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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황소지란(黃素之亂)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5/03/0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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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역사학자)     © 한국무예신문
대당제국의 붕궤(崩潰)를 재촉한 황소의 농민반란은 신라의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지은 일로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荷澤) 출신으로 조상은 3대째 사염매매업에 종사했다. 여러 차례 진사과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자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9월이 오기를 기다렸다가(待到秋來九月八), 국화가 피면 모든 꽃들을 없애리(我花開後百花殺). 하늘까지 퍼지는 향기 장안에 스며들면(冲天香陳透長安), 성안 가득 황금빛 갑옷으로 채우리라(滿城盡帶黃金甲).’
 
훗날 반란을 일으켜 장안에서 ‘7일 천하’를 누릴 것을 예상한 것 같다.
 
귀향한 그는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 염방의 수령이 되었다. 674년, 하남에 가뭄이 발생하자 왕선지(王仙芝)와 상군장(尙君長)이 농민을 모아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을 비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도 거기에 가담했다. 몇 달 사이에 수 만 명이 모였다.
 
왕선지와 황소는 철저한 유격전술로 관군과 싸웠다.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왕선지가 관직을 받자, 분노한 황소는 그와 헤어져 북상했다. 유격전술은 장기적인 대책이 아니었다.
 
박주(亳州)에서 왕선지의 부장 상양(尙讓)과 연합한 황소는 충천(沖天)대장군이라 자칭하고, 초보적인 농민군정기구를 설립했다. 농민군의 기세가 커질수록 관군의 반격도 강했다. 낙양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황소는 방향을 돌려 양자강을 건넜다. 강서, 절강을 거쳐 복건까지 남하했다.
 
황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조정과 협상을 하다가 전투력을 회복하면 요충지를 기습했다. 영남 일대를 점령한 그는 의군통령을 자칭하고, 환관의 폐해와 조정의 실정을 공격하는 격문을 돌렸다. 역사는 당시의 극단적인 폐단을 지적했다고 평가한다.
 
광주에서 독립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마침 전염병이 돌자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북방출신인 부하들도 북상하여 더 큰 이익을 도모하자고 주장했다.
 
북상하는 도중에 가담자가 늘어 강릉을 공격할 때는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황소가 절강 일대를 장악했을 때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도통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다. 이 무렵 최치원이 격문을 지었다.
 
고병은 황소의 완병계(緩兵計)에 넘어가 궁지에 몰린 황소가 전력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황소가 장안을 노리자 그를 막겠다고 나선 사람은 전영자(田令孜)라는 환관이었다.
 
그가 끌고 온 신책군(神策軍)은 이름은 거창했지만, 군적에 들었던 부호의 자제들이 돈을 주고 대신 출전시킨 빈민들이었다. 결국 장안이 위험해지자 희종은 성도(成都)로 도망쳤다.
 
황소는 그의 시에서 예언했던 대로 황금빛 옷을 입고 장안에 입성했다. 황소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농민군에 가담했다가 조정에 투항한 주온(朱溫)과 사타족 출신 이극용(李克用)이었다.
 
관군의 집중 공격을 버티지 못한 황소는 장안을 버리고 다시 유격전을 전개했다. 도망치던 황소는 고향 부근인 태산의 낭호곡(狼虎谷)에서 생질에게 피살되었다. 조카 황호(黃皓)가 패잔병을 이끌고 유격전을 펼치다가 호남에서 피살되자 10년을 끈 농민반란도 마무리되었다.
 
황소에게는 23명의 여자가 있었다. 희종이 왜 도적을 따랐느냐고 묻자, 한 여자가 대답했다. “국가는 백만의 병력으로도 종실을 지키지 못하고 파천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도적을 막지 못한 책임을 공경과 장수들에게 묻지 않고 한 여자에게 묻습니까?” 희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모두 죽였다.
 
집행관은 여자들을 불쌍히 여겨 술에 취하게 한 후 참수했다. 황제에게 따지던 여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당당하게 형을 받았다.
 
황인우(黃仁宇)는 ‘장강을 4번, 황하를 2번 자유롭게 오간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반란군이 당제국의 무수한 틈새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각지의 지방관들은 자기 지역의 안전을 돌보기에 바빴기 때문에 그들을 잡기 위한 유효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신당서’에서는 ‘현명한 신하는 배척을 받아 죽고, 겁쟁이가 자리를 차지했다. 세금과 형벌이 가혹하자 천하에 근심이 늘었다. 하늘은 당을 없애려고 도적들을 내놓았다. 5개의 왕조를 거치면서도 전쟁은 계속되자가, 송에 이르러서야 천하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한이 망한 것도 천하의 대란 때문이었고, 진에 이르러서야 안정됐다. 진이 망한 것도 천하의 대란 때문이었고, 당에 이르러서야 안정됐다. 치세는 짧고, 난세가 길었던 것은 고금의 형세이다’라고 지적했다. 지금은 치세인가, 난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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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5/03/04 [07:05]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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