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교육’과 ‘선비정신’이 화두다. 마치 그게 부족해서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된 양. 과연 그럴까? 과연 우리가 선비정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구현시켜야 할까?
조선에서의 선비[士]란 샌님[生員], 유생(儒生), 즉 문사(文士)를 일컫지만 일본이나 유럽에선 무사(武士), 즉 기사(騎士)를 이르는 말이다. 장기판에서도 사(士)는 왕의 최측근 호위무사를 말한다. 중국과 한국을 제외한 근대 이전의 모든 왕조에서 문사(文士)는 사(士)가 아니었다. 그저 살림살이 맡아 관리하는 집사(執事)였을 뿐으로 사(士)가 될 수 없었다. 신사(紳士)처럼 띠를 두를 수 없다는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에겐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선비가 될 수 없는가?
판사(判事), 검사(檢事), 변호사(辯護士), 교사(敎師), 의사(醫師), 간호사(看護師) 기사(技士), 건축사(建築士), 미용사(美容師), 법무사(法務士), 세무사(稅務士) 등등, 오늘날의 각 직능별 호칭에 붙이는 ‘사’에서 그 혼동이 그대로 드러난다. 대체로 기능직 종사자나 하급 군인들에게 사(士)자를 붙이고 있다.
‘선비’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우리말이라 한다. 순 우리말인지 고려 때 들어온 몽고말인지 그 어원이 분명치는 않지만 아무튼 한자 ‘士’ ‘儒’ ‘彦’을 ‘선비’로 훈독한다. 고대 갑골문에서 ‘사(士)’는 남성의 생식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남성을 지칭하게 되었다.
‘유(儒)’는 떨어지는 물과 팔을 벌리고 선 사람을 그려 제사를 지내기 전 목욕재계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그린 데서 나왔다. 제사장은 그 집단의 지도자로서 경험과 학식을 갖춘 남자여야 했으니, 이후 자연스레 학자나 지식인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고대의 제사란 곧 통치수단이자 예법의 기준이었으니 유학(儒學)이란 예학(禮學), 즉 매너학이라 할 수 있겠다. 지배층을 위한 이 제례법을 민간에 퍼트린 이가 바로 공자(孔子)였다. ‘언(彦)’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얼굴에 문신을 새긴데서 비롯된 글자로 나중에 재덕이 출중한 사내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한데 양반은 문반(文班, 東班, 鶴班)과 무반(武班, 西班, 虎班)을 일컫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비를 문사(文士)로만 인식하지 무사(武士)로는 선뜻 수긍하질 못한다. 가령 교수나 교사는 당연히 선비라 여기지만 군인에게는 선비란 말을 붙이길 꺼려하는 것이 한 예가 되겠다. 조선시대 숭유억무(崇儒抑武)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아무렴 이처럼 문무(文武)를 나누는 인식체계는 한국인의 사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뿌리 뽑힌 반도의 무혼(武魂)
한민족의 상무숭덕(尙武崇德) 정신, 즉 무덕(武德)은 고려 삼별초군의 멸망과 함께 반도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의 무사들은 왜 그토록 끝까지 원(元)에 저항했을까? 왕과 문신들은 이미 항복하였음에도 유독 그들만은 강화도, 완도, 제주도로 쫓겨 다니며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지막까지 싸웠을까? 감히 원(元)나라를 우습게 본 어리석음 때문일까? 한민족의 불굴의 투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살기위해 죽기로 투쟁한 것이다.
역사상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에서 패하면 패전국의 무장(武將)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게 무슨 말씀? 사로잡히거나 투항한 적장(敵將)에게 관용을 베풀어 신하로 삼은 고사도 적지 않은데! 라고 항변할 이도 있겠지만, 기실 그런 일은 한창 전쟁 중에나 드물게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미 승리가 확정되어버리면 어김없이 적장의 목을 친다. 설사 항복했다한들 살려두었다간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도 서슴지 않는 마당에 적장을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겠다.
대신 문신들은 죽이지 않는다. 정복한 나라를 다스리는데 요긴하기 때문이다. 새 왕조에 협조하지 않는 자도 그냥 내버려 두는 관용을 베푼다. 그래야 백성들을 안심시켜 새 왕조에 복종하게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킬 능력이나 배짱이 없다. 설사 반란을 획책해도 스스로는 힘이 없기에 불만세력들을 규합하는 와중에 대부분 들통 나게 마련이다.
