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불문하고 사소하지만 바꾸기 가장 힘든 것이 관혼상제에 다른 의례(儀禮)이다. 지난 6일, 중국 연수중 버스 전복 사고로 사망한 10명의 공무원 시신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찰의장대가 공항에서 운구(運柩)를 맡았는데 예의 관습대로 하얀 마스크를 쓰고 관(棺)을 들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 광경이 세계인들에겐 낯설 뿐만 아니라 자칫 국격까지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한국은 메르스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는 중이니, 필시 이 사진을 본 외국인들은 한국에 메르스가 창궐(猖獗)하고 있거나 다른 몹쓸 전염병으로 사망한 시신을 운구하는 줄로 짐작하게 마련이다. 흡사 일제 관동군 731부대를 연상시킨다. 시신은 무덤에 안장하기 전까지 생전과 똑같이 인격(人格)으로 대하는 것이 인류 공통의 예법이다. 위생마스크를 쓰는 건 시신을 불결하게 여긴다는 모욕(侮辱)적인 처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그것이 마치 엄숙함, 청결함인 양 착각하고 있다. 의장대원들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서라지만 그 역시 운구하는 일을 복된 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세계인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망자(亡者)에 대한 모독(冒瀆)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리고 운구할 때 우리는 흰 위생장갑을 끼는데 이 또한 무조건 따를 일은 아니다. 망자와 가족 친지이거나 친한 동료라면 맨손으로 운구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다. 그렇지만 망자와 남녀 유별한 사이라면 장갑을 끼는 것이 매너다.
시신도 화물일 뿐? 한국에서 관혼상제(冠婚喪祭)가 간소화 되면서 운구를 할 때 관을 끈으로 묶어 운구자들이 좌우에 붙어 들고 나간다. 이 또한 지구상에서 유일한 한국인들만의 관습으로 시신을 인격(人格)이 아닌 물격(物格) 취급하는 무례한 처사라 할 수 있다. 역시 위생 마스크만큼이나 망자를 모독하는 일이다. 관을 어깨로 매거나 머리 위로 높이 드는 건 망자에 대한 존중심의 표현! 하여 세계의 모든 민족은 관을 어깨 위로 매어 운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굳이 남의 관습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항변(抗辯)할 수도 있지만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예전에 우리도 상여(喪輿)를 어깨로 매었다. 세계의 그 어느 민족보다도 격조(格調) 있고 아름다운 장례문화를 가진 동방예의지국이었다. 망자에 대한 존중이 곧 망자와의 소통이다. 시대에 맞게 예법을 간소화한다고는 하지만 ‘예(禮)의 정신’은 살렸어야 했다. 비록 상여 없이 관을 옮긴다 해도 어깨 위로 올리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다. 그게 어색하다면 이참에 교자처럼 간이식 상여를 만들어 거기에 관을 얹어 매고 나가는 것도 전통을 계승하는 방법이 되겠다. 조화(弔花)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모조리 흰 국화꽃 일색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전몰 용사들에게까지 흰 꽃을 바친다. 역시 세계 유일한 관습이다. 백의민족이니 당연히 흰 꽃이겠거니 하지만, 이 역시 천만의 말씀이다! 예전에 우리 조상님들은 오색지화로 꾸민 꽃가마를 타고 저승길로 떠났다.
일제 식민문화 청산은 예법부터! 지금 한민족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근조 위생마스크, 근조 리본, 흰색 조화 등 한국의 많은 예법들이 1945년 8월 15일에 멈춰 있다. 일제 피식민지배 시절 배운 그대로! 역사 바로 세우기, 일본의 과거사 날조 반대, 일제 청산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예법은 아직도 일본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라지만 과연 무엇이 진정 우리 것인가? 누천년 전의 중국 예법은 지금도 존귀하고, 식민 예법은 생각 없이 답습하고, 당장의 예법은 그 의미도 모른 체 중구난방 퍼져나가고 있으니, 도무지 ‘생각’이 있는 민족인지 없는 민족인지 의심스럽다. 해방 70년이 지났지만 사고(思考)는 아직도 해방되지 않은 것 같다. 이 땅의 그 많은 유학자, 예학자, 경학자들은 갓 쓰고 도포 걸치고 공맹(孔孟)만 받들 줄만 알았지 정작 이 시대의 예법엔 나몰라 하고 있다. 끔찍한 사고(事故)가 터질 때마다 ‘인성교육’ ‘선비정신’을 들먹이며 《논어》를 뒤적거리는 게 고작이다. 예법은 공자님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 시대에 가장 진보적인 매너학이었다. 지금 예법은 지금을 사는 우리가 만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무렴 제 스스로는 머리 하나 못 감는 어정뱅이들! 기실 옛 것을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지만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용기(勇氣)가 아니다. 지조(志操)도 아니다. 고집일 뿐이다. 선비란 경전 암송가가 아니다. 용(勇)이 없으면 오덕(五德)이 아니라 백덕(百德)도 무용지물! 새로운 것을 상상해 내고 실천해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다. 용기 없는 민족은 창조 못 한다. 세종대왕도 용기가 없었으면 한글 창제 못 했다. 이순신 장군이 용기가 없었으면 거북선을 만들기는커녕 설사 누가 갖다 줘도 못 받아들였을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아니라 새예법 운동, 인간존엄성 확보를 위한 ‘매너즈 소사이어티 운동’이야말로 선진 주류사회 진입을 위한 진정한 체질개선작업이다! 그게 유신(維新)이고 혁신(革新)이다.
▲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 장례식의 노 마스크 운구장면. ⓒ로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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