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대 주필(전통무예연구가)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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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을 제외한 고대의 무형문화로서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상당히 드물다. 가령 신라의 문화 중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춤으로는 《처용무》가 있고 무예로는 십팔기(十八技)의 한 종목인 《본국검》이 있다. 설사 전해진다 해도 문헌으로 그 형태가 전해지지 않으면 전승을 확인할 길이 없다. 더구나 춤이나 무예와 같은 기예는 기록만으로는 그 원형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몸동작은 그림이 남아있지 않으면 끝없이 변질되기 때문이다. 헌데 천 년 전의 요(遼)나라 무예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그것도 기록과 실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면?
고대 동아시아의 동북쪽, 오늘날 만주라 일컫는 이 지역은 선비, 고구려, 발해, 거란, 말갈, 몽고, 여진 등 수많은 민족이 일어나고 또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다. 초원의 특성상 한 민족이 오랫동안 터 잡고 살만한 곳이 못되지만 요행이 기후가 잘 맞으면 말을 살찌우고 민족의 동력을 축적하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또한 유목민들이라 이동이 심해 민족 간 이합집산으로 순수 혈통을 지닌 민족이라 정의할 수도 없었다. 남은 유물조차 드물어 그들의 역사나 문화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거란족은 5세기 요하(遼河) 상류에서 흩어져 살던 혼혈부족으로 당나라 말기에 일어나기 시작해서 916년 야율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해 건국하였다. 그리고 926년에 발해(698-926)를 멸망시키고 947년에 국호를 요(遼)라 정하고 송(宋)과 고려와 세력을 겨루었으나 내분으로 점점 쇠약해지다가 1125년 금(金)과 송(宋)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한반도의 고려와는 끝없이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우리는 기실 요나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한국 유일의 요(遼)나라 서적?
근간에 필자와 막역한 분이 중국 고대 문헌(10책, 圖解本)를 구해다 줬다. 골동품의 대가로 예전에 동문선에서도 저서를 번역 출판한 바 있는 중국의 원로학자가 진품임을 확인해줬다. 천 년 전의 책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한지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더니 건조한 사막지역에서 발굴되면 그럴 수도 있단다. 그래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더니 껄껄 웃으시면서 “그럼, 어떤 바보가 이 따위 걸 위조하겠느냐? 당신 같으면 고작 몇 푼 받겠다고 이걸 만들겠냐?”고 반문하는 바람에 같이 웃고 말았단다. 헌데 도무지 읽어볼 수가 없다. 언뜻 한자 같은데 가만히 보니 한 글자도 모르겠다. 기이한 것이 요나라 거란문자란다. 결국 그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나온 여러 문헌들 중 어떤 것은 풍화되어 일부분이 삭아버린 것도 있어 깨끗한 책만 몇 권 골라왔다는 데 하필 병서(그 중 1책은 불교에 관한 책)라니!
거란문자는 요(遼)의 태조 야율보기가 만든 대자(大字)와 그의 동생 야율질라가 만든 소자(小字)가 있다. 대자는 한자를 변형하여 만든 것으로 각각이 하나의 글자가 되는 표의문자이고 소자는 대자를 원자로 삼아 합성하여 만들었는데 표음문자였다고 한다. 현재까지 약 350개의 원자가 밝혀졌지만 아직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고 한다. 해독해본들 민족과 언어가 없어졌으니 확인하기도 쉽지 않겠다. 나중에 발해 문자와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근자에 엄청난 양의 발해문헌이 발굴되어 그 분이 눈요기를 하고 왔다고 한다.)