하여 고대에는 어느 왕조가 멸망할 때 필시 죽임을 당해야 할 패전국의 무장들은 이웃 나라로 도망을 갔다. 이른 바 망명이다. 오늘날 중국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동남아 깊은 산속 오지에 사는 소수민족 중에는 먼 옛날 그렇게 숨어들어 간 장수와 그 일속들의 후예들이 적지 않다. 조선 인조 때 명(明)에 귀화했다가 청(淸)에 포로가 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참수당한 임경업 장군도 그 한 예가 되겠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만주로 넘어가 항일 투쟁을 하던 의병들 역시 대부분 조선 군인들이었다.
고대 일본의 지배층은 가야와 백제 유민(流民)
일본의 고대사는 도래인(渡來人), 즉 반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반도에 변란이 생길 때마다 도망 온 왕족, 귀족, 무장들과 그 일속들이 세운 나라가 바로 ‘왜(倭)’다. 고대 일본의 국가 형성기와 발전기는 한반도의 변란과 그로 인한 대규모 유민의 도래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초기 가야인들은 부산과 가까운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 지역에 자리 잡았으나 차츰 간사이(關西)지방으로 확대해나갔다. 일본의 초기 형태의 국가는 나라(奈良)분지에 세운 ‘야마도(大和)’인데, 이는 5-6세기 대규모로 도래해온 가야인(伽倻人)들에 의해서였다. 다시 7세기에 백제인들이 대거 도래하면서 비로소 국가다운 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이후 고구려, 발해가 연이어 망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도래하였는데 그들은 주로 동북지역에 흩어져 터를 잡았다.
▲ 조선의 국기 십팔기(十八技) 중 기창(騎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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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사의 수수께끼, 기마무사(騎馬武士)의 출현
사무라이(武士)를 빼놓고는 일본 문화를 이야기 할 수 없듯이 일본의 역사는 곧 사무라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원래 사무라이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무사(騎馬武士)를 가리켰다.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고 바쿠후(幕府)에 의한 평화로운 에도(江戶)시대가 열리자 모든 사무라이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다만 신분의 상징으로 칼만 차고 다니도록 허용한데서 지금의 사무라이 이미지가 남은 것이다.
처음에는 신분이 낮은 신하들과 노예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직 자기 주인에게만 복종하는 특수한 집단이었다. 이후 영주들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고 격렬해지자 이들의 신분도 점차 상승하였다. 1192년, 관동 지방의 무사 집단이 가마쿠라(鎌倉)에서 군사 권력 기구인 바쿠후(幕府)를 설립하여 중앙정권을 통제하는 세력으로 컸다. 그리하여 1603년에 법령으로 무사의 신분을 고정시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우두머리로 하였다. 무사가 일본 사회의 주요한 통치 계층이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사무라이의 탄생 기원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다. 기마무사라고 하는 이 독특한 무사계급이 언제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 아직까지 딱히 정설이 없다. 나라(奈良)시대 말기, 대개 770년 전후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고닌(光仁) 천황이 쇠락하고, 귀족 세력인 영주(領主)들이 득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하와 가솔들을 무장하게 하는데, 이들이 사무라이(武士)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 늦게는 11세기 초로 주장하기도 한다. 공통적인 주장은 이들 무사시 부시단(武藏武士團)이 일본 동북지역에서부터 갑작스레 출현하여 지방 호족들의 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기실 어떤 사회든 그만큼 숙련된 기마무사 집단이 출현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동인(動因)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 일본에선 전쟁다운 전쟁도 없었다. 게다가 고대로부터 일본에 말(馬)이 흔해서 북방민족처럼 기마전을 자주 치렀던 민족도 아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외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겠다.
사무라이(武士)의 시작은 신라 화랑(花郞)
일본 헤이안(平安)시대 중기 드디어 천년 왕국 신라가 멸망(935년)한다. 당연히 망국의 수많은 무장들과 그 일속들이 북쪽 변방이나 왜국으로 망명을 갔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 간 그들은 대부분 일본 동북지방으로 이주해갔다. 먼저 도래한 가야 백제계의 터전인 간사이(關西)지역은 정서적으로 융합하기 어려웠을 것이니 차라리 고구려 발해계가 대부분인 동북 및 간도(關東)지역을 택했을 것이다.
당시 그곳에는 먼저 이주해온 고구려 발해계 호족들이 거친 땅을 개간하며 살았는데, 반도의 마지막 도래인인 신라 화랑의 후예들이 이들 호족들의 땅과 재산, 생명을 지켜주는 호위무사로서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뛰어난 무예와 충성심으로 차츰 그들만의 세력을 형성해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사무라이라고 하는 독특한 중간 지배계급층이다.
