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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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계광의 6기와 임진왜란이 무슨 연관이 있나?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 들어선 왕조나 정권은 이전과는 반대되는 정책을 쓰기 마련이다. 명나라 역시 원나라의 개방정책에 반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하여 허락 없이는 널빤지 하나 바다에 띄우지 못하게 했는데 다행히 조선은 의주를 통한 육로가 개척되어 굳이 위험한 해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로 인해 동북아에서 한민족의 해양지배권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명대(明代) 해상무역 봉쇄로 인해 가장 답답한 건 왜국이었다. 하여 명과 조선의 해안에 왜구들의 노략질이 극심했었다. 척계광은 절강성과 복건성 일대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조선의 이성계나 이순신처럼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사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한반도를 거쳐 중국에 쳐들어가 직접 교역을 터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국에선 만력위국조선전쟁(萬曆爲國朝鮮戰爭)이라 부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당시 무비(武備)를 소홀했던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선조(宣祖)가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가서야 명(明)의 구원군을 맞게 된다.
1593년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으로 건너와 평양에서 왜군을 대파하자 선조가 제독영에 직접 찾아 위무하는 자리에서 “지난 전투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이겼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묻자 이여송이 대답하길 “앞서 온 북장(北將) 조승훈(祖承訓)은 여진족을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전쟁에 불리하였으나 지금 제가 와서 사용한 병법은 곧 왜적을 방어했던 척장군(戚將軍)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했기 때문에 전승(全勝)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은 기마병인데 비해 남방 왜구들은 보병이었기 때문에 전술이 달랐던 거다. 이여송 제독은 척법(戚法)으로 훈련된 남방의 절강군(浙江軍)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선조가 《기효신서》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이여송이 군사비밀이라며 거절한다. 그러자 역관을 시켜 몰래 그 책을 구한 다음 유성룡에게 해득케 했으나 그도 알지 못하는지라 당시 천문·지리·병법에 밝은 한교를 추천받아 책을 보여주었지만 그 또한 해득 불능이었다.
그러던 중 이여송 휘하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의리가 있어 유성룡에게 “우리 명군이 돌아가면 조선이 홀로 어찌 지키겠소? 그러니 명군이 돌아가기 전에 기회를 봐서 군사 조련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권한다. 이에 유성룡이 서둘러 한교를 낭관으로 삼고 70명의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낙상지 휘하 병사 10명을 교관으로 삼아 밤낮으로 창(槍), 검(劍), 낭선(狼筅)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이들이 교관이 되어 조선군에 척법(戚法)을 가르쳐 왜적들과 싸우게 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군은 척계광의 사(射, 궁수), 포(砲, 총포수), 감(砍, 창검수)의 삼수기법(三手技法)을 배우고, 1595년에는 명의 유격장군(遊擊將軍) 호대수(胡大受)에게서 직접 삼수군(三手軍)이 훈련을 받는다. 한교 역시 유격장군 허국위(許國威)에게 창법(槍法), 패법(牌法), 선법(筅法) 등을 물어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 중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를 따로 책으로 편찬하니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예서(武藝書) 《무예제보(武藝諸譜)》다.
이렇게 해서 척계광의 무예6기가 임진왜란 중에 조선군에 전해지게 되었다.
▲ 원앙진의 기본 대형. 길고 짧은 무기들이 서로를 구원하면서 적과 전투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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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계광의 6기(六技)가 십팔기(十八技)로 늘어난 과정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후금(後金)이 북방에서 발기하자 그에 대비하여 권법(拳法), 월도(月刀), 협도곤(挾刀棍), 왜검(倭劍)으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을 펴냈으며,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淸)에 항복하게 된다. 이후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을 준비하다 요절해버렸으나 조선 조정은 북방의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해 긴 병장기(兵仗器)를 다루는 기예를 꾸준히 개발해 나갔다. 또 숙종(肅宗) 때에는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이 사신을 따라 왜(倭)에 건너가 검보(劍譜)를 구해와 왜검(倭劍)과 교전(交戰)으로 체계화하였다.
