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덕성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메논이 남자의 덕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곧 “국가의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친구에게 선의를 베풀고, 적에게 고통을 주며,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화편>의 첫부분에 위치한 이 대화는, 철학적인 요구에 직면한 일반 대중의 모색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 메논은 여러 가지 예를 수집하여 대답의 타당성을 높이는 데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눈에 보이는 간단함은 보다 미묘한 의문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유도한다.
예시의 풍부함을 떠나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가? 또한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 어떻게 그것들이 정확히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서 나온 예시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결과의 다양성에서 원인의 단일성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편견에서 진정한 앎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 철학은 이처럼 관점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구체적인 예들은 그것 자체가 진정한 앎을 위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개별적인 말에서 통일성을 이루는 개념을 구별해 낼 줄 알아야 한다.
무예철학을 위한 가건물 실제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필자로서 무예를 가지고 철학의 담론에 끼어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가당찮은 일이다. 따라서 이 글이 어디까지나 무예인의 입장에서 본 수박겉핥기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며, 이 글은 어느 한 주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구체적인 결론으로 유도하는 글쓰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기실 이번 글은 다른 여러 연구자료에서 발췌, 편집하였기 때문에 흡사 여기저기 남의 재료를 조금씩 훔쳐다가 얼기설기 판잣집을 하나 만들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대부분 《체육미학》(胡小明 지음, 민영숙 옮김, 1992, 東文選)과 《스포츠 인류학》(K.블랑챠드 外 지음, 박기동 外 옮김, 1994, 東文選)에서 옮겨왔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예철학이란 가건물의 윤곽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철학자들이 미처 보지 못한, 관심 기울이지 않는 구석에서 뭔가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싶다.
진입의 장애물 우선 무예에 대한 글쓰기를 하자면 맨 먼저 맞닥뜨리는 두 개의 높고 두꺼운 벽이 있다. 아마 다른 연구자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 하나는 무예의 왜곡 기술된 역사에서 기인한 정체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무예의 불명확한 분류에 의한 모호한 개념의 문제이다. 전자는 어느 연구자가 나름대로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사실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는 이를 바로잡아 나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무예계에서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끊임없는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무릇 학문을 하자면 가장 먼저 그 역사, 그리고 분류와 개념 정리가 분명해야 사물과 현상에 대한 흔들림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현재 유통되고 있는 많은 무예들이 그 연원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문화의 위치까지 넘보는 바람에 역사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 분류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모호한 개념은 그 도덕성과 목적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많은 현대(전통)무예의 이러한 점이 철학적 전개의 초입에 큰 장애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저 광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해서 역사를 건너뛰기 하거나 샛길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철학적 도구를 사용할 것인가? 사물과의 교류 속에, 언어 속에 문화적 유산으로서 침전된 역사성, 우리는 그것을 통해 철학을 추구한다. 이러한 유산은 전래적인 사유 관습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성찰 태도와 개념 표본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이 있는 곳에서 작용한다. 먼저 전통무예의 고유한 사고의 설명과 발전을 위해서 철학의 어떤 체계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가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를 살펴보자.
문화인류학의 틀을 빌리자면, 철학적 분과 학문으로서의 인류학은 가장 불분명한 명칭이지만 원시적부터 현재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단련시켜 온 과정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분과이며, 이미 스포츠인류학 등을 통해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진 상태다.
또한 철학적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를 그 규범적 측면에서 성찰하는 도덕에 관한 이론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도덕적 규범과 가치관 속에 표현되어 있는 풍속에 대한 의무감을 저버릴 수 없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무예 역시 보편적인 의미의 근거를 제시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기 위해 규범적인 절차를 이용할 수 있다. 무예든 체육이든 그 특성상 응용윤리학보다는 규범윤리학, 그리고 교육윤리학에서의 성찰이 보다 적합할 것이다. 나아가 스포츠로서의 전통무예가 현재 시장에서 발휘하고 있는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경제윤리학적인 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문화철학은 ‘인류의 공동생활과 개인생활사의 핵심 문제에 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과이다. 문화철학은 철학에게 문화라는 주제와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문화란 크게 문(文)의 문화와 무(武)의 문화로 대별할 수 있다. 비록 짧은 역사이기는 하지만 한국은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는 동안, 무예(무술, 무도) 역시 무(武)를 천시해오던 전통적인 토양 속에서 그나마 그 가치와 역할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앞으로도 계속 심도 있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철학 중 가장 변화무쌍한 영역으로서 오늘날의 미학은 인식 관점과 연구 영역이 서로 다른 모든 인지 가능한 형태의 예술에 대한 이론과 미(美) ․ 우아함, 그리고 고상함에 대한 이론을 모두 포괄한다. 미학의 창시자인 바움가르텐은 “미학이란 감각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무예 동작이 주는 사자의 강함, 독수리의 날카로움, 뱀의 부드러움, 용의 변화무쌍함 등 내적인 속성과 연관된 외적인 형상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 그리고 그 인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몸짓은 모두 미학의 훌륭한 소재가 된다. 앞으로 무예철학이 가장 많이 의지해야 할 분야이다. 그 외에도 교육철학, 실천철학, 사회철학 등 철학 전반의 관점에서 다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철학은 거의 모두가 무예, 체육, 게임 등에 대해 철학적 ․ 미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조건을 진술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다.