고작 개척한 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굳이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갑옷을 입은 기마무사라는 특수한 집단을 양성해냈을 것이라는 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 ‘신라의 멸망과 화랑 후예들의 도래(渡來)’라는 퍼즐 조각을 갖다 맞추면 일본 고대사가 완전하게 아귀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 도래한 이들 무사단의 세력이 차츰 커져 일본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각 호족들은 치열한 항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12세기 말 가마쿠라 바쿠후(鐮倉幕府)에서부터 남북조(南北朝)시대를 거쳐 16세기 중엽 전국(戰國)시대까지 일본 중세사를 붉게 물들인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은 동서진영으로 나뉘는데, 1600년 10월 2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이 세키가하라에서 맞붙어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드디어 역사의 중심이 후(後) 도래계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신라계 사무라이 세력이 백제계를 누르고 일본 천하를 장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반드시 부침하게 마련. 에도시대(江戶時代) 말기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주창하며 쇼카손주쿠(松下村塾)학당을 열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역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리고 그의 수제자로 4대 천왕이라 불렸던 요시다 토시마로(吉田稔麿),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리에 쿠이치(入江九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 즉 삿쵸 동맹을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정치ㆍ군사적 기반을 마련해 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또 명치유신의 영웅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목숨을 아끼지 않는 개혁주의자 또는 혁명가였던 이들 명치유신의 주역들은 모두 지난 날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했던 간사이(關西)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들이다.
전쟁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증명되고, 전쟁을 해야만 공(功)을 세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사무라이(武士) 계급. 일본이 끊임없이 전쟁을 하게 되는,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武)의 나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바로 고대 한반도에서 쉼없이 도래한 무인(武人)집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의 삼별초들은 왜 일본으로 건너가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을까? 당연히 일본으로의 귀화를 타진해보지 않았을 리 없다. 강력한 무사집단을 가지는 건 모든 영주의 꿈, 아무렴 그들을 받아들여 무력을 키우고 싶었겠지만 그랬다간 호랑이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거나 다름없는 일. 원(元)의 침입이 두려워 일본은 물론 남송(南宋), 유구(琉球) 중 어떤 나라도 그들을 환영할 수가 없었다.
문(文)의 민족, 무(武)의 민족
오사카(大阪)와 도쿄(東京)의 지방색이 뚜렷이 달라 서로 배타적인 점이나 역사의 중심이 간사이(關西)에서 간도(關東)로 옮겨가게 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동인에 의한 작용일 수 있겠다. 하여 일본인들의 깊은 내면에 반도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며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땅으로 여기는 것도 어쩌면 이 도래인(渡來人)들의 오랜 염원이 아닐까? 드디어 그 염원을 이룬 한일합방 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한 것도 그 같은 내면적 정서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적으로는 6할 이상이 동일한 민족이지만 이 같은 쉼 없는 한반도 무인들의 일본으로의 이주가 두 나라 국민의 문화적 특질을 뚜렷하게 갈라놓았다고 볼 수 있다. 무(武)를 숭상하고 기술자를 우대하는 일본, 문(文)을 숭상하고 상업과 기술을 천시해온 조선. 그 근성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만약 원(元)의 침입이 없었다면 한반도 역시 고려 무신(武臣)정권 체제의 지속으로 일본과 비슷한 형태의 중세사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튼 전쟁을 선호하는 무(武)의 나라가 전후 70년 동안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로 손발이 묶여 있다가 드디어 풀려났으니 앞날이 자못 주목된다 하겠다.
갈등의 씨앗, 과거제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고대에는 공신에 오르거나 관리에 등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공(軍功)이 있어야만 했다. 《사기(史記) 상군열전(商軍列傳)》에 ‘종실 사람이 군공(軍功)이 없으면 족보에 넣지 않는다’고 하였을 만큼 오직 승적(勝敵)의 군공만이 유일한 벼슬길이었다.
