발음을 그대로 따랐을 것은 당연한 노릇. 설사 글자가 있다 해도 외래어 발음이란 사람마다 조금씩 달라지게 마련이다. '납면(拉麵)' 또는 ‘노면(老麵)’으로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라몐’ 또는 ‘라오몐’이어야 하지만, 한자와 함께 들어오지 않고 음만 들어오다 보니 ‘라면’으로 굳어진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납’과 ‘노’의 중국식 발음 ‘라’에 ‘몐’ 대신 한국식 ‘면(麵)’이 합쳐진 것이다. 고려(高麗)가 ‘코리, 꼬레, 꼬레아’를 거쳐 ‘코리아’로 되돌아 왔듯이. 그 외에도 돌하루방, 야바위, 설렁탕, 담배, 남포, 싹쓰리, 하꼬방, 빠떼루 등등 외래어들에서 글자는 사라지고 변이된 음으로만 통용 되는 용어는 수없이 많다.
알파벳도 모르는 기지촌 사람들의 영어처럼 ‘따췐(打拳)’ 역시 처음부터 아이들 사이에서 한자를 잃어버리고 중국식 음(音)만 남아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음과 뒤섞이다가 수박과 같은 몸싸움놀이의 일반명사 ‘탁견’으로 따라붙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가라테 시범을 보고 "택견이구먼!'라고 했듯이. 설사 아이들이 중국식 ‘따췐’이 아닌 ‘타권’으로 배웠다 해도 글자가 따라가지 않고 음만 전해진다면 쉬이 변할 것은 능히 짐작 가는 일이다. 지금도 학교 교실에서 뒤로 말 전달하기 놀이를 해보면 대개 엉뚱하게 변한다. 말로 전한다는 게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거다. 그나마 정조 때에 이만영이 《재물보》에서 ‘탁견’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보다 모호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변이되어갔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군사들과 동네 아이들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중국군에게서 동일한 <권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허나 조선군에서는 그 정확한 명칭과 함께 법식이 기록과 함께 체계적으로 전승되어 누군가가 오늘날에 와서 복원하거나 천년 후에 복원한다 해도 당시와 똑같은 동작에 똑같은 이름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 허나 동네 아이들이 배운 것은 기록도 없을뿐더러 체계적으로 전승이 불가능한 때문에 그 기술이나 명칭까지 끊임없이 변질되어 호신술로 또는 놀이로 발전한 것이다.
기록이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바로 이런 점을 깨달은 조선 왕조가 2백여 년에 걸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전래의 무예를 다듬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 세(勢)라도 잃어버리거나 변치 않도록 책으로 남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라는 2백년에 걸친 일련의 거대한 작업이다. 세계 역사상 어느 왕조도 한 적이 없는 국가에서의 종합병장무예 정형화 작업이다.
그 후 훈련도감에는 따로 별기군(別技軍)이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십팔기 전 종목에 능했다. 그들은 때로는 십팔기교관으로 타 군영에 파견되기도 하고 일부는 무예청(武藝廳) 군사로 뽑혀 임금과 궁궐의 호위를 맡았는데 그들이 바로 무예별감(武藝別監)이다. 당연히 이 별기군은 조선 최고의 무사집단으로 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훈련도감 군사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대년군(待年軍)이 있어 일찍부터 십팔기를 훈련시켰는데, 그중에서 신체조건이 좋고 무예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만 선발해 별기군으로 편입시켰다. 왜냐하면 일반 병졸로서는 단기간에 십팔기 전 종목을 습득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화랑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말을 타면 달리고 싶고 활을 쥐면 당기고 싶어진다. 기예를 배우면 써먹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한창 혈기 넘치고 장난기 많은 대년군 아이들이 <권법>으로 겨루기를 즐겼을 것은 당연한 일.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동네 아이들에게 권법이 전해져 호신술 내지는 놀이로 흘렀을 것이다.
전쟁놀이와 택견 군사들이 십팔기 각각의 기예를 익히고 나면 최종적으로 실전에 대비해 겨루기[對鍊, 交戰]를 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종 병장기끼리의 교전훈련도 하였겠지만, 특히 십팔기 <권법>의 끝자락에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대련(對鍊)을 하고 마치도록 짜여 있다. 이들이 치고받고 둘러메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가장 흥미 있고 부러웠을 것은 당연한 일. 해서 위험한 병장기예 대신 이 <권법>을 흉내 낸 겨루기가 별도로 민간에서 놀이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무예든 권법대련은 기본적인 훈련, 바로 이 부분이 전형적인 수박의 형태로서 《재물보》에서 말한 ‘탁견’과도 가장 유사한 모습이다. 아마도 당시 중국이나 조선 군영에서는 이 권법겨루기를 따로 ‘대권(對拳)한다’고 했을 것이다. 앞서의 ‘타권(打拳)’과도 상당히 상통한다. 중국식 발음으론 ‘뛔췐’이 되겠다. ‘타권(打拳)’이든 ‘대권(對拳)’이든 민간에서 글(한자)을 모르는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된소리 발음이 빠지거나 보태져 ‘대꿘, 태꿘, 택꿘, 태껸, 탁견, 착견, 뎍견, 택껸’ 등으로 변해가지 않았을까.