헌데 이 병서들 중 1책은 고대 창법을 그림과 함께 설명을 달아놓았는데, 어허라? 너무 익숙한 그림이어서 필자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이렇게 한 치도 틀리지 않은 똑같은 그림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요나라 서적이라니…! 총 10세(勢)를 수록해놓았는데 창법의 근간이 되는 기본세들이다.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모원의(茅元儀)가 찬집한 《무비지(武備志)》, 그리고 십팔기 교본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장창은 모두 똑같은 것으로 총 24세이다. 그 10세가 하나도 빠짐없이 고스란히 옮겨졌다. 필자가 어설프게 세 문헌과 비교해가며 거란문자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덤비다가 창피만 당했다. 중국에서 거란문자사전이 나온 적이 있다니 나중에라도 혹여 구할 수 있을지? 어차피 창을 다루는 동작 설명인데다 후대에 한문으로 변환되었고, 또 필자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터라 굳이 해독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 각종 무기와 무구들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다. 모두 얇은 철판(구리판?) 묶었는데 요즘 나오는 함석판처럼 깔끔하게 매끄러울 뿐 아니라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새 책이다. 중앙의 것이 창법 책이다.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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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는 동작 설명이겠지만 해독을 한들 지금은 거란 언어가 없어졌으니 확인할 길이 없겠다. 이화창법을 만든 양씨가 거란의 유민이거나 거란문자를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해독했으리라.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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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방의 민족들은 변발로 부족을 표시했었다. 한민족도 고대에는 상투 대신 부족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변발을 했을 것이다.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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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의 창법 이화창(梨花槍)과 십팔기(十八技) 장창(長槍)
십팔기 18가지(응용종목인 마상기예 4가지 포함 22기. 마상재와 격구는 군사오락이지 무예가 아니다) 중에 장창(長槍)이 있다. 임진왜란(1592〜1598) 때 명나라의 구원병인 절강군에 의해 조선군에 전수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창법은 명(明) 때 왜적을 물리친 영웅인 척계광(戚繼光, 1528〜1588) 장군이 만든 것으로 그가 지은 《기효신서》라는 병법서에 남아있다. 그는 송대 이전(李全)의 아내 양묘진(楊妙眞, 1194?〜?)이 남긴 이화(梨花) 창법을 약간 개정해서 군사조련용으로 만들었다. 송사(宋史)에 ‘당대 이화창은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육합창(六合槍), 대이화창(大梨花槍) 등 중국의 많은 창법이 이 이화창법을 근간으로 삼아 발전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보건데 양씨의 이화창법은 이 거란 창법을 모태로 그 세를 늘리고 세명(勢名)을 붙인 것이 아닌가?
발굴된 많은 문헌 더미 속에서 대충 골라온 10책 중에 요행히 창법 책이 따라왔지만, 각종 무기들을 도해한 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창법 외에 다른 기예들을 기록한 책들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책들의 묶음 형태(모든 책이 똑같이 10장 분량)로 짐작컨대 이 10세 외 또 다른 10세를 기록한 창법 책이 한 권 더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려 때에는 기창(騎槍)이 성했다고 한다. 어쩌면 고려 때 거란의 침략으로 이 창법이 고려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고려군이 이 창법에 대항해서 거란군과 수없이 싸웠으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의 것이 요나라로? 다시 고구려의 창법이? 뭐 상상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겠다만 문화(핏줄까지)란 그렇게 습합을 거듭하면서 소멸하고 변형되고 발전하는 것임을 확인시켜주는 고문헌을 맞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무예 십팔기가 누천년 격동의 동아시아 민족들이 생존을 위해 갈고 닦았던 병장무예의 결정체이자 총합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무튼 《삼국사기》(1145)보다 오래 된 책이다. 고대에는 무예서가 국가 최고의 비급이었던 걸 감안한다면, 요나라가 망하고 어찌어찌해서 남은 판본 하나가 송(宋)의 양씨에게 전해지고, 다시 명(明)의 척계광에게, 또 다시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전해져 십팔기의 한 종목으로 그 기예가 지금까지 온전하게 전승되다니! 그리고 그 원본이 땅속 수장고에서 천년을 잠자다 깨어나자마자 수만 리를 날아서 하필 그 기예를 보전하고 있는 필자를 찾아오다니! 흡사 용맹한 거란 무사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다. 더구나 자신을 알아볼 필자를 어찌 알고?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혹여 내 핏속에 거란의 피가? 그 옛날 일을 어찌 알랴마는 참으로 장구하고도 기이한 인연이다.
▲ 조선본 《기효신서》의 <야차탐해세>. 문자 기록이나 기예 전승으론 수백 년을 건너 뛰어 이렇게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을 그려낼 수 없겠다. 도보(圖譜)가 남아있으면 수천 년을 지나도 완벽하게 그 동작을 재현할 수가 있다.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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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도보통지》의 <야차탐해세>.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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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본 《기효신서》의 <청룡헌조세>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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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도보통지》의 <청룡헌조세>. @신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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