전통무예의 존재 가치?
무예는 그 목적성 ․ 의도성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의도론을 따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정통철학에서 다루기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듀이를 비롯한 의도론자들은 우연의 산물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목적이나 의도는 예술의 필수조건이다. 예술 활동은 물론 다른 모든 인간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과녁이 없다면 활 쏘는 궁사를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먼저 무예의 존재 가치를 C. J. 루이스(Lewes)가 제시한 방식의 미학적 분석법에 대입시켜 보면 대략의 답이 나올 것이다.
“인간적 실존에 바람직한 것(the preferable), 단지 나만의 자의적 취향에 의하지 않고 어느 객관적인 합리성에 기반한다는 의식을 수반하는 것. 가치란 개인의 이해 관심을 넘어서는 것으로 의식되는 바람직함이다. 그리고 그것은 목적에 관련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1) 목적에서의 유용성(utility), 2) 바람직한 것에서의 수단이 되는 외향적 혹은 도구적인(instrumental) 가치, 3) 쾌(快)한 체험을 일으키는 내속적(內屬的)인(inherent) 가치, 4) 목적으로서 혹은 그 자체에서 바람직한 내향적인(intrinsic) 가치, 5) 그 체험을 포섭하는 커다란 전체에 기여하는 공헌적인(contributory) 가치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이 행하는 문화적 행위에 대해 우리가 ‘바람직한’이나 ‘가치 있는’ ‘존경할 만한’이란 개념을 사용할 수 없다면, 미래의 계획을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도덕적 이론은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같은 원칙을 고수하는 측면에서나,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처럼 결과적인 측면에서 ‘좋은’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이론으로 대략 구분된다. 전자를 ‘의무론’이라 칭하며, 후자를 ‘결과론’이라 일컫는다.
결과론자들은 미적 가치가 도덕적 가치로부터 파생되는 것임을 증명하려 애쓴다. 즉, 예술적 ․ 미적 가치란 사람들이 도덕적 원칙을 이해하고 따르며 바람직한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행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체육은 인간 상황에 관한 인식을 확장시키며, 결국 도덕률을 따르고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배출한다고 본다. 이러한 가정은 여타의 무수한 일상적인 활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우리는 무예 수련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자기방어와 어떤 목적 아래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며, 그에 필요한 신체적 조건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재된 공격적 욕구를 해소(실은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신체오락 활동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미래에도 전통무예가 건실하게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냥 ‘그렇다’는 대답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통무예의 재미(interessant), 그리고 취미활동 모든 예술 작품에는 어느 힘, 우리를 자극하는 힘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가리켜 동사 interesser의 현재분사 interessant(관심을 갖게 하다)을 형용사로 쓰며 나타난다. J. G. 줄처(Sulzer)는 “재미야말로 미적 대상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질이다. 재미있는 대상은 무릇 정신의 내적인 활동성을 높이며, 이 활동성이야말로 본래 인간의 가치를 구성한다. 자연이 우리들을 행하게 하고자 하는 바의 것은 살아 있는 활동적인 인간, 활동성을 갈망하는 인간이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영혼의 활력’을 활성화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며, 이 목적은 인간 본성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취미(taste)라는 개념은 미적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18세기에 도입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취미의 철학적 의미와 현재 한국어로 우리가 인식하는 취미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이다. 영국의 철학자 D. 흄은 “취미란 시각 ․ 청각 등 감각과 유사한 인간 능력이며, 취미의 판단은 듣고 보는 것의 판단과 동일한 경험적 토대 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취미란 말은 일본어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taste의 용법에는 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미의 판정 능력으로서의 취미’가 아니라, ‘여가를 보내는 방식으로서의 오락’이라는 용법으로 사용하는 hobby를 말한다.