어느 민족이나 전쟁을 치르고 나면 새로운 무기, 무예, 전술 체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은 한동안 전쟁놀이에 열중하게 된다. 임란 병란을 연거푸 겪으면서 조선의 아이들 사이에 무예를 흉내 낸 놀이가 성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3백 년 동안 군사들이 날마다 익히던 권법대련을 병영 근처의 아이들이 흉내 내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해서 당시 유행하던 ‘놀이화 된 권법겨루기’에 별칭이 따라 붙지 않았겠는가. 그게 2백년 후 《재물보》에 ‘탁견’으로 흔적을 남긴 것일 수 있다.
선조 이후부터는 궁중이나 군영의 의식에서 수박희와 각저희를 행한 기록이 차츰 사라진다. 아마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체계화된 <권법>과 무예가 도입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희의 일부가 민간에 남아 유랑예인집단에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아쉽지만 그 외에는 군사들이 익히던 권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던 탁견을 연결할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임란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병란을 치렀으니 청군(淸軍)의 영향을 받아 ‘탁견’이란 생소한 용어가 생겼을 수도 있다. 임란을 통해 명(明)과 왜(倭)의 무예와 권법을 받아들였듯, 병란을 통해 청(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각이 단순한 동네 아이들이 이긴 나라의 무예나 놀이를 흠모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니 말이다.
<쌍검(雙劍)>과 '수벽타' ▲ 자료이미지. 신윤복의 '쌍검대무'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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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군사들이 군역을 마치고 나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로인해 십팔기 중 일부 동작을 놀이화하여 즐겼을 수도 있다. 다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민간의 무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무예 종목이 민간으로 전해질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유일하게 무예십팔기가 민간으로 흘러들어 한 때 유행했던 흔적으로는 신윤복의 그림에 남아있는 <쌍검대무(雙劍對舞)>이다. 이는 영정조 시대에 밀양 기녀 운심의 쌍검무(雙劍舞)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가 <정유문집(貞蕤文集)>에 남긴 글과도 정황이 일치하며, 그 춤사위 또한 십팔기의 <쌍검>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는 밀양검무보존회에서 <쌍검>을 바탕으로 복원하여 보급하고 있다. <쌍검>이 이처럼 기녀들에게 전해졌다면 <권법> 정도는 능히 동네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 전해지고도 남을 일이다. 더구나 권법은 왕명에 의해 보급이 권장되기까지 했었다. 더구나 권법은 왕명에 의해 아이들 놀이로 보급되지 않았던가.
《해동죽지》에서 <수벽타>를 형용하는 시(詩)에 척계광(戚繼光) 장군의 검술, 즉 십팔기의 검법 운운한 것으로 미루어 추정컨대, 이 역시 선조가 명한 것처럼 병사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손때리기놀이였을 것으로는 유추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손이 재빠른 것은 검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검법을 예비한 손놀림 놀이였던 셈이다. 물론 최영년의 시적인 상상력이 가미되었겠지만 어쨌든 <수벽타> 가 검법의 손놀림에서 나왔으며 두 손으로 논다고 했으니, 바로 이 쌍검무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수벽타(수벽치기)가 수박과 음이 비슷하다 하여 무슨 신비한 권술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서 나온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군사체육의 민속놀이화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첫째, 선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친 권법이 놀이로 변형되었을 가능성. 둘째, 《재물보》의 기록으로 미루어 ‘변(卞)’, 즉 전래의 수박인 ‘탁견’이 차츰 그 형식을 잃어 발을 위주로 한 민속놀이로 진화했을 것. 셋째, 궁중이나 군영에서 의식을 행할 때 공연하던 수박희(手搏戱)의 일부 기예가 민간으로 흘러 민속놀이화 했을 가능성. 넷째, 지구상 모든 민족이 공통적으로 즐기는 원초적 몸싸움놀이였을 가능성. 이 중의 어느 한 가능성일 수도 있고, 그 일부 또는 전부가 뒤섞였을 수도 있다.
