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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왜 13척으로 다시 싸우러 나갔나?
대박통일이면 하고 쪽박통일이면 안 할 것인가? ‘경험적 가치’와 ‘태도적 가치’ 혼조에서 마구 망가져온 대한민국의 정체성. 사적 우물안 세계관 버리고 공적 선진문명권 아젠다로 글로벌 무대로 올라야!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기사입력  2014/03/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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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대 주필(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한국무예신문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끌려가 모진 고초 속에 살아남은 유대인 의사 빅토르 에밀 프랑클은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창조적 가치’ ‘경험적 가치’ ‘태도적 가치’로 분류했었다.
 
수년 전부터 ‘가치’란 단어가 글로벌 비즈니스계에 화두로 회자되기 시작하더니, 근자엔 우리나라에서도 ‘가치추구’니 ‘가치경영’이니 하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만 기실 그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성찰도 없이 그저 막연히 글로벌 성공기업들을 따라 읊조리는 것 같다.
 
이 ‘가치(value)’를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적 시각으로 달리 해석하자면 우선 ‘경험적 가치’와 ‘태도적 가치’로 대별할 수 있겠다. ‘경험적 가치’를 또 다른 말로 하면 계산적 가치, 즉 유불리(有不利)에 따른 ‘제 수준 통박에 맞춘’ 소위 합리적인 가치가 되겠다. 대개 기회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가치겠다. 그에 비해 ‘태도적 가치’는 인간 존엄성 및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에 기준을 둔 가치라 할 수 있다.
 
비즈니스 무대에선 이 두 가치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마련이다. 이익을 추구할 땐 ‘경험적 가치’를 중시해야 하고 인간 존엄성과 정체성을 추구해야 할 땐 반드시 ‘태도적 가치’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도(道)’란 ‘태도적 가치’ 추구의 동양적 표현
 
한국인들은 자기비하에 익숙해서 정작 자신의 훌륭한 문화를 잊거나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그러다가 서양 선진국에서 누가 떠들어주면 그제야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새삼스레 호들갑을 떤다. 근자의 ‘가치’에 대한 맹목적 따라읊기 역시 마찬가지 현상이라 하겠다.
 
사실 ‘태도적 가치’란 한국인들이 그토록 입에 달고 다니는 ‘도(道)’에 다름 아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으로 ‘태도적 가치 추구’라 하겠다. 하여 도덕(道德)이란 곧 ‘덕(virtue)’의 추구란 의미다. 아무렴 도(道)를 닦든 ‘태도적 가치’를 추구하든 자신의 포지션(본분)부터 정확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중간에 갈팡질팡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다.
 
더없이 감정에 충실한 많은 한국인들은 이 ‘경험적 가치’와 ‘태도적 가치’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호불호(好不好)에 따른 ‘기호(嗜好)’를 자신의 ‘태도적 가치’인양 오해하고 있다. 똥고집이 곧 ‘가치’인줄 아는 것이다. 이념 또한 유행이자 수단일 뿐, 가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그런 걸 가치라고 우기며 지성인 혹은 지사인 양 한다.
 
이처럼 가치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다보니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무조건적 맹종이 마치 훌륭한 일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 짝퉁 진보의 ‘닥치고 반대’도 거기서 나온다. 철이 안 들었고 또 안 들 것이라는 말이다. 영웅적 투사가 되고자 하다가 결국 양의 탈을 쓴 등신 늑대가 되고 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진보 지식인들이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이 ‘경험적 가치’와 ‘태도적 가치’를 혼동하는, 아니 인식조차 못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이 나라에선 정치인들이다. 가령 의사로서 길을 가다가 사이드로 밀리자 엉뚱하게 컴퓨터 백신을 만들고, 그마저 세계적인 기업이 되지 못하고 국내 중소기업으로서 한계에 이르자 대학 교수로, 하지만 연구니 논문이니 하는 것에 자신 없자 졸지에 대통령 하겠다고, 절대 민주당과 합당 안한다더니 자신이 창당 자금을 내놓아야 할 처지가 되자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며 합당(실은 입당)해버렸다.
 
