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사이다.
촌수로 따져 전혀 남이 아닌 관계라고 한다. 맨손 무예라는 공통된 특장이 있다라는 전제에서는 가능하다. 태권도인과 택견인들의 관점이 그것이고 보편적일 듯싶다. 하지만 두 무예인들 사이에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다. 선후에 따르면 당연히 택견이 먼저다.
택견의 일부 용어가 태권도에서 보여 진다. 그뿐이 아니라 역사서술에서도 무맥의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다. 태권도 용어에서 품, 두발당성(두발당상), 칼제비(칼잽이), 날개펴기(활개짓)등이 그것이다.
태권도사에서 송덕기(1893~1987)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초창기 태권도협회에서는 송덕기를 많이 활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파트너가 되어 택견 실연 장면을 찍은 사진으로는 송덕기와 박철희, 송덕기와 임창수 등 자료가 남아 있다. 그 중 임창수와 찍은 장면은 『태권도교본 품세편』(대한태권도협회, 1972:23)에서 만날 수 있다.
임창수는 송덕기와의 실연에서 인물을 가장하고 있다. 코밑에 수염을 붙이고 나이 많은 노인으로 치장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태권도사범으로 미국에서 활동했던 그는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수년째가 된다.
예컨대 택견=송덕기의 부활로 택견은 1983년 6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송덕기와 신한승 두 분이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택견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분은 1987년 7월, 20일 간격으로 운명했다. 원형 시비는 한때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태권도교본』(국기원, 2009)에 송덕기는 아직도 생존한 인물로 되어 있다. 그는 그 교본의 전신인 『국기 태권도교본』(1987)이 나오기 몇 달 전에 타계했다. 이렇게 적고 있다.
“현존하는 인물로 그 당시 택견을 배워 민속경기에 참여한 송덕기옹의 증언에 의하면….”
지적을 당했으나 다음 쇄(刷)를 거듭하지만 바로잡지 않고 있다.
▲ 택견(左),태권도(右) 경기장면(사진출처:네이버) © 한국무예신문 | |
태권도는 일찍이 대한체육회에 가맹단체로 인정(1963)받은 데 반해 택견은 오랫동안 체육회 가맹을 저지당해 왔었다. 그러다가 인정종목(2001)으로부터 시작 준가맹단체(2003)를 거쳐 마침내 정식가맹단체(2007)로 승인되었다. 전국체전의 시범종목으로 올해(2011) 92회 경기도전국체전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6체급). 인고의 세월이었다.
최근 언론매체는 택견의 국제화 발돋움의 계기가 되는 희소식을 알리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권고’가 그것이다. 택견은 1983년에 국가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계기는 최홍희에 의해 점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8년 최홍희는 ‘태권도’의 창시자로서 자신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신청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인 예용해가 조사한 결과 “태권도가 택견을 승계한 우리의 전통문화라 하지만 태권도가 가지고 있는 세계적 성예(聲譽)와는 별도로 문화재는 원형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어야 함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불가사유였다.
태권도계에서는 아직도 줄기차게 ‘태권도=택견’ 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몇이 있다. 그들의 논리(등식)는 그것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지만 기술은 차치하고 역사성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 택견계에서는 태권도와 택견은 맨손 무예의 무맥은 같을지 몰라도 역사, 기술, 원리, 정신 등 모든 면에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한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 한다.
태권도계가 답할 차례이다. 시중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공인교본 『태권도교본』(국기원, 2009)에 따르면 송덕기 옹이 생존해 있다는 기술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아직도 지우지 않고 있다. 아직도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시 의도적으로 썼던 사관을 그대로 신봉하도록 두고 있다.
택견의 갈래도 몇이 되는 걸로 들린다. 보존회, 전수관, 연맹 등 원형의 보존을 두고 서로가 ‘적통자’라는 주장이다. 대승적 차원에서 단체 간의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신뢰와 협력을 낳는다. 곧 희소식(등재)이 유네스코로부터 공식 발표가 있을 것이다. 제주 세계7대 자연경관이라는 쾌거에 이어 또 하나의 경사로 ‘중요무형문화재 택견’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거다.
『민족무예 택견 연구』(학민사, 2001)「『태권도』지 송덕기 선생 보도 자료」이석호 태권도지 기자의 글이 게재돼 있다(237쪽). 이석호 기자란 가명이다. 당시 편집담당자가 쓴 기사인데, 이석호(5세)는 당시 이종우 아들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1971)
그 글 가운에 이러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현재 우리가 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현대적 감각과 일본의 것을 우리화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이 귀중한 자료가 앞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권 용어에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을 믿고 고유 태껸의 기술 용어를 소개하기로 한다."
“또한 우리 태권도의 역사적 정리에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료를 애써 찾는 자세와, 이와 같은 인물이나 자료가 발견했을 경우 지체 없이 본 협회에 연락해 줄 것을 바란다.”
시방 국기원 연구소(소장 이봉)에서는 WTA(세계태권도아카데미) 교재개발 중이다. 늦어도 이 해가 가기 전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태권도 역사 서술은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그 사실이란 ‘태권도’ 이름이 생겨난 시점이 경계가 되어야 하며 그 이전은 당시의 명칭을 그대로 인용하는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무용총 벽화의 그림이 수박이고 수박이 곧 태권도라는 등식은 이제 아무도 신봉하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태권도 이름자체마저 그 유래를 최홍희 자신이 왜곡했으니 더 뭐라 부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