중국 수양제(隋煬帝)에 이르러 처음으로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했는데 이후 1천3백여 년간 중국의 관리 선발 제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청(淸)말(1905) 학교 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무관(武官)을 선발하는 무거(武擧)는 당(唐)의 무측천(武則天)에 의해 처음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958년 고려 광종 때에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 문벌 귀족들의 권력 및 경제력 독점은 이에 반발하는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도한 무인란(武人亂)은 무반(武班)에 대한 차별과 불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정변으로, 고려 사회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5백 년 동안 진행된 조선 선비 거세 작업
무(武)의 씨가 마른 고려 말에 이성계라는 오랑캐 무장이 나타나 떡 집어 먹듯 나라를 차지하였다. 이성계의 뛰어난 점은 그의 특출한 무예가 아니라 문사들의 근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적절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교를 국본으로 세우고 문무(文武)를 가리지 않고 조선의 선비들을 모조리 거세시켜버렸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귀족 계급 자손들로 하여금 오로지 과거시험을 통해서만 벼슬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 다음 문무과를 철저히 구분하되 문과를 우대하였다. 반대로 남이(南怡), 임경업(林慶業) 등 간간히 생겨나는 무장다운 무장은 쉼없이 솎아냄으로써 씨를 말려나갔다. 하여 이순신 장군도 너무 잘 싸우니까 혹시나 하여 불러다 거세를 확인한 다음 다시 나가 싸우게 한 것이다. 정여립(鄭汝立)처럼 호기(豪氣)를 보이는 자는 벼슬에 있지 않아도 잡아 죽였다. 심지어 무용(武勇)의 성향을 지닌 왕이나 왕세자조차 내쫓기거나 죽임을 당해야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독서를 좋아하면 성군(聖君), 상무(尙武)는 기미만 보여도 폭군(暴君)인 것이다.
그 흔한 귀양도 무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반(武班)은 설사 역모가 사실이 아닌 모함임이 밝혀졌다 해도 결과는 똑같이 죽음이다. 후환이 두려운 때문이다. 반대로 문반(文班)은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이 귀양 보냈다가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다시 불러다 부리면 된다. 하여 귀양길을 나서면서부터 반성문을 지어 구중궁궐 임금님 귀에 들리도록 갖가지 로비를 펼쳤다. 임을 향한 일편단심 아부문학이 곧 한국 고전문학이다.
신라-고려 초기에까지 이어져 오던 문무겸전 정신은 과거제의 도입을 계기로 쪼개지고 만다.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고시의 내용 또한 중세 한국인의 가치 지향, 사유 방식, 사회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선 5백년 동안 고착화된 유교적 인생관은 나라가 망해서도 떨쳐내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어져 우리의 사유 및 행동 양식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과거(科擧)제도는 객관적이고 공평한 인재 선발 방식으로 인류사에서 더없이 훌륭한 제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처럼 문무유별(文武有別)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중간층 사회지배계급을 두 부류, 즉 양반으로 나눠놓고 동반[文班]에게서는 용력(勇力)을, 서반[武班]에게서는 지혜를 뺏음으로써 모조리 거세를 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벼슬을 하려면 지혜와 용력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 누구도 두 쪽을 다 지닐 수는 없었다. 심지어 왕조차도! 하여 모든 사대부를 환관으로 만들어 충효(忠孝)의 경쟁을 시킨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류사에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통치제도가 바로 과거제라 할 수 있겠다.
치욕의 역사는 숙명!
투쟁이 없으니 발전이 없는 건 당연한 이치!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그 유래가 드문 5백년 조선왕조가 가능했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체제안정이 조선 왕조와 사대부들의 지상목표였던 것이다. 해서 나라가 아무리 썩어도 이를 갈아엎고 새 나라를 세울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다. 스스로는 혁명을 할 수 없는 족속이 된 것이다. 결국 일본이 이성계처럼 떡 집어 먹듯 조선을 차지해버렸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북한에서 이 거세 작업이 한창이다. 얼핏 겉보기엔 북한이 호전적인 것 같지만 기실 속내는 거세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3대 세습이 가능한 것이리라. 당연히 때가 오면 4강국 중 먼저 집어 먹는 놈이 임자다. 북한이 망하게 되면 당연히 남한에 흡수 통일될 것이란 건 낭만적인 한국인들만의 생각! 필시 러시아와 중국이 남한(미국)과 함께 북한을 3등분해 차지할 것이다.
한국인의 이름엔 ‘文’과 ‘榮’이 많지만 일본인의 이름엔 ‘武’와 ‘雄’ 자가 많다. 자식에 대한 바람이 서로 다른 것이다. 상무(尙武)를 저급한 것으로 인식하던 조선 선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건 공부가 안 되는 무신들이 할 일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똑똑한 문신들의 몫! 피 흘리는 놈 따로, 권력을 누리는 놈 따로! 문과(文科) 무과(武科)의 구별이 문신들의 군역의무 회피의 심정적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자신들 같이 공부 잘 하는 모범생에게 병역의무는 국가적인 낭비로 여기기 때문이겠다. 대한민국 엘리트들의 병역 기피 전통은 물론 군대 가서 썩었다는 대통령, 군대에 가지 않은 대통령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과거제도 도입 이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상하의 구분만 있었지, 동서(文武)의 갈림은 없었다. 우리 문화에서 쪼개짐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반면 서양이나 일본에선 이런 과거제도가 없었다. 만약 문무겸전의 과거제, 다시 말해 과(科)의 구분이 없는 인재 채용방식이었더라면 한국이나 중국은 필시 지금과는 엄청 다른 역사를 지녔을 것이다.