자신은 신인이니까 그것도 새정치라고 우겨대지만 하는 짓은 ‘갈짓자’ 정치꾼 중 으뜸이다. 나중에 뭐가 되든 자신의 정체성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라도 뭔가 바뀌었으면 하고 막연한 바람으로 왕초보에게 운전대를 맡기려 드는 일부 국민이나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는 정치인들이나 한심하기는 매한가지겠다. 하여 허구한 날 ‘철학이 없다’ ‘개념이 없다’는 소릴 듣는 게다. 덕분에 ‘깡통’인지 ‘계륵’인지도 모르고 입맛 다시며 쫓던 늙은 여우만 우습게 되었다.
 
정체성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일본의 아베 정권 역시 이 ‘태도적 가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박사논문 표절 판정이 났음에도 버젓이 배지 달고 있는 국회의원은 버티면 살더라는 ‘경험적 가치’에 매달리기 때문이겠고, 막무가내 정권 퇴진운동이 정의구현인 줄 착각하고 막말도 서슴지 않는 극소수 종교인들은 ‘기호적 가치’라는 가치 아닌 가치, 헛것을 따르는 것이겠다. 법정과 감옥을 들락거리는 한국의 일부 재벌 오너들은 ‘태도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을 것 같다.
 
‘가치’란 말조차 아까운 짝퉁 진보
 
천안함 폭침 4주기를 맞아 그동안 온갖 악담으로 거품을 물던 종북정당 인사가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사과해야 한다’며 안면을 바꾸는가 하면 추모식에 참석하려던 인사는 유가족들에게 쫓겨났다. 지방선거가 코앞이라 유불리에 따른 계산적 행동임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진대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다만 이미 사금파리, 밟히고 차일 일만 남았다. 이참에 안철수 따라 도로 민주당으로 들어가 연명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아무렴 까짓 통진당이 추모식에 오든 안 오던, 천안함 폭침을 자작극이라고 우기든 말든, 천안함에 참배를 하든 침을 뱉든, 군인은 그만 일에 연연할 필요 없다. 군인은 군인의 본분만 지키면 된다.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매를 맞고도 고작 13척의 배를 몰고 다시 싸우러나간 것은 ‘태도적 가치’를 따랐기 때문이다. ‘경험적 가치’를 따랐다면 도무지 승산이 없으니 내던지고 도망갔어야 마땅했다. ‘기호적 가치’를 따랐다면 조선은 그때 망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3월 26일 오후(현지시간)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과 둘러보고 있다.<사진출처:청와대> 

이순신 장군의 진짜 차별적 경쟁력 ‘창조적 가치’
 
진정한 용사는 유불리에 상관없이 패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경험법칙상1%의 가능성조차 없는 전투라 해도 나가 싸운다. 13척마저도 없었다면? 뗏목이라도 엮어 타고나가 싸웠을 것이다. 그게 군인의 본분이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의 3백 용사도 페르시아의 10만 대군 행렬에 맞서 그렇게 싸웠고, 기드온의 3백 용사도 강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적군을 기습하여 13만 5천 명을 전멸시켰다.
 
일본 유학중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차가 달려오는 선로에 뛰어든 고(故) 이수현 군도 ‘태도적 가치’를 따른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강호 협객, 제도권 무사, 기사, 민간의 자원봉사 열사, 지사들이 그렇게 목숨을 바쳤던 것도 ‘태도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인류사의 최고 성인으로 기록되는 예수나 소크라테스도 그래서 기꺼이 죽임을 받아들였다. 인간 존엄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안중근은 그래서 의연했다. 무혼(武魂)이야말로 ‘태도적 가치’의 전형이라 하겠다.
 
덕(virtue) 없는 가치(value)는 없다. 가치 없는 품격(品格)도 없다. ‘태도적 가치’ 없인 ‘창조적 가치’도 없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란 ‘창조적 가치’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무혼(武魂)은 무인만의 가치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진보를 계속 자처하고 싶다면 차제에 ‘사적(私的) 우물안 세계관’에서 벗어나 선진문명권의 태도가치적 공적(公的) 아젠다로 글로벌 무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통일대박’과‘닥치고 통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부터 이 나라 최고지도자들의 말의 격이 많이 떨어져왔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에 많은 시민들이 당황스러워 했다. 해외언론들도 이에 합당한 어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결국 중국 등 일부 국가에는 ‘대박’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북한 주민들 역시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온 나라가 ‘닥치고 통일’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네덜란드와 독일 순방에서도 가는 곳마다 ‘통일대박’을 외쳐댔는데, 과연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아무렴 독일이 대박을 기대하고 통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남북한이 통일된다고 독일처럼 대박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독일은 이렇게 요란스럽게 말로 통일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세상 사람들이 본 건 수면 위의 빙산에 불과하다. 긴 시간 동안 수면 아래에서 소리 소문 없는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통일이 빨라지고 제 발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통일에는 상대가 있기 마련인데 과연 상대도 통일을 바라고 있을까? 그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하고 ‘통일대박’인가? 그게 아니면 북한이 절로 무너져 남한에 흡수 통일 될 것이라 기대하는 건데 이는 감나무 밑에 누워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 솔직히 낯간지러운 느낌도 든다.
 