영조(英祖) 때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섭정(攝政)할 때 그동안의 모든 무예 18가지와 응용종목인 기예(騎藝) 4가지를 완성하여 도합 22기로써 《무예신보(武藝新譜)》를 펴낸다. 조선의 국기 ‘십팔기(十八技)’란 이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십팔기는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鏜鈀), 낭선(狼筅),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월도(月刀), 협도(挾刀), 등패(籐牌), 권법(拳法), 곤봉(棍棒), 편곤(鞭棍)을 다루는 18가지 기예라는 뜻으로 십팔기인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는 군사오락인 마상재와 격구를 부록하고, 이 모든 과정을 통지로 펴내게 하니 그게 바로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고대종합병장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2백여 년에 걸쳐 완성한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후 조선에선 군사를 훈련시킴은 물론 무과(武科) 시험과목이었다.
- 전통무예 십팔기,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기 바란다. 십팔기는 왕명으로 정한 공식 명칭, 즉 조선 국기의 고유명사로 무예십팔기, 무예십팔반이라고도 불렀다. 한국 역사에는 십팔기 외의 무예는 단 한 종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은 민간의 무장이나 무술이 허용되던 나라가 아니었다. 현재 시중의 대부분 무술 혹은 무도는 일제식민무술이거나 중국무술,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 나름으로 만든 창작무술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은 십팔기가 조선의 국기인 줄도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무를 경시하는 풍조와 식민지배 흔적이 아직도 무예 분야에는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십팔기를 중국무술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지만 중국에는 십팔기란 용어가 없다. 다만 《수호지》와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란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무예가 아니라 18종의 각기 다른 무기를 나열한 것으로 그때마다 무기 종류도 일정치 않다.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는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연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87년에 대학 동아리인 ‘전통무예전국대학생연합’이 결성되어 십팔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에 ‘전통무예’란 용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무기를 다루다 보니 아무래도 호신술로는 인기가 많지 않아 수련 인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 중국에서는 현재 무예가 남아있지 않는데 그 이유와 십팔기를 통한 중국과의 교류 현황은?
안타깝게도 중국에는 척계광의 6기(六技: 등패, 낭선, 당파, 곤, 장창, 권법)는 물론 다른 무예도 일절 남아 있지 않다. 중국 유일의 병장무예서인 척계광의 《기효신서》만 전하고 그 실기는 멸실했다. 대신 소림사로 대표되는 수많은 민간호신술들만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군사무예의 특성 때문이다. 세계의 어느 왕조든 멸망하게 되면 그때까지의 무기체계와 그것을 다루는 무예는 말살 혹은 멸실하게 마련이다. 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고대 병장무예의 원형이 전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호신술은 왕조의 흥망과 상관없이 민간에서 전승될 수 있었다.
한국도 조선의 멸망과 함께 십팔기가 말살되고 대신 검도, 유도, 카라테 등이 이식되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오공(晤空) 윤명덕(尹明德)–해범 김광석으로 그 실기가 간신히 전승되었다. 게다가 조선 왕조에서 그 교본으로 편찬한 《무예도보통지》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어 완벽한 재현이 가능했다.
▲ <도서출판 동문선>을 운영하며 무예 관련 다양한 서적을 출간한 신성대 회장.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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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의 무예문화 교류는 60년대 말 화교학교 체육으로 보급된 권법이 시중에 ‘중국무술’이란 이름으로 보급되었으며, 92년 아세안 게임을 시작으로 「우슈」가 체육 종목으로 들어왔다. 십팔기를 통한 교류는 그동안 없었다. 만약 중국인들이 척계광의 기예는 물론 한중일 3국의 병장무예 정수들로만 뽑아 만든 십팔기를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 틀림없다. 당연히 교류도 활발해질 것이라 예상된다.
십팔기에는 신라 황창랑(黃昌郞) 고사가 그 연기(緣起)가 되는 본국검(本國劍)을 비롯한 한국 전래 무예 9기, 중국 척계광의 6기, 일본 검법 3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을 말 위에서도 응용할 수 있게 하였다. 왜검 3종은 일본에서도 멸실되어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외 공연 시 관객과 관계자 반응 등도 말씀해 주시기 바란다. 3년 전 절강대학 체육과와 서울대학 체육과의 자매결연 행사에서 우슈와 십팔기를 한 무대에서 시연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절강대학 학생들이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또 작년 여름 이탈리아 밀라노 「동양문화축제」에 초청 받아 처음으로 해외공연을 했었다. 전 세계 온갖 무술단체들이 나와 선을 보였는데 십팔기 시연을 보더니 전부 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지켜보았다. 저런 무술은 처음 보았다는 눈치들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제야 환호하면서 진짜 마샬 아트를 보았다며 열광했었다. 그동안 세계인들은 호신술(Self Defense Arts)을 막연히 무예(Martial Arts)로 알고 있었던 거다. 이는 예전의 홍콩과 대만의 무협영화만을 보던 사람이 대륙의 「삼국지」란 전쟁영화를 보고 느낀 충격과 같은 것이겠다.