현대인들은 넘쳐나는 여가시간의 상당 부분을 육체의 휴식, 체육활동, 경기 또는 예술 감상에 투자하면서 자신의 존재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를 확인한다. 특히 체육활동을 통해 보다 조화롭고 완미한 신체로 거듭나고자 한다. 인간이 아무리 진화를 통해 탈동물화를 추구해왔다고는 하지만 동물로서의 원초적인 욕구, 즉 크고 강한 육체에 대한 바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전통무예 십팔기 중 권법. © 한국무예신문 |
|
현대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무예 혹은 체육 종목을 창조해 내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러 가지 양식의 새로운 오락애호가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인 신체 오락활동들 중 어떤 것들은 모험으로 자극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발전하거나, 심신건강과 사회안정에 해로운 반문명적인 행위로 타락하는 것들도 있다. 따라서 체육활동을 통한 미육(美育)은 체육의 오락방면의 요구에 올바른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전통무예가 여가를 보내고, 신체를 다듬는 고유한 체육활동의 역할에 얼마나 충족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강함에 대한 본능적 욕구, 강한 척 하고픈 인간의 자존심이 살아있는 한 전통무예에 대한 수요는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전통무예의 미적 질, 미적 범주 감각적으로 지각된 성질 가운데 오감이 직접 파악하는 성질에 기반하면서 그 자극을 반성적으로 다시 파악했을 때, 바꾸어 말하자면 대상의 모습을 맛보도록 파악했을 때 나타나는 성질을 미적 질(aesthetic qualities)이라고 한다. 또한 미적 범주(aesthetic categories)란 개개의 질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미적 개념을 상호 관련지으면서 체계적으로 전개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전자는 20세기 특히 후반에 영미 계통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후자는 19세기 독일 미학 이론을 계승하여 20세기 초에 부여된 명칭으로 현재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스웨덴의 미학자 G. 헤르메렌은 미적 질을 다음의 다섯 종류로 대별하였다.
1) 정서적인 질(emotion qualites) : 음습한, 엄숙한, 화사한, 감상적인, 기쁜, 슬픈, 우울한, 쾌활한, 열광적인, 음란한 등등.
2) 행동의 질(behavior qualites) : 대담한, 신경질적인, 힘찬, 격한, 열렬한, 초조한, 얌전한, 우미한, 너그러운, 뛰어난, 거룩한, 딱딱한 등등.
3) 형태의 질(gestalt qualites) : 통일된, 따로따로 떨어진, 수미일관된, 긴밀한, 단순한, 균형이 잡힌, 조화로운, 혼돈된 등등.
4) 취미의 질( taste qualites) : 우아한, 유쾌한, 지나치게 강렬한, 야한, 그림 같은, 숭고한, 아름다운, 저속한, 서투른, 비속한, 추한 등등.
5) 정동적(情動的)인 질(affective qualites) 또는 반응의 질(reaction qualites) : 우스운, 골계적인, 놀랄 만한, 귀여운, 충격적인, 도발적인, 신비적인, 인상적인 등등.
이것들 가운데 운동미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대상의 구성상 형식적인 특징인 2)와 3)은 명료하나, 다른 것들은 상사적(相似的)으로 보이고, 1)은 행위자나 감상자가 그 정서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것임에 대하여, 5)는 ‘반응 질’이라고 하듯이 감상자가 실제로 반응함으로써 현실화되는 질이다. 또 2)는 사람의 행동 방식을 은유적으로 적용한 것이며, 4)는 어느 시대에 취미의 규범이 비평가나 감상자들에 의해 주관화되는 것이다.
미적 범주라는 경우의 category란 어원적으로 술어의 의미이며, ‘고발하다’ ‘논하다’의 의미인 그리스어 kategorien에서 유래한 말로써 특정한 형용사 다발을 가리킨다. 내용적으로 보아 현저한 차이는 전통적인 미적 범주론이 미를 중심으로 숭고 ․ 우미(優美) ․ 비극적 ․ 희극적 ․ 추함 등 극히 소수의 종류로 구성된다. 전통무예를 현재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체육 혹은 스포츠로 규정짓고서 위의 분류대로 대입시키면 손쉽게 체육미학으로서의 형태가 갖춰질 것이다.