어쨌든 ‘통일대박’이란 독일의 ‘경험적 가치’, 즉 통일 되면 우리도 독일처럼 잘 살고 강국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 나온 말이겠다. 그렇지만 남의 나라 대박 나는 일이 뭐 그리 즐겁겠는가? 횡재, 즉 불로소득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대박’이란 용어에 과연 글로벌 선진사회의 리더들이 공감할까? 순진무지한 한국인들, 그저 “잘 해 보라!”는 입에 발린 인사치레에 지나치게 흥분하는 건 아닌지?
 
분단된 지 70년이 다 되었다. 고작 통일에다 ‘대박’이라는 기회주의적 명분을 내 걸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 이왕지사 ‘태도적 가치’의 의미를 담은 아젠다를 던졌어야 했다. 북한 주민들의 인간답게 살 권리 회복, 인간존엄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양심에 호소하는 메시지여야 했다는 말이다.
 
대박이든 쪽박이든 ‘태도적 가치’를 따라야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대박통일’을 위한 모임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남북한을 이대로 두면 대형 사고를 칠 것 같아 미리 단속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6자회담의 목표는 한반도의 안정, 즉 현상유지다. 다시 말해 통일을 하지 말라는 모임이다. 더 고약하게 말하자면 남한이든 북한이든 스스로 통일할 주권이 없음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모임이다. 만약 분단 독일에도 미·소·영·불이 참석하는 6자회담이 있었다면 아직도 통일 못 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자세와 준비다. 통일은 명사가 아닌 동사다. 형용사는 더더욱 아니다.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란 말이다. ‘태도적 가치’를 따른다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라 해도 기어코 통일을 해내야 하고,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경험적 가치’를 쫓는다면 온 세계가 나선다 해도 통일은 점점 더 멀어만 갈 것이다. ‘경험적 가치’는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의(大義)는 ‘경험적 가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통일에 대해 좀 더 깊은 성찰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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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3/30 [14:40]  최종편집: ⓒ 한국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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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룡 2014/05/06 [16:00] 수정 | 삭제
  • 가슴이 후련하게 글 잘 쓰네요.
  • 김형배 2014/04/01 [16:34] 수정 | 삭제
  •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
  • 좋아요 2014/03/31 [23:45] 수정 | 삭제
  • 역사상 수많은 강호 협객, 제도권 무사, 기사, 민간의 자원봉사 열사, 지사들이 그렇게 목숨을 바쳤던 것도 ‘태도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인류사의 최고 성인으로 기록되는 예수나 소크라테스도 그래서 기꺼이 죽임을 받아들였다. 인간 존엄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안중근은 그래서 의연했다. 무혼(武魂)이야말로 ‘태도적 가치’의 전형이라 하겠다.
  • 조근형 2014/03/31 [10:35] 수정 | 삭제
  • 감사합니다
  • 양태유 2014/03/31 [10:28] 수정 | 삭제
  •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일선 2014/03/30 [23:17] 수정 | 삭제
  • 큰 공감합니다.
  • 최진우 2014/03/30 [18:35] 수정 | 삭제
  • 늘 좋은 글 잘읽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요~~ 고맙습니다.. 많이 느끼고 갑니다~~
  • 쥬스 2014/03/30 [16:59] 수정 | 삭제
  • 무예이야기17에서는 "하지만 이는 무예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생각이다. 무기나 탄약이 떨어졌으면 항복하거나 도망칠 일이지 어찌 맨주먹으로 싸운단 말인가?" 라고 맨손무술은 무술이 아니라고 폄하 하시더니 여기선 또 말이 바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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