▲ 자료이미지. 조선시대 장원급제후 금의환향하는 모습의 풍속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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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신의 뿌리, 기사도(騎士道)
기사(騎士)란 중세 유럽의 상층사회에서 활동하던 기마무사(騎馬武士)를 가리킨다. 귀족가문 출신의 자제가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7,8세가 될 무렵, 출신에 따라 등급이 높은 영주의 집에 들어가 영주나 그 부인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12세쯤 되면 견습기사가 되어 주인을 따라 전장에 나가 방패잡이나 종자 역할을 하면서 전문적인 무예와 기사 훈련을 받는다. 21세가 되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기사작위를 받는다. 작위수여식은 여러 형태가 있는데 대개는 칼을 평평하게 뉘어 어깨에 가볍게 대는 방식을 사용했다.
서양 기사의 인격정신, 즉 기사정신은 의무를 가장 우위에 두는 가치 관념이다. 기사는 교회에서 보호하는 선교사, 참배자, 과부와 고아를 보호한다는 선서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기사는 심리적으로 주종관계를 초월하는 사회적 의무감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인격평등의 관념을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가 상징하는 종교정신의 행동준칙이었다.
비록 자신의 주인을 위해 봉사하지만, 정의를 지키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기사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같은 추상적이며 초월적인 정의, 진리에 대한 충성과 의무감은 후대 유럽정신의 이성주의와 인도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기사 정신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동양의 충(忠)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기사도의 유산, 젠틀맨십
서유럽의 문명 중 보편적인 문화성격에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 중세 기사정신의 인격 특징들이다. 기사도는 개인의 명예감이 기초가 된 인격 정신인 동시에 기사 준칙을 자각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자신의 행동방식을 규범화하였다. 그것은 기사에게 직무에 충실하고, 용감하게 전쟁에 참가하며,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만약 자신의 명예가 모욕이나 의심을 받게 되면 결투를 통해 회복하였으며, 궁중예절을 앞다투어 배워 고상한 기풍을 소중히 하였다. 기사정신은 상층의 귀족문화정신으로 개인 신분의 우월감이 기초가 되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도덕과 인격정신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서양 민족의 고대 상무정신의 적극성이 응집되어 있다.
이런 전통은 현대의 유럽인들로 하여금 개인의 신분과 명예를 중시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거지, 즉 매너와 품격에 대해 신경을 쓰며, 정신적인 이상을 숭상하고, 여자를 존중하는 낭만적인 기질을 동경하도록 했다. 또한 공개경쟁, 공평경쟁이라는 페어플레이 정신을 형성케 했으며, 약자 돕기를 좋아하고, 이상과 명예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호쾌한 무인(武人)의 기질을 물려받게 하였다.
19명의 총리를 배출한 영국의 명문학교 이튼 칼리지의 교훈은 1)남의 약점을 이용하지 말 것, 2)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 3)약자를 깔보지 말 것, 4)항상 상대방을 배려할 것, 5)잘난 체 하지 말 것, 6)다만, 공적인 일에는 용기 있게 나설 것이다.
오늘날 스포츠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간정신인 스포츠맨십 역시 이 기사 정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하여 스포츠맨십이란 1)규칙을 지킬 것, 2)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것, 3)화를 내지 말 것, 4)건강을 지킬 것, 5)패했다고 낙심하지 말 것, 6)승리에 도취하지 말 것, 7)건강한 정신, 냉정한 마음가짐을 지닐 것, 8)경기를 즐길 것으로 요약된다.
공정하게 경기에 임하고, 비정상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불의한 일을 행하지 않으며, 항상 상대편을 향해 예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 결과에 승복하는 말이다. 기실 스포츠란 본디 신사들의 놀이. 스포츠를 통해 신사의 자질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맨이라면 메달로 존중받기 전에 신사임이 증명되어야 한다. 매너가 곧 스포츠의 기본기이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산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1)페어플레이를 하는가, 2)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3)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가, 4)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하는가, 5)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하는가를 제시한 적이 있다. 중산층을 단순히 경제적 잣대로 규정해 온 한국인들에겐 엉뚱해 보이지만 신사의 기준이 곧 중산층의 기준인 셈이다. 이처럼 유럽 중세의 기사도(騎士道)는 젠틀맨십, 스포츠맨십, 시민정신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의 선비는 왜 신사가 되지 못하는가?