즉, 기예(技藝)로서의 권법(拳法)이 민간으로 전해져 수박(手搏)으로 변질 혹은 습합하여 기희(技戱)로서 ‘탁견’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유희(遊戱)로서 씨름과 함께 즐기는 민속놀이(스포츠)화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국가에서 엄격하게 정형화한 <권법>과는 달리 탁견은 민간의 놀이(遊戱)이기 때문에 그 노는 형식이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른 놀이들과 습합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변해갔을 것이며, ‘따췐(打拳)’이란 중국식 발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 명칭 또한 그때그때 불명확하게 불렸을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다가 구한말에는 수벽타, 각저희와 구분되는 발싸움(脚術)놀이로서 독자적인 형태를 갖춘 것이라 하겠다.
고대로부터 ‘수박[卞]’이 무예를 예비한 권법(拳法)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민속놀이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택견은 그 후자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비록 무예십팔기와 택견과의 연관성은 어디까지나 유추에 의한 가정이지만 문화의 속성 상 <권법>이나 <검법>이 민속놀이에 영향을 미친 흔적이 얼마간의 남아있는 문헌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무튼 영정조 당시 국가적으로 무예가 진흥되었었고, 그에 따라 민간에서도 검무(劍舞)와 권법류가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따라서 택견과 수벽타는 그로부터 파생된 민속놀이였음이 가장 무난한 해석일 것이다.
무예(십팔기)는 관의 일이다. 당연히 문서기록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다. 허나 택견은 민간의 일이다. 그 같은 일은 여간해서 기록이 잘 남지 않고, 설사 기록이 남았다 해도 편린적이고 정확하질 못하다. 대개는 구전과 민속적 행위로 남는다. 해서 당시의 여러 주변 정황으로 그 실체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무튼 탁견이 3백 년의 긴 세월 동안 없어지지 않고 민속놀이로나마 면면히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끊임없는 <권법>의 수혈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택기연(급기롱)’은 누가 즐겼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능화는 분명 철종 말 고종 초에 대단히 성했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관에서 금했겠는가. 설마 양반집 도련님이나 선비가 그런 내기를 즐겼을 리 없다. 놀이패가 감히 성안으로 들어와 판을 벌였을 리 없고, 대개는 동대문 밖이나 왕십리 근처에서 놀았다. 그곳은 하층민과 하급 군사들이 많이 살았는데 당시 한양의 군사들은 병영으로 출퇴근하는 제도였었다. 이미 나라가 기울어 군율도 엄하지 못했을 터. 하면 젊은 군졸들도 그 풍류에 끼었을 것은 능히 짐작이 가는 일. 어쩌면 그 풍속 자체가 그들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군부대가 있는 곳에 풍류가 성하지 않던가. 아무렴 그들이 ‘꽃’을 두고 내기를 했다면 제법 신사적(?)이면서 격렬했을 것이고, 동네 건달들도 그들의 권법대련[脚術]을 다투어 배웠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택견은 무예일 수 없다 설사 택견이 십팔기 중의 일기인 <권법>에서 나왔고 또한 그 전승과정에서 끊임없이 <권법>의 수혈을 받았다 해도 택견을 무예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탁견희'는 지금의 택견을 말한다. 다시 말해 택견은 놀이의 한 종류로서 정식 이름을 얻은 것이다. 게다가 그 어디에도 택견이 무예라는 언급이 없었다. 설마 택견을 기술한 학자들이 고대로부터 흔히 언급되어 온 각저와 수박, 무예[技藝]와 놀이[技戱, 遊戱]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김용옥 교수는 《태권도 구성 철학의 원리》에서 당시 택견의 기능보유자였던 송덕기의 말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택견이 어떻게 해서 발생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한말까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택견을 했었다. 나는 12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임호(林虎)라는 택견의 명인을 만나서 택견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택견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가를 이용해서 운동하기 좋은 장소에 모여서 실시하던 일종의 민속놀이였다.”
솔직한 말이다. 그러니까 당사자조차도 운동이자 민속놀이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다른 한 사람의 기능보유자 신한승은 택견을 무예라고 주장한다. 젊은 시절 레슬링을 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송덕기를 만나 택견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주도해서 택견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그리고 그 공로로 공동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민속놀이가 무예로 승격(?)한 것은 오르지 그의 공로라 하겠다. 이후 그 밑으로 태권도인들도 몰려들어 택견을 경기체육화하면서 점점 태권도스럽게 발전시켜갔다. 계속해서 김용옥은 태권도의 '태권(跆拳)'은 '택견'에서 차용한 것임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이어서 ‘가라테’를 ‘태권도’로 개명하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다.