- 언론에는 십팔기가 갖고 있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소개가 많다. 그리고 십팔기가 갖고 있는 정신이라면? 십팔기는 고대 군사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던 실전무예다. 따라서 민간호신술(武術)처럼 단순히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이 아니다. 무예의 목적은 살상이다. 당연히 그 기예와 정신도 다르다. 무예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살상을 허락받은 집단, 즉 병사들의 기예를 가리킨다. 따라서 쓸데없이 화려한 동작은 제거하고 절제되고 역동적인 실전기술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민간의 무술은 개인적인 기술이지만 무예는 군사들이 진을 짜서 움직이는 기예이기 때문에 동료들과의 협동이 매우 중요하다.
십팔기의 정신은 무덕(武德)과 무혼(武魂)으로 대별할 수 있겠다. 무덕은 곧 병가오덕(兵家五德, 智信仁嚴勇)을 말하고 무혼은 상무(尙武)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호국정신이겠다.
▲ 방운위 인민일보 특파기자에 한국 전통무예를 설명하고 있는 신성대 회장.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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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님께서 전통무예 십팔기를 처음 접하게 된 인연은?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좋아해 검도, 합기도, 쿵푸 등을 조금씩 배우다가 16살(1970) 때부터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인 해범(海帆) 김광석(金光錫) 선생을 만나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 창칼 등 무기류는 감히 배울 엄두를 못 냈기 때문에 대개들 중국 권법류와 봉술 위주로 익혔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 해범 선생님께서 십팔기를 강조하시며 가르치려 했지만 저를 포함한 제자들 누구도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하며 중국 호신권법들을 더 좋아했다. 물론 중국 권법이지만 해범식, 즉 십팔기식으로 변환한 권법이었다. 세계적으로 쿵푸 열풍이 몰아칠 때인지라 우리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유단자가 되고부터 조금씩 무기술(십팔기)을 익히게 되었지만 그저 중국무술의 무기술과 같은 호신술로만 인식했었다.
그러다가 85년 출판업을 시작하면서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에 눈뜨고 나서야 비로소 십팔기의 중요성을 알고서 천착하게 되었다. 이후 해범 선생님을 도와 십팔기와 전통무예에 대한 실기와 이론서들을 출판하였고, 2006년에는 직접 쓴 《무덕(武德)- 武의 문화, 武의 정신》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록 무덕을 다루었지만 덕(德)을 주제로 다룬 책으로는 동양 최초가 되겠다. 십팔기에 입문한지 올해로 44년이 되는데 지금은 무학(武學)을 주제로 글쓰기와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장을 맡아 십팔기를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 보존회장까지 맡고 계실 정도로 십팔기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계신 이유는? 십팔기는 단순한 민간 호신술이 아니다. 국가가 직접 체계화시킨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대종합병장무예다. 더구나 중세시대 한반도에서 두 번에 걸친 국제전의 결과로 남겨진 실전무예로 동양3국 무예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과 가치 때문에 누군가가 이를 보존하고 전승해야할 의무가 있다 하겠다. 고대나 현대 올림픽이 군사무예를 체육화시키면서 시작되었듯이 미래의 동양체육도 십팔기와 같은 고대병장무예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연극, 영화, 게임 산업 등에 끼칠 수 있는 영향도 지대하다.
참고로 십팔기는 정조가 직접 명명한 조선 국기의 고유명사다. 해서 18기가 아닌 ‘십팔기’로 표기해 한다. 6기, 22기, 24기 등은 수사이므로 그렇게 표기하는 게 맞다. 십팔기도 가짓수로 표기할 때만 18기가 되겠다. 《무예도보통지》에는 십팔기를 마상에서도 할 수 있도록 마상4기와 군사체육인 마상재, 격구를 부록으로 실어 모두 총 24개 종목이 실려 있지만 이후 조선 말기까지 실록과 다른 모든 문헌에는 항상 ‘십팔기’로만 불렀다.