상무(尙武)는 선비의 필수 요건! 신라의 화랑, 서양의 기사, 일본의 사무라이는 문무겸전의 완성적인 인격체였다. 허나 중국과 한국은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문무(文武)가 구별되고 그에 따라 편향된 인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의 왜곡된 선비관은 많이 배운 사람(文士)일수록 심하다. 그들은 스스로 선비인 양 자처하면서도 막상 피곤한 현실문제에 부딪히면 비판적 내지는 방관자적 자세를 취한다. 하여 지성인이라면 마땅히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나 의무에서 한쪽 발을 슬쩍 들어 빼거나 자신의 유불리, 호불호에 따라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한국인들의 비겁하고 이율배반적이며 고집스럽고 배려심 없는 근성과 반쪽짜리 세계관은 바로 이 주인장 의식의 결여 때문이다.
▲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을 남긴 영화 '킹스맨' 포스터. © (주)이십세기폭스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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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武臣)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반란을 진압하거나 외적과의 전쟁(戰爭)에서 공(功)을 세워야 신분을 상승시키고 보상을 받는다. 반면 문신(文臣)들은 체면을 걸고 정쟁(政爭), 그러니까 말싸움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원하는 것을 차지한다. 하여 정정당당히 실력을 겨루기보다는 중상, 모함, 떼짓기, 떼쓰기로 상대를 끄집어내려 그 자리를 뺏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문(文)에는 승패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신들은 대개 주인 아래서 아전이나 서기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인장 의식이 부족하다. 해서 주인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섬긴다. 해서 나라를 팔아먹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문(文)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야성이 없을 리 없을 터, 그 억눌린 야성이 매너, 교양, 지성으로 다듬어져 덕(德)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변태적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다. 요즘 대한민국이 조선 말기처럼 썩을 대로 썩었는지, 이 땅의 ‘거시기(士)’가 모조리 성도착증에 걸렸는지 자고나면 추잡스런 사건들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나라 샌님들은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선비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선비의 본뜻을 제대로 알고서 하는 것일까?
아무렴 도덕이니 덕목이니 하는 것들이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것이 아니며 법으로 강제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행(行)하지 못하는 건 덕(德)이라 하지 않는다. 가방끈 길이와 상관없이 누구든 빤히 알 수 있는 것들로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다. 한데 그게 잘 안 된다. 그게 인간이다. ‘사람’이 되고 ‘신사’가 되는 게 그렇게 쉽고도 어렵다.
정신(精神)이란 행동의지
문(文)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정신(精神)’이라 하면 습관적으로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철학사상, 고매한 영혼을 떠올리지만 기실 정신이란 그런 게 아니다. 서구인들에게 정신이란 ‘십(-ship)’, 즉 ‘OO다움’에 다름 아니다. 젠틀맨십이란 신사다움이며, 스포츠맨십이란 스포츠맨다움이다. 제 직위나 직분, 심지어 직업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품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를 ‘-답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정신이란 위에 나열한 덕목을 실천하려는 의지이자 규범을 이르는 말이다. ‘정신 차려라’는 건 ‘어떻게 행동할 지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도(道)’ 역시 마찬가지다. 그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진리든 뭐든 목표를 향해 꾸준히 실천해나가는 과정을 뜻하는 용어로 ‘십(-ship)’의 동양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사다운 행동지침, 즉 품격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유교를 받들며 자나깨나 공자왈맹자왈을 가르쳐 온 나라에서 법으로써 새삼 인성을 어찌해보겠다며 인성교육진흥법을 만들었다. 세계 유일한 이 법이 제시한 인성의 핵심 가치 8항목은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이다.
헌데 엄밀히 말하자면 효(孝)는 충(忠)과 마찬가지로 덕목일 수가 없다. 주군으로부터 벼슬과 전답 혹은 녹봉을 받았으니 충성을 바치고,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었으니 보은(報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당사자 간의 일종의 계약관계이지 덕목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직과 협동, 존중 또한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보편적 덕목으로 삼기엔 무리다.
소크라테스는 덕(德)은 곧 지(知)라 하여,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아니면 덕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고 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과 의지, 정욕으로 나눠지듯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급도 이성에 해당하는 지배 계급, 의지에 해당하는 방위 계급, 정욕에 해당하는 직능 계급으로 나누고, 이들 각자에 해당하는 덕을 지혜, 용기, 절제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의 덕’과 습관으로 성립되는 ‘습득의 덕’으로 나누었는데, 후자를 ‘윤리적인 덕’이라 불렀다. 그 습관이 곧 매너겠다.