가라테(空手道)와 ‘택견’의 만남 '1952년,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 전 해, 한국 전쟁의 전화 속에 국토가 휘말려 있던 어느 날, 제1군단 참모장이었던 최홍희는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기가 길들인 당수도시범단의 시범 광경을 30분간 연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얻는다. 시범을 다 관람하고, 또 남태희가 맨손으로 13개의 기왓장을 일격에 완파해 버리는 것에 너무도 감명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국군이 이 무술을 익히게 하라고 고관 참모들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자리를 뜨면서 최홍희에게 다음과 같은 한마디를 건넸다. "택견이구먼!"'
자, 위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승만(1875-1965)은 왜 가라테 시범을 보고서 "택견이구먼!"이라고 했을까? 당시 그가 가라테 시범인 줄 모르고 관람 후 그 말을 했다면 말 그대로 가라테를 택견인 줄 오해해서 내뱉은 말일 것이고, 그게 아니고 가라테 시범인 줄 알고서도 한 말이라면 "택견 같은 것이구먼!" 이란 뜻으로 뱉은 말일 것이다. 어쨌거나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 역시 어렸을 적에 택견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최홍희는 일제 가라테로는 최고 권력자(더구나 항일 투사 출신)의 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포장지를 바꿔치기했다. 물론 태권도와 택견은 실오라기 한 올만큼의 연관성도 없다.
참고로 1950년 3월 26일 서울신문에 실린 이승만의 회고담에서 ‘임오군란 때 대원군은 모화관 앞에서 훈련도감 군사들에게 십팔기예를 훈련시켜…’라 하였다. 그는 십팔기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가 가라테 시범을 무예로 인식했더라면 "택견이구먼!"이라 하지 않고, "십팔기구먼!" 또는 "권법이구먼!"이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랬더라면 가라테가 태권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태어났을까? 만약 아무 말 않고 그냥 자리를 떴었다면 검도나 유도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공수도 혹은 당수도로 고스란히 이어져 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예에선 발차기의 의미로 腿(퇴), 각(脚), 축(蹴), 척(踢)이란 글자를 사용했다. 그렇지만 태권도의 태(跆)는 짓밟다, 유린하다는 의미로서 무예 용어로는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사용한 적이 없다. 이만영, 최영년, 이능화가 고민했듯이 ‘택견’과 비슷한 손(手)과 발(足)과 관련된 용어를 찾다보니 생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공수도(空手道) 혹은 당수도(唐手道)를 고집하는 관장들의 반발 때문에 한시적으로 ‘태수도(跆手道)’를 사용하기도 했었다.
무심코 내뱉은 최고지도자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생겨난 신조어 ‘태권(跆拳)’. 바로 여기서부터 한국무예계의 역사적 조작이 시작된다.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가라테가 개명을 거쳐 한국의 고유한 무술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여타 검도, 유도, 합기도 등 일본 무술들의 부러움은 당연한 일. 하여 쪽팔림이라도 면하고자 그 족보를 억지로 꾸미거나 역사의 사금파리를 입맛대로 모자이크해서 ‘원래는 우리가 신라시대에 전해준 것이니 곧 우리 것’이라는 둥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해동’, ‘화랑’등등 너도나도 그럴듯한 한국적 수식어를 갖다 붙여 창시무예 운운하며 ‘가문의 비전 절기’임을 주장하는 일을 공공연하게 자행한다. 태권도도 했는데 난들 못하랴? 무예인 스스로 비굴함과 수치스러움을 자초한 것이다.
