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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의 고전 속 정치이야기] 화가골기(畵家骨氣)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6/0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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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개 서상욱     ©한국무예신문
명말청초에 항주에서 명성을 날린 화가 진노련(陳老蓮)은 골기가 있었다. 평생 관직을 사양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으며,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았지만 권세를 위한 그림은 거절했다.

4세에 8척이나 되는 관우(關羽)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천재였지만 9세에는 아버지를 잃고 친척집에서 살았다. 당시 항주에 살던 대화가 남영(藍瑛)은 14세인 소년이 그림을 판다는 말을 듣고 직접 찾아갔다. 감탄한 남영이 진노련을 제자로 삼았다.
 
채색을 놓고 토론하던 남영은 제자의 재능을 감당하지 못하자 천재라고 감탄했다. 꽃, 대나무, 돌 그림으로 유명한 손추(孫秋)도 오도자(吳道子)나 조맹부(趙孟頫)보다 뛰어나다면서 진노련의 앞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천재는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절차탁마했다. 당시 항주부학에는 북송 이공린(李公麟)이 그린 72현상이 있었다. 진노련이 그 가운데 하나를 모사했다. 그것을 본 사람이 똑같다고 칭찬했다.
 
열흘 후에 또 한 장을 그렸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말을 들은 진노련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진노련은 다양한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서호 주변에 있는 불상과 신상을 관찰했다. 시장을 찾아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 오랜 습작의 결과 그는 인물화나 풍속화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태창(泰昌) 원년(1620) 봄, 수재로 선발돼 다시 항주로 왔다. 진노련은 만년에 23세였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고 그리워했다. 가수 동비선(董飛仙)을 그린 연화도는 당시의 작품이다. 얼마 후 그의 아내가 죽고, 자신도 병에 걸리자 항주로 돌아와 구루산방에서 독서와 그림에 전념했다. 나중에 재혼하여 6남 2녀를 두었다. 4남 유정(儒楨)이 중국 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진소련(陳小蓮)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644년, 청병이 항주를 점령하자 진노련은 소흥으로 갔다. 당시에 망국의 회한을 담아 그린 것이 유명한 뇌봉서조도(雷峰西照圖)이다. 청군에게 잡혀 장군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출가했다. 5년 후에 항주로 돌아온 그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복건으로 이주했다.
 
정치적 동란으로 경제생활이 어려웠지만 만년까지 진노련은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과 가수와 늙은이들을 그리기를 좋아했고, 특히 뜻을 이루지 못한 지사들을 즐겨 그렸다.
 
가장 돈벌이가 될 관리나 귀족을 그리는 것은 싫었다. 하루는 서호에서 뱃놀이를 하던 벼슬아치들을 만났다. 그들이 비단을 꺼내 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강권했다. 진노련은 큰소리로 욕을 하면서 자살하려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이후에도 사람을 보내 그림을 부탁했지만 절대로 붓을 들지 않았다.
 
1652년, 소흥으로 돌아 온 진노련은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항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중국의 회화사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판화에도 뛰어 났다.
 
이고진본 서상기의 삽화에는 항주 영은사를 새긴 판화가 들어 있고, 장심지정북 서상기에 있는 판화는 소제에서 새긴 것이다. 이 여섯 폭의 아름다운 판화는 유명한 조각가 항남주(項南洲)가 새긴 것으로, 17세기 중국 판화 가운데 진귀한 보물이다.
 
진노련은 수호엽자(水湖葉子)라는 두 개의 투곡(套曲)을 짓기도 했다. 그중 하나는 친구 주공가(周孔嘉)를 위하여 지은 것으로 휘주(徽州)의 명수 황조초(黃肇初)와 합작한 것이다. 장대(張岱)는 수호엽자를 보고 얼굴, 복장, 무기, 기계들이 너무 낡았다고 평가했지만 본질을 모르고 한 말이다. 진노련은 화가의 감각으로 수호지 영웅들에게 생생한 기개를 불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예술가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척도가 무엇일까? 예술은 창의가 가장 중요하므로 역시 골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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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6/08 [10:56]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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