그렇지만 인성(人性), 즉 인간의 본성은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평가의 대상도 아니다. 인성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인품은 객관적이다. 성품(性品)에서 성(性)은 어찌 할 수 없지만 품(品)은 다스릴 수 있다. 품행(品行)이란 그의 행위를 평하는 단어이고, 품격(品格)이란 그 격(格)으로써 그 사람의 덕(德)을 살핀다는 것이다. 이는 곧 격(格, 매너)으로써 품(品)을 높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따라서 인성교육이 아니라 인품교육이어야 바른 표현이다. 그 인성이야 어떻든 간에 공동선(共同善)을 따르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교육하는 길밖에 없다. 오직 매너(禮)로써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길러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 옛날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군자(四君子)가 선비정신의 표상?
그렇다면 우리의 선비정신은? 흔히들 문인정신을 선비정신이라 여겨 선비의 덕목으로 의리, 지조, 청백(淸白), 청렴(淸廉), 청빈(淸貧)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사군자(四君子)에 빗대어 선비의 덕목을 강조하기도 한다. 한데 가만히 사군자를 뒤집어 보면 이것들은 결코 학문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선비(文人)의 덕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매난국죽(梅蘭菊竹)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지조, 절개, 절제, 강직, 솔선수범, 희생 등은 실은 모두 무덕(武德)에 다름 아니다. 기백(氣魄)이니 사기(士氣)니 하는 말은 곧 무혼(武魂)이다. 글 읽는 선비들이 지니지 못했거나 부족해지기 쉬운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하여 평소 문인들이 곁에 두고 본받기를 바라는 뜻에서 사군자(四君子)를 선비의 벗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학문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선비정신은 지식인의 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병가오덕(兵家五德, 智信仁嚴勇)이 군자(君子)의 덕목에 가깝다. 유가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지닌 척 할 수 있는 덕목이지만 엄(嚴)과 용(勇)은 실천으로 밖에 증명할 수 없는 덕목이다.
게다가 청백, 청렴, 청빈이라니? 도무지 이 시대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뿐더러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입에 담는다는 건 위선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벼슬 못한 조선 선비를 달래려고, 또 녹봉이 적더라도 탐욕부리지 말고 자족하며 살라는 뜻으로 가난한 조선 왕조가 내세운 궁여지책이겠다. 예의염치와 청빈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런가 하면 근자에 들어 유학자들이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선비정신을 되살려 선진국 문턱을 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뜻이라며 이는 곧 공감과 배려라는 현대적 덕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배려를 봉건적 잣대로 해석한 것이다. 공경(겸손)의 글로벌 코드는 ‘비굴’이다. 여기에는 위선과 자기비하가 끼어들 소지가 다분하며 그로 인해 갑질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갑(甲)은 을(乙)이 만드는 것이기에 말이다. 무작정 공손은 을질인 셈이다.
배려는 누구를 낮추고 높이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배려란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기본 개념에서 상대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자신도 존중받아 인간존엄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인(仁)자도 그저 막연하게 ‘어질다’가 아닌 ‘상대방 지향적’ ‘인간존엄성 추구’라는 구체적인 개념으로 재해석해야 하겠다. 예(禮) 또한 글로벌 소통의 도구로 재인식되고 그 형식도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
이처럼 인간존엄성 확보에 대한 인식 부재는 유교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게 아니라면 선비정신에 충만했던 조선이 과연 세계의 선진국이었던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교문화, 선비정신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고 가르쳐온 대한민국이 왜 진즉에 선진 모범국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황폐해졌는가? 이는 그만큼 유학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겠다. 헌데도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제대로 성찰해 본 적이 없다. 선비정신을 유교정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한국인들의 교육관 내지 가치관에 심대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선비정신이란 곧 ‘칼의 정신’
문(文)은 쪼개지는 성질이 강한 반면 무(武)는 하나로 합치려는 성질이 강하다. 고려 무신정권은 하나됨을 위해 투쟁했지만 조선 사대부들은 쪼개지기 위해 물어뜯었다. 진정한 하나됨, 화합, 통일은 개개인의 문무겸전, 즉 완성된 인격체이다. 그런 나라 국민들은 굳이 화합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단언컨대 문(文)이 화합한 적은 인류사에 단 한 번도 없다. 칼로 싸우면 승부가 분명하지만 입으로 싸우면 승부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칼싸움엔 승복밖에 없지만 입싸움(言爭, 論爭)엔 감정만 남는다. 하여 문명은 언제나 입으로 갈라서고 칼로 봉합해왔다.