예(藝)와 희(戱)를 구분 못한 학자들의 실수 혹은 고의적 조작? 제5공화국 서슬 퍼렇던 시절,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국풍(國風)' 운동의 회오리 속에 그때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택견'이란 것이 갑작스레 무형문화재 제76호, 그것도 무예 종목으로 지정(1983년 6월 1일)된다. 그리고 수년 동안 태권도의 원형이 바로 이 택견이라며 함께 잘 어울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택견이 태권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면서 등을 돌려 독자적인 길로 가버린다. 사실은 엄청난 연관성(?)이 있는데도 말이다.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배경에는 '태권'과의 연관성(후원)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어느 개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닐 터이다. 그렇지만 기능보유자 당사자의 말은 물론 그 어떤 문헌에서도 택견을 무예라고 칭한 적이 없고, 대신 '놀이[戱]'라고 분명하게 명기된 것을 굳이 무예 종목으로 지정한 배경이 석연치 못하다. 이는 당시 문화재전문위원들과 문화재위원들이 예(藝)와 희(戱), 즉 무예와 놀이를 구분 못한 무지 혹은 실수였을까, 아니면 고의적으로 놀이를 무예로 조작한 걸까? 혹여 그 둘 다일까? 아무튼 이후에 나오는 모든 글들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맹목적으로 택견을 무예라고만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에 택견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할 당시 처음 조사를 맡았던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께 필자가 당시 지정과정에 대해 여쭤본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무예분과가 따로 없어 놀이분과를 맡은 심 선생님이 조사를 했었지만 지정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얼마 후 같은 놀이분과의 모 전문위원에게 재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일사천리로 택견이 심사를 통과해 지정을 받았는데, 나중에 심 선생이 그 위원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위에서 시킨 일이어서 어쩔 수 없이 조사보고서를 냈다고 했다 한다.
그 위라는 곳이 청와대임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그곳에서 시킨 일이면 안 되는 일이 없던 시절이었다. 국풍(國風)운동이 일어나고, 태권도의 족보만들기 일환으로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임을 지금도 알만한 원로들은 기억하고 있는 일이다. 아무튼 가라테가 태권도로 개명을 하는 과정에 ‘택견’이라는 이름이 영향을 끼쳤고, 태권도가 한국의 전통무예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택견’이라는 족보가 필요했던 게다.
일제식민시대 일본 호신술의 한국화와 그에 따른 연원조작이 엉뚱하게 민속놀이인 택견을 무예로 둔갑시키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더니 마침내 유네스코 무예종목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하게 만든 것이다. 역사의 단절로 인한 사소한 오류와 조작이 이처럼 황당한 문화적 변이를 유발한 것이다.
맨손무예 택견? ▲ 자료이미지. 십팔기의 하나인 <권법>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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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택견을 '맨손무예'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은 데서 빚어진 오류이다. 권법은 실제 전투에 예비하는 기예는 못되지만 무예를 예비한 기술, 즉 손발을 활달하게 하고 몸을 부지런하게 하여 입예(入藝)의 문(門)이 된다고 《무예도보통지》에서 기술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무예란 살상을 목적으로 병장기를 다루는 기술이다. 따라서 무예로서의 권법이라면 그 법식이 각종 무기를 다룰 수 있도록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해서 예로부터 수박이나 각저 등 호신용 권술이나 무희(武戱)를 무예로서의 권법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해 왔다. 택견이나 태권도가 ‘무예로서의 권법’이 되려면 최소한 십팔기의 <권법>처럼 창, 칼, 봉 등 병기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현재 상태로는 병기기술로 도저히 연결할 수가 없는 품세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맨손 대 맨손 겨루기가 최종 목적인 호신술이 입예지문(入藝之門)으로서의 권법을 굳이 익혀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맨주먹으로 지킨 나라? 무기 없는 군대 없듯이, 무기 없는 무예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무기 없는 겨루기는 예로부터 수박 혹은 권술이라 한다. 무예가 아니라 호신술(체육무술)이다. 그럼에도 계속 맨손호신술을 무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배, 식민사관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 생겨난 가라테(空手道)의 오키나와, 각저(씨름)가 유행하던 원의 지배 하의 고려, 그리고 식민시대 일본의 스포츠무도와 호신술을 받아들인 한국이 그랬다. 그런 것들이 무예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의 무예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아쉬운 대로 맨주먹이나마 무예 못지않은 강한 것이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 무장해제 당한 때문이다.
택견이 전통 무예에서 출발하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민속놀이화 되었으니, 그 기원을 좇아 당연히 무예라 일컬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현재로서는 무리다. 그러한 논리라면 검무(劍舞)는 물론 씨름이나 석전놀이부터 먼저 무예 종목으로 지정했어야 했다. ‘맨손무예’란 해방 후 태권도(가라테)와 택견을 무예화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궁색한 용어이다. 자기 것을 잃어버리다 보니 일본 무도, 중국 무술에 견주어 아쉬운 대로 호신술이나 민속놀이라도 무예라고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맨손무예’대신 그냥 백타, 수박, 권술, 권법, 각술, 각법 등 일반명사를 명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다만 ‘택견’은 이미 특정 종목의 고유명사로 정해졌으니 일반명사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민족무예, 민족무술? 그리고 식민시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해방 후 복원하였다는 주장도 정황상 맞지 않는다. 이미 조선 말기에 풍기문란(給寄弄, 농지거리)을 염려하여 관에서 금하는 바람에 일제 초기쯤엔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또 신문화가 도래하여 전통적인 유랑예인집단도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택견도 함께 소멸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민족무예라 하여 일제가 탄압하는 바람에 비밀리에 전수되어 왔노라 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모두 《해동죽지》의 ‘법관으로부터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다’라는 구절을 지나치게 확대한 데서 나온 주장일 것이다.