- 지난 4월 28일 시진핑 주석이 위구르를 방문했을 때 직접 척계광의 6기를 언급했다. 시주석의 발언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신장(新疆)위구르 自治區 카스(喀什)지구 내 공안국 산하 파출소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경찰봉을 보고 “왜구(倭寇) 격퇴에 업적을 세운 명(明)의 장수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떠올랐다”면서 “5명이나 7명씩 대나무 창을 이용해 왜구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 뒤에, 방패를 든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 격살했다”고 한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시진핑 주석이 일본과의 과거사 및 영토문제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를 내비친 사건이라 하겠다.
이번에 시주석이 언급한 척계광의 격법(擊法)은 낭선, 등패, 장창, 당파를 가진 12명의 병사들이 한 조를 이루어 2열로 진을 짜서 왜구를 척살하던 진법(陣法)으로 원앙진(鴛鴦陣)이라 부른다. 낭선은 대나무 끝에 창을 꽂고 가지마다 날카로운 철편(鐵片)들을 달고 독을 묻혀 장도(長刀)를 든 왜구의 접근을 방해하고, 그 좌우에 표창(鏢槍)과 등패, 그리고 요도(腰刀)로 무장한 등패수가 공격과 방어를 하면 뒤에 있던 장창수와 당파수가 그 틈새를 뛰쳐나가 적을 찌르는 법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은 역사상 중국이 일본과 벌인 첫 전쟁이며 승리한 전쟁이다. 더구나 명조(明朝) 연합군이 왜적을 물리친 전쟁으로 4백 년이 지난 오늘의 한중일 간의 과거사 및 영토분쟁의 갈등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지난날 절강성장을 지낸 적이 있는 시진핑 주석이 굳이 임진왜란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신성대 회장과 십팔기보존회원들. ⓒ 한국무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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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주석 발언을 계기로 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가 갖고 있는 중국과의 교류 확대 계획은?
이처럼 끊임없이 서로 주고받기를 거듭하면서 소멸, 변질, 창조되어가는 것이 문화의 속성이다. 가령 십팔기 중 예도(銳刀)는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중국 모원의(茅元儀)의 《무비지(武備志)》를 통해 되찾은 고대검법이다. 모원의는 그 사연을 밝히고 ‘조선세법(朝鮮勢법)’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후 모든 중국 검법의 모태가 된다. 지난날 공자묘(孔子墓)에 제사지내는 법을 잃어버렸던 중국이 한국에 남아있는 제례법을 가져간 적이 있다. 또 얼마 전 한국전쟁 중 전몰한 중국군 유해를 돌려주었다. 중국인들도 척계광의 무예6기의 원형이 한국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 놀라고 반가워 할 것이다.
만약 시진핑 주석의 방한 때 척계광의 무예 시연을 보여주고 이참에 그 기예까지 중국으로 되돌려준다면 또 하나의 기쁜 선물이 되겠다. 특히나 절강성에서 관심을 많이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진정한 문화교류란 이런 것이겠다.
이는 한국이 420여 년 전 중국이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역사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물론 현재 과거사 문제 등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본 아베정권에 보내는 무언(無言)의 경고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런 게 문화를 이용한 창조적 외교솔루션이다.
-기효신서(紀效新書)란? 1560년(嘉靖 39)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이 절강현(浙江縣) 참장(參將)으로 있을 때 왜구(倭寇)를 소탕하기 위하여 편찬하였다. 권1 속오편(束伍編)으로부터 권18 치수병편(治水兵編)에 이르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왜구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습지가 많은 중국의 절강 지방 등을 노략하였다. 이를 소탕하는 데에는 종래 북방 유목민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편제된 군제(軍制)와 무기 및 전술이 적합하지 않았다. 왜구의 기습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소부대의 운용과 접근전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병법을 절강지방에서 나왔다고 하여 절강병법(浙江兵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확한 지휘편제와 연대책임을 강조하는 속오법(束伍法)을 채택하고, 조총(鳥銃)·등패(藤牌)·낭선(狼筅)·장창(長槍)·권법(拳法) 등 다양한 기예와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전투 후였다. 선조는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기효신서》의 전법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 책을 입수하여 그 전법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병학지남>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절요의 형식으로 각 군에 배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