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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정적들은 근공의 대상, 백성들과 재야세력은 원교의 대상
원교근공(遠交近攻)
 
서상욱(사학자) 기사입력  2013/01/3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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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역사학자) 
외교전략의 원칙으로 알려진 원교근공은 정치투쟁에서도 유효하다. 원교근공의 궁극적인 목적은 적을 각개 격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용과정에서는 구체적으로 명확한 형세판단, 원근의 구분, 적절한 행동계획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형세판단을 잘못하여 불리한 상황에서 행동했다가는 모든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
 
전한 말의 외척 왕망(王莽)은 제위를 찬탈하는 음모를 꾸몄을 때 원교근공을 기본적인 책략으로 삼아 제위를 찬탈했다. 왕망은 특히 이미지 관리능력이 뛰어났다. 왕망은 성제(成帝) 시대에 고관을 역임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마침 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이 중병에 걸려 사임하자 보정을 맡으려던 왕망은 태후의 생질이던 순우장(淳于長)이라는 경쟁자와 부딪쳤다. 순우장에게 호감을 가졌던 왕근도 그를 후임으로 생각했다. 왕망은 왕근을 찾아가 순우장이 진작부터 후임 보정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자질했다. 또 태후를 찾아가 순우장이 폐출된 허황후로부터 뇌물을 받고 복위를 추진한다고 고자질했다. 순우장은 대역죄로 몰려 옥중에서 사망했다. 드디어 왕망이 대사마(大司馬)로 임명되어 보정을 맡게 되었다.
 
왕망은 자세를 낮추어 명사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조정에서 받은 상과 봉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몽딸 털어 공경과 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당시에 귀부인들은 옷자락이 땅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왕망의 부인은 짧은 옷을 입고 다녔으며, 그의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매우 소박하고 검소했다. 사람들은 그러한 왕망을 우러러보았다. 왕망의 위망은 날아 갈수록 높아졌다.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왕망은 파직되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3년 후에 왕망은 복직되었다.
 
애제가 죽자 왕망은 태황태후의 마음을 사로잡고, 반대파를 제거한 후 대권을 장악했다. 새로 즉위한 어린 평제(平帝)를 보필하는 대사도(大司徒) 공광(孔光)은 태후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왕망은 일단 그를 높이 받드는 척 했다. 그는 공광의 사위 견감(甄邯)을 봉거도위(奉車都尉)로 발탁하여 공광의 지지를 얻은 후에 하무(何武)를 비롯한 자신의 반대파들을 축출했다. 태후의 동생 홍양후(紅陽侯) 왕립(王立)은 잠재적인 정적이었다. 화근은 미리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왕망은 공광에게 왕립의 죄를 주청해달라고 부탁했다. 태후가 차마 친동생의 죄를 추궁하지 못하자 왕망은 사사로운 정 때문에 대신들의 중론을 거부한다면, 장차 신하들이 사악한 짓을 하더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봉국으로 돌아간 왕립은 몇 년 후에 왕망에게 제거되었다.
 
BC 1년, 드디어 조정의 권력을 독점한 왕망은 백관을 총괄하게 되었다. 왕망의 권세가 나날이 높아지자 불안감을 느낀 공광은 스스로 사퇴하겠다고 요청했다. 왕망은 태후를 설득하여 공광을 태부(太傅)로, 마궁(馬宮)을 대사도로 임명했다. 태부나 대사도는 명목상으로는 재상의 반열이었으나 실권이 없는 자리였다. 몇 년 후 왕망은 봉작에 관한 일을 제외한 모든 정무를 장악하여 평제와 태후를 능가하는 권력자로 부상했다.
 
왕망의 원교근공은 조정 내부의 정적을 분할하여 다스리고 조금씩 각개 격파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가 조정의 반대파들을 대거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백성들과 재야인사들의 지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는 권력의 근본이 여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던 정치적 권모의 고수였다. 모든 재산을 털어서 지지 세력을 강화하는 수법은 고대 제나라의 전(田)씨와 유사했으며, 자신은 물론 집안사람들마저도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한 것은 재야인사와 백성들에게 자신이야말로 그들의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러한 왕망을 음험한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치가로서 그의 행동은 정당하고 유효했다. 재야세력과 백성들의 지지는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는 원동력이었다. 그에게 조정의 정적들은 근공의 대상이었고, 백성들과 재야세력은 원교의 대상이었다. 권력의 교체기에 내밀한 곳에서는 지금도 이미지를 앞세운 원교근공이 횡행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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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3/01/30 [00:02]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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