아무렴 일본총독부가 무예와 놀이를 구분하지 못했을까.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기인 십팔기가 말살되고, 그 대신 일본의 검도와 유도가 군, 관, 경, 학교에 정식 교과목으로 보급되고, 시중에는 보다 체계화된 상업용 호신술 가라테와 합기도가 보급되면서 택견의 설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허나 상대적으로 오히려 씨름은 성행하게 된다. 택견을 무슨 대단한 무예라고 일제가 두려워해서 탄압했겠는가.
그저 도시의 시장경제가 발달되면서 차츰 새로운 조직적인 주먹패(깡패)들이 생겨나 동네주먹(택견패)이 꼬리를 감추면서 함께 사라진 것일 뿐이다. 동네 건달을 예전에 ‘어깨’라고 부른 것도 어쩌면 여기서 유래한 건 아닌지? 어찌되었건 온전히 '우리의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다거나 독립운동 혹은 저항운동을 했던 것처럼 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조롱이다. ‘장군의 아들’도 독립유공자라 하지 않는다. 비록 굴욕의 역사일지언정 그런 것으로라도 덧칠해야 할 정도로 초라하지는 않다.
그러니 별 생각 없이 예전에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끼리 독특한 민속놀이의 하나로 즐기면 별일 아니겠으나, 바야흐로 바깥에까지 들고 나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무예’라고 자랑한다면 혹여 무예에 안목 있는 외국인들이 보고 한국을 어떻게 생각할지, 또 마땅히 뒤따를 학문적 연구로 인해 국민들이 무예와 민속놀이를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될 때를 생각하면 민망스러움이 앞선다. 지난 반세기 동안 태권도를 한국 고유의 무술이라고 속이고 속아왔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택견의 발전은 문제없는가? 여하튼 택견과 태권도는 그 명칭에 얽힌 인연 때문에 항상 서로 비교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택견은 태권도를, 태권도는 택견을 흉내 내면서 발전(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태권도는 그 명칭 때문에 손기술보다는 발차기 위주로 변화하면서 원래의 가라테 품세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고, 택견은 '결련택견'이니 하면서 태권도 경기를 흉내 내는가 하면 단순한 놀이에서 점점 경기체육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하긴 택견은 씨름이나 깨금발싸움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결련하는 놀이였다.
아무튼 요즘 태권도 경기 모습을 보면 택견보다도 더 택견스럽고, 오히려 택견이 태권도보다 더 예전의 태권도 모습을 닮았다. 이는 태권도가 스포츠체육, 즉 메달 뺏기 경기종목으로 나아가다보니 옛 택견처럼 놀이[戱]화 될 수밖에 없게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 태권도(가라테 시절)가 차지했던 호신술로서의 영역과 지위를 택견, 특공무술, 격투기 등이 빠르게 잠식해가고 있는 것이다.
총보(總譜)나 무결(武訣) 등 정형화된 법식을 갖추지 않은 민속놀이로서 택견의 원형이 고정적이지 못한 원인도 있지만, 지정할 당시의 형태도 조선 말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변형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민속놀이의 한 형태가 그토록 다양한 동작을 구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놀이[戱]든 스포츠든 대개 간단하고 명확한 몇 가지의 제한적인 동작만으로 겨루되,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규칙을 두고 있다. 그게 아니면 말 그대로 막싸움일 뿐이다. 놀이를 무예로 지정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을 것이고, 나아가 무예로 지정받고 보니 다른 호신체육들과 비교되어 점점 다양한 격투기술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태권도가 기술적으로 발전해 나가거나 다른 형태로 변질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택견이 나날이 발전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정 목적은 멸실 혹은 변질될 우려가 있는 전통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보존코자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정할 당시의 형태에서 벗어나 계속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다른 형식으로 운용된다면 무형문화재 지정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권법>, 택견, 태권도 전 세계 무술이 한국에 거의 다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습합을 거듭하면서 온갖 전통무예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무술을 좋아한다는 것일 게다. 식민지배의 후유증, 그리고 남북 전쟁과 대치상태가 한국인들의 성향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수입 무술들은 물론 스포츠의 어느 종목도 구차하게 원산지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는다. 해서 당당하다. 헌데 유독 일본에서 들어온 무도류만은 그 연원을 부끄러워하여 숨기거나 둘러대기에 급급하다. 더하여 이런 피지배식민근성으로 인해 도리어 자국의 무예를 멸시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그에 대항해서 전통무예를 한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지나치게 과장하려 든다. 그러다보니 이런 무예인들을 만나면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이력을 위조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느낌부터 들어 서로 마주보기가 불편하다. 흡사 사이비 교주 같이 행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그 자신의 무예도 없이 맨손으로 나라를 지켜온 줄 알고 있다. 전쟁이 나면 관군들은 활이나 쏘다가 도망가고나면 백성들이 낫이나 곡괭이를 들고 일어나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킨 줄로만 안다. 식민시대에 들여온 호신술을 개명시켜 국기(國技)로 삼은 일. 민속놀이의 하나인 발싸움 놀이를 전통무예라면서 무예종목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일. 이를 위해 역사를 조작하거나 불과 백 년 전의 일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고구려 벽화를 들먹이는 역사 건너뛰기가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어왔다.