당연히 혁명이나 창업은 무사 혹은 무사적 기질을 가진 자의 몫. 개화기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상업과 무역에 뛰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젊은 사무라이들이 서구 선진문명을 배워와 개혁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수구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해 결국은 유신을 성공시켰다.
반면 조선은 글 읽던 샌님들을 유람단으로 보내는 바람에 실패했다. 유람기를 남기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용기를 내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뒷감당도 못하고 사흘 만에 제 한 목숨 건지고자 줄행랑쳐 버렸다. 무(武)의 정신을 잃어버린, 혁명이 뭔지 알 리가 없는, 거세된 조선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거기까지였다.
레 미제라블 코리아!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 땅의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고 있지만 기실 다 헛소리다. 속을 들여다보면 그 반대! 갖은 명분을 내걸고 좁쌀 하나라도 쪼개서 제 몫(영역) 챙기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를 금과옥조로 삼아 시시콜콜 지엽적인 명분론에 집착하여 대세를 부정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쟁이일 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하되 자신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부정하려 든다. 결국 갈등과 편가르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도의 민족은 영원히 분열의 굴레를 숙명으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지난날 통일신라가 그랬고 로마제국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가 그랬듯 반도국가도 최고의 번영을 구가할 때가 있었다. 말처럼 내지르고 내달리는 성질이 바로 반도 민족의 근성이다. 밖으로 내달릴 때는 번성하고, 안으로 움츠릴 땐 대륙의 겨우살이로 쇠락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문무(文武)의 균형된 인식체계 없이는 세계사를 주도할 수가 없다.
글로벌 매너로 환골탈태해야
예전에 케이블TV CHING 채널에 중국 사극 프로그램 <공자(孔子)>가 방영된 적이 있다. 5회 편에 보면 어린 시절 공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부, 오(吳)나라의 왕위계승권자임에도 왕 되기가 싫어 노(魯)나라에 주재하는 사신 역을 자청하여 공자의 집에 하숙하고 있던 계찰(季札)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소년 공자에게 식견을 높여주고자 성인식 관례(冠禮)를 치러준 후 함께 중국 고대사의 주요 사적지를 소오(笑傲) 주유(周遊)하며 ‘선비(士)’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듯 제후국가의 가신 테크노크라트(technocrat)가 ‘선비’가 아니고 요 임금, 순 임금, 우 임금을 원조 ‘선비’라고 가르치고 있다. 문과 급제하여 입신양명코자 글만 읽던 조선 선비가 아닌 수십 년 황하 치수 작업으로 다리의 털이 모두 없어져버린 우(禹) 임금처럼 국민을 위해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의 국가지도자가 오리지널 ‘선비’인 것이다.
“요즘은 서양에서도 동양문화, 유교문화에 관심이 많다. 그들도 이제야 동양문화의 우수성에 눈뜨고 있다!”며 우리가 왜 서양 것을 따라야 하느냐며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렴 그런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것을 내다버리고 한국문화를 배우고, 한국인을 존경할까? 제발 꿈 깨자!
일찌감치 중국에서조차 내다버린 유학을 누천년 동안 우리가 지켜온 것을 대단한 일인 양 스스로 기특해 하지만 이를 달리 바라보면 답답하고 가련한 노릇이다. 우리가 성인이라 받드는 인물들이 모두 다 그렇지만 공자야말로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고 좌파적 인물이었다. 그러니 오늘에 다시 환생한다면 필시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라며 우매하고 고집스런 이 민족을 보고 혀를 찰 것이다.
이젠 글로벌 매너가 국본(國本)이다. 매너[禮]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주인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여 척주비공(刺朱批孔)! 주희(朱熹)를 척살하고 공자를 내쳐야 한다. 나중에 되살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죽여야 한다. 스스로 해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공자님께 여쭐 일이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 당당하게 주인장되기 훈련을 해나가야 한다.
무작정 서양 예법을 따라하자는 것이 아니다. 글로벌 매너를 익힌다고 우리 것을 버리자는 것도 아니다. 영어를 배운다고 우리말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영어 배운다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매너는 소통의 도구이다.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는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기술이다. 매너 없인 선진화도 없다. 우수한 매너가 있으면 얼른 받아들여 보다 소통적으로, 보다 인간존엄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동방예의지국을 넘어 글로벌매너지국으로 거듭나야 한다.
간혹 외국 친구들이 “한국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얼마나 행복한 지, 얼마나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정말이지 매너만 갖춘다면 대한민국도 꽤 괜찮은 나라다. 이제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가 아닌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선진시민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시민교육! 새마을운동이 아닌 품격운동으로 다시 한 번 체질개선작업을 해야 한다. 신사가 곧 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