전통무예는 어떤 덕성을 추구하는가? 그렇지만 현대의 격투체육은 그 분류의 불분명함 때문에 그 추구하는 도덕적 규범이 “스포츠맨십이냐, 무예정신이냐, 무덕(武德)이냐”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인간완성을 목표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구호일 수밖에 없다. 이 점 역시 그 연원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 무예만의 정신이라고 내세우기에는 막연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명확한 학문적 구분 아래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덕성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병가오덕(兵家五德) ; 지(智), 신(信), 인(仁), 엄(嚴), 용(勇)
화랑오계(花郞五戒) ;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
중국 무협(武俠) ; 협절(俠節), 신의(信義)
일본 무사도(武士道) ; 의(義), 용(勇), 인(仁), 예(禮), 성(誠), 충(忠)
고대 그리스의 덕(德) ; 지혜(智慧), 용기(勇氣), 절제(節制)
고대 서양 자연의 덕(德) ; 신중(愼重), 절제(節制), 용기(勇氣), 정의(正義)
기사도(騎士道) ; 신중(愼重), 절제(節制), 용기(勇氣), 정의(正義), 명예(名譽), 예절(禮節)
무예, 무술, 놀이의 분류 일단 무예에서 떨어져 나온 체육(스포츠, 혹은 놀이)은 다른 기술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배타적인 성질을 지닌다. 정해진 룰에 따라 단순하게 정해진 기술을 반복적으로 실행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유지하려 애쓰게 된다. 단지 보다 많은 애호가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운영의 묘만 살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대부분의 현대무예(호신용 무술, 체육무도)에 무예철학을 대입시키는 것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된다. 그 목표하는 바가 서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역사적 굴곡에 의해 한 세기가 넘도록 자신의 전통무예를 잃어버렸었다. 무예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온갖 무예(호신술)들이 수입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혼란 및 조작이 자행되었다. 이런 헛된 작업들이 전통무예의 학문적 전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어 그들 스스로의 미래 설계를 점점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누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한 사실일진대, 무예인들 스스로가 이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인들의 기억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연원에 대한 꾸밈없는 고백과 반성, 그리고 비판을 받아들이고서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냉철한 학문적 자세로 무예의 역사를 이야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예 담론의 확장을 위해 혹자들은 우리나라에는 신학은 있어도 종교학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학을 과학 하는 학문으로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신앙으로서만 다룬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각자 저마다 믿는 종교를 그저 미화하기에 급급했다는 지적이다. 무예계(호신체육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사실 그동안의 태권도가 이룩한 성과 내지 공과가 워낙 지대하고, 그 세력 또한 감히 필적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태권도가 주장하는 왜곡된 역사와 그로 인한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애써 모른 척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당연히 다른 모든 일본무도들도 뒤따라 별 저항 없이 역사를 왜곡해 왔다. 어쩌면 이는 무(武)를 천시하던 전통적인 풍조에서 비롯된 무관심이 원인일 수도 있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학자들이 굳이 이 분야에 들어와 시시비비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앞에서 제시한 문제들을 그대로 두고는 그 어떤 철학적 전개도 논리적 당위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모든 식민무예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어쨌든 태권도를 비롯한 몇몇 일본무도들이 제도권에 진입했으면서도 학문 전반에 걸친 분야로부터의 객관적인 비판을 받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지나치게 목적(의도)론을 따르다 보니 이런 기본적인 모순조차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무도들이 처한 상황이 과거와 같지 않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중국 무술로 하찮게 여겼던 십팔기가 전통적인 것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부터 일본무도의 역사는 물론 정체성, 민족무예(?)로서의 주체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어졌다. 간단하게 말해 진짜 주체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부터는 전통무예는 십팔기를 중심으로 이야기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에 씌여진 무예에 관한 모든 글들에 새로이 ‘십팔기’라는 단어가 추가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누구든 십팔기를 이야기할 때 당연히 “그렇다면 검도는? 유도는? 우슈는? …?”라는 질문이 이어지게 되어 있다. 태권도나 택견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필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수없이 겪어온 일이다. 결코 피해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것이든 스스로 습합 ․ 심화 ․ 변화 ․ 발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학문할 이유가 없어진다. 문화로서의 무예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따라야 할 것이다. 종목 간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하고, 여러 분야의 학문에서 도움도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무예학’을 커리큘럼에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전통무예가 이대로 호신술 내지는 체육으로서 머문다면 학문의 대상으로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화란 과거와 현재 모두에 있어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개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정의들은 계속해서 발전되어 가고 있고, 또 세련되어 가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은 관점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위에서 든 구체적인 예들이 비록 타당하다 해도 그것 자체가 진정한 앎을 위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먼저 편견을 버려야만 한다. 이 땅의 모든 전통무예가 본연의 무예정신으로 돌아가, ‘있는 그대로’ 의 과거를 인정하는 반성적 성찰이 있어야만 진정한 무예철학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