제도권에서 일어나는 연구와 정책들이 이 모양이니, 하물며 저자거리 무예들이야 말할 나위 있으랴. 그들이 꾸며낸 족보라는 것들이 무협지, 무협만화, 도교 신화, 야담, 전설의 고향을 짜깁기 해놓은 것 같아 차마 입에 올리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무지를 넘어 국민에 대한 기만에 다름 아니다. 그런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허풍에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역사에서 무(武)와 예(藝)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과학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현학(玄學)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예(武藝)와 육예(六藝) 이외에 단 한 번도 예(藝)자를 사용한 적이 없다. ‘예술(藝術)’이란 근대에 들어 일본에서 서양의 ‘아트(art)’를 번역하면서 시작된 용어이다.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예(藝)는 왕권의 유지와 통치 수단을 의미했기 때문에 민간에선 감히 사용할 수 없는 글자였다. 예(藝)란 놀이[戱]가 아닌 법(法)이자 과학이다. 함부로 바꿀 수도 없지만 쉬이 변하지도 않는다.
공교롭게도 ‘탁견’과 ‘태권도’는 둘 다 전쟁의 끝 무렵에 최고지도자에 의해 생겨났다. 선조의 명에 의해 중국의 <권법>에서 ‘탁견’이 갈라져 나와 민속놀이화 하여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일본의 공수도에서 ‘태권도’가 갈라져 나와 호신체육으로서 올림픽 종목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이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가고 있다. <권법>과 택견, 택견과 태권도는 문화의 전형적인 습합과 변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그리하여 미래에는 이것들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궁금해진다.
정직함과 당당함이 무예인의 본색 정직함은 학문의 생명. 임란과 병란을 치르면서 중국과 일본의 무예까지 받아들여 십팔기를 완성한 조선의 학자들(박제가, 이덕무 등)은 《무예도보통지》에 각 기예들이 만들어진 과정은 물론 그 원산지까지 한 치의 꾸밈이나 거짓 없이 소상히 밝혀놓았다. 그런 올곧은 정신이 있었기에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부족하나마 자기 것을 지켜내어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되 전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승화시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계통을 바로 세우고 개념과 용어부터 정립시키는 것이 학문의 첫 단추가 아닌가? 그런 기본도 없이 무슨 연구를 한단 말인가.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 시대의 우리네 학자들도 하나같이 무예[藝]와 놀이[戱]를 구분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해방 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논리적 허술함을 비집고 역사적 근거를 조잡하게 꾸며댄 온갖 국적불명의 전통무예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또 앞으로 수없이 창시될 것이다. 이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전통무예가 창시되다니! 전통무예진흥법이라니! ‘무예’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이란 단어의 의미는 알기나 하는지!
사태가 이 지경이니 하필 삼일절이나 광복절 날에 검도대회가 열리는가하면, 심지어 온양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생기념 축제장에서 하카마 입은 검도인들의 짚단베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박수갈채를 받는 황당무계한 일까지 벌어지고, 고궁이나 전국의 명승지에선 시도 때도 없이 국적불명의 전통무예 시범이 열리고 있다. 명색이 유학대학인 성균관이 검도의 주요 거점이 되고 있는가 하면, 3군 사관학교는 물론 민족이념을 부르짖는 학교일수록 일본 무도 교육에 더욱 열을 올리고, 전국의 체육대학에서는 이들 무도류를 전통무예인양 포장해서 시치미 뚝 떼고 가르치고 있다.
도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간교한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아무튼 무예와 호신술, 그리고 놀이(체육, 스포츠)부터 분명하게 구분하고 그 연원을 명확하게 밝혀놓지 않으면 앞으로도 끊임없이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그렇다 해서 행여 어떤 부류의 운동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 무엇을 즐기든 이왕 하는 것이면 정직하고 당당하게 하자는 말이다. 그러지 못하면서 굳이 땀과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얻는 그 무엇이 있다한들 무에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 나아가 진실을 알게 됐을 때의 민망함은 또 어찌하려는가. 언제까지 이 무지와 가식으로 스스로는 물론 국민들을 기만할 것인가?
위대한 발명도 때로는 실수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가라테를 태권도로 바꾸어 올림픽 종목으로까지 만든 일, 민속놀이를 전통무예로 착각했거나 우겨서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한 일, 어찌 보면 바로 이런 점도 한국인의 위대한 야만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남는다. 처음 잘못 꿴 단추로 계속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되돌려 바로 잡을 것인지. 바로 잡자면 택견의 무예종목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부터 재검토해서 종목이나마 민속놀이로 바꿔야 할 것이고, 설마 하면서 그대로 가다간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수치스러움에 봉착할 것이다.
작금의 한국무예계가 그 연원을 감추거나 덮으려 하고 심지어 조작도 서슴치 않는 것은 지난날 식민지배에 의한 굴욕과 자격지심, 콤플렉스, 열등감을 극복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지나친 가부장적 사고가 허세와 허풍으로 지난날의 수치심을 가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왜곡된 역사에선 기형적 문화가 자랄 것은 빤한 이치. 임란 병란을 겪고도 숨김이나 꾸밈이 없었던 조상들처럼 당당하게 역사와 문화를 보듬고 가꾸어나갈 줄 알아야 한다.
문(文) 속에 무(武)가 있고, 무(武) 속에 문(文)이 있다. 무(武)는 남성성이지만, 기실 그 바탕은 여성성이다. 무력은 부계적이지만 문화는 모계적이다. ‘강간의 역사’, 강간에 의해 낳은 자식이라 해도 제 자식인 게다. 모성적 사고, 그게 진정 대지의 주인됨의 자세이다. 그게 문화다. 그 문화의식을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걸 되찾아야 정신(武魂)이 바로 선다. 문무(文武)의 균형됨이 곧 바른 자세란 말이다.
언제까지 학문의 변방으로 남을 것인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충분히 자랑스럽고 대단한 일이다. 허나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만만치 않다. 이제부터 택견은 물론 전통무예 전반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촉발될 것이다. 또한 다른 나라의 무예들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나설 것이고, 그때에는 당연히 각 민족의 무예, 무술, 무도, 호신용 권술, 놀이에 대한 비교 분석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택견의 역사에 대한 오류나 분류에 문제가 있다면 그 책임은 가장 먼저 택견인들과 그 주변 학자들이 져야 할 것이고, 더하여 무예학계, 체육학계, 역사학계 모두가 동조 내지는 방관의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반성과 질정 없는 진보란 있을 수 없다. 저자거리에서야 무예라 하든 놀이라 하든 저 할 탓이지만, 제도권에서나 학문의 세계에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까짓 역사니 연원이니 하는 것이 무에 그리 대수냐, 당장 잘 나가면 그만이지 하는 장사꾼적 사고로는 문화의 변두리 신세를 면키 어렵다. 무예인은 무예만 잘 하면 됐지, 역사니, 문화니, 철학이니, 정치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과 무슨 상관이냐는 단순한 생각이 자칫 무예인은 무식해도 괜찮다는 오해를 불러온 건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것이라 하여 반드시 열등한 것도 아니고, 반대로 우리 것이라 하여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남의 것이라 하여 배타적일 필요 없듯이 우리 것이라 하여 무조건 편애할 필요 또한 없다.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났다. 어느 시대든 무예는 과학이었다. 태권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이고, 택견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하더라도 학문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이비 종교가 아닌 바에야 감히 그 역사를 들추거나 비판해서 안 되는 신성한 무엇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더욱 더 정확하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필자의 문제제기에 대한 거침없는 반론과 통렬한 비판, 그리고 이제까지의 상투적인 주장이나 밥통론이 아닌 보다 진척된 연구가 나오길 기대하며 긁어 부스럼 만든다든가 잔칫상에 재 뿌린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택견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전통무예계의 학자 및 관계자들이 혹여 애국적 공명심에서 역사적 고증을 소홀하지 않았는지, 그 명성만큼이나 학문적 뒷